1. 모든 사람은 국적을 가질 권리를 가진다.
2. 어느 누구도 자의적으로 자신의 국적을 박탈당하거나 그의 국적을 바꿀 권리를 부인당하지 아니한다.
2. 어느 누구도 자의적으로 자신의 국적을 박탈당하거나 그의 국적을 바꿀 권리를 부인당하지 아니한다.
무국적이라는 것
“나의 조국은 세계이다”, “세상을 무국적자처럼 떠돌고 싶다”는 등의 말을 하거나 들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 말에 고개가 끄덕여질 때는 자신의 국적에 집착하지 않고 다른 민족, 다른 인종의 사람 누구와나 함께할 자세가 되어 있을 때일 것이다. 그러나 세계를 조국으로 인류를 가족으로 여기는 그런 사람에게도 엄연히 국적과 시민권이 있을 것이다.
좁아진 세계와 타국에서의 취업, 국제결혼 등의 증가로 이중국적을 인정해야 한다는 등의 논의를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 요즘 세상에서 ‘무국적’의 문제는 주목받지 못하는 인권문제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훨씬 더 지구화된 요즘 세상에서 무국적자가 여행하는 것은 1930년대보다 훨씬 더 어렵다. 무국적으로 태어나는 아동은 평생 무국적이기 쉽다. 무국적 상태에서는 학교에 가거나 합법적으로 일하거나 재산을 소유하거나 결혼하거나 여행을 할 수 없다.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도 고소를 할 수 없다. 법적으로 그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수사를 하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증거가 필요하다.
“내가 저지른 유일한 범죄는 내가 어떤 국가의 시민도 아니라는 거예요.”
“인간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고향을 만들 자격이 없는 겁니까?”
“내가 사는 나라에서도 ‘안된다’고 하고, 내가 태어났던 나라에서도 ‘안된다’고 하고, 내 부모의 출신 국가에서도 ‘안된다’고 한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낀다. 왜 사는지 모르겠다. 무국적이라는 것은 무가치하다는 감정에 언제나 휩싸여 사는 것이다.”
무국적 문제를 다루는 한 인권단체와의 인터뷰에서 무국적자들은 이렇게 호소한다.
아인슈타인도 무국적자였다
무국적자란 어떤 국가의 국내 법률에 의해서건 국민으로 간주되지 않는 사람(1954년 무국적자의 지위에 관한 협약 1조)이다. 각국의 법률에서 국적과 시민권은 반드시 동의어는 아니다. 하지만 둘 다가 의미하는 바는 한 국가와 개인을 한데 묶는 끈으로서 양자 간의 정치·경제·사회적 권리 뿐 아니라 책임을 포괄한다.
무국적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서로 중첩되기도 한다. 정치적 급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표적 삼은 차별과 배제, 국가들간의 국적법의 차이로 인해 생기는 틈, 영토 변경과 관련된 혼란, 결혼과 출생신고와 관련된 법이 간과한 문제, 다른 국적을 얻기 전에 국적을 포기한 경우, 부계혈통만으로 시민권을 인정하는 경우 등으로 인해 무국적이 발생한다. 여기에 기후변화와 사막화로 인한 물과 자원 분쟁이 평화롭게 공존하던 지역에서 마찰과 추방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다 알만한 유명한 무국적자의 경우를 보자. 한국 부모들이 자기 자식들이 닮기 원하는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도 무국적자였다. 그는 독일에서 태어났으나 1896년 국적을 포기했고 그 후 5년간 무국적자였다. 1901년에 스위스 시민이 됐고, 프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된 1914년에 독일 시민권을 다시 얻었으나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수상이 된 후 아인슈타인은 아카데미를 사임하고 두 번째로 독일 국적을 포기했다. 이번에는 난민이 됐다. 스위스 시민권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국적자는 아니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1940년에 미국시민이 됐다. 평생에 걸쳐 이런 난관을 겪으면서 그는 말했다. “민족주의는 소아기적 질병이다. 민족주의는 인류의 홍역이다.”
무너지는 베를린 장벽 앞에서 연주한 것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첼로연주자 로스트로포비치도 무국적자였다. 1978년 그는 프랑스 TV 뉴스를 보다가 자신과 아내가 “소련의 위신에 해로운 행위”로 인해 소련국적을 박탈당했다는 걸 알게 됐다. 훗날 그는 한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우리는 제거됐다.…‘가치 없는 시민’이 된다는 게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인지 당신들은 모른다. 그들은 우리를 몰아냈다.”고 말했다. 1990년에야 그의 소련 시민권은 회복됐다.
유명 영화감독, 마가렛 본 트로타도 무국적자였다. 그녀는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1942년 당시 그녀의 어머니는 독일인이 되고 싶지 않아 무국적이었고, 비혼의 무국적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그녀도 자동으로 무국적이었다. 공부를 하러 파리로 갈 때 그녀에게는 비자와 신분증명서가 없었다. 한밤중에 기차에서 끌려 내려진 그녀는 국경 가운데서 오도갈 수 없었다. 훗날 결혼으로 국적을 취득한 그녀는 “나는 국적을 갖고 싶었다. 그게 프랑스던 독일이던 상관없었다. 난 단지 여행의 어려움에서 해방되고 싶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무국적자가 되어 타향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한 작가는 자서전에서 ‘무국적’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 자신이 내 자아에 정말로 속한다는 느낌이 멈췄다. 내 타고난 정체성의 일부가 내 원래의 본질적인 자아와 더불어 영원히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무국적의 고통은 유명인들의 ‘과거’가 아니라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현재’로 계속되고 있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 새로운 국가가 세워지면서 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소수민족들, 상당수가 난민이면서 무국적이기도 한 수백만의 팔레스타인들은 현재 무국적의 대표적 사례이다. 이주여성과 그 자녀의 문제는 특히 취약한 무국적 사례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사례는 한국과 관련해서도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팔레스타인, 그리고 조선적
한 베트남 여성이 고령의 대만인과 국제결혼을 했다. 그러나 남편은 예상보다 경제사정이 열악했고 사업의 실패와 더불어 이 여성이 아들이 아닌 딸을 낳자 아내와 아이를 같이 버렸다. 이 여성은 국적취득과정에 있었다. 새 국적을 얻으려면 원래의 국적을 포기하는 절차가 선행돼야 했다. 남편과 상의하여 베트남 국적을 포기했으나 아직 새 국적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버림받은 그녀는 고향에 돌아와서야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자신이 무국적자이며 따라서 아무런 권리가 없음을 깨닫게 됐다. 아이는 베트남인에게 허용된 무상교육을 받을 수 없고 의료 혜택도 없으며, 자신은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국적회복을 위한 절차를 알아보자니 변호사는 5천 달러의 수임료를 요구했다. 자신에게는 꿈도 꿀 수 없는 돈이었다.
일본 패망 후 귀환하지 못하고 어떤 국적도 취득하지 않은 채 귀환을 그리며 무국적자로 버틴 동포들, 북한 국적도 남한 국적도 취득하지 않고 사실상 무국적자인 ‘조선적’을 고집한 동포들, 남북한 각각이 국제사회에서 각각의 국가이고 국적법이 있는 상황에서의 북한 출신 이주자의 문제,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여성과 이주노동자와 그 자녀의 국적 문제 등 ‘무국적’은 한국 사회와도 결코 먼 문제가 아니다.
난민 뿐 아니라 무국적자도 수임사항으로 다루고 있는 국제기구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이다. UNHCR은 2006년 말 현재, 공식적으로 49개국에 걸쳐 5백 8십만 정도의 무국적자가 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무국적자에 대해 믿을만한 통계를 내는 국가는 거의 없기 때문에 UNHCR은 실제 수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1천 5백만 명에 가까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무국적 문제를 다루는 UNHCR의 인력과 재원은 형편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차 대전 간 초기의 국제적 합의들은 난민과 무국적 문제를 한데 다루었고, 무국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목표를 두기 보다는 당장 닥친 실질적인 문제 해결에 국한됐다. 가령 무국적자들로 하여금 당장에 필요하니까 여행서류로 소위 ‘난센여권’을 사용하게 하는 식이었다.
2차 대전 이후 무국적자의 법적 지위를 규율하고 무국적 사례를 줄일 필요성에서 채택된 기준이 세계인권선언 15조이다. 선언은 개인의 인권으로서 국적을 가질 권리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국적을 주거나 말거나 빼앗거나 하는 문제는 국가의 권리이다. 각 국가는 자국의 법에 따라 국적법을 제정할 수 있고, 이 법이 국제법과 타국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다른 국가들은 대개 이를 승인한다. 선언 15조는 국적에 대한 권리를 말했지만, 어떤 국가가 어떤 상황에서 국적을 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무국적을 방지할 국가들의 의무, 아동을 출생 시에 등록하고 무국적이 될 상황이면 국적을 제공할 의무 등이 명시된 것은 훨씬 나중에 만들어진 국제조약에서다.
가령 1954년 무국적자의 지위에 관한 협약은 무국적자에 대해 난민에 대한 처우와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고, 1961년 무국적자의 감소에 관한 협약은 달리 국적이 없으면서 가입국의 영토에서 출생한 자에게 그 국가의 국적을 인정함으로써 주로 출생 시 무국적을 피할 목적을 가진다. 국가들에게 권고되는 바는 최소한 무국적자에 관한 두 개 협약을 존중하라는 것인데, 양 협약 모두 가입국 수가 아주 적다. 그밖에 1966년의 시민·정치적 권리 규약과 1989년의 아동권리협약 7조는 아동이 출생 시 즉시 등록될 것과 출생 시부터 성명권과 국적 취득권을 가질 것을 규정하고 있다. 적어도 당사국에서 태어나는 아동이 무국적이 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가입국에 촉구하고 있다.
너무도 미약한 국제사회의 대응
무국적과 관련된 활동 단체들이 유엔과 정부들에게 촉구하는 바는 민망할 정도의 기본적 수준이다. 무국적과 관련하여 수임사항을 명확히 하고 구체적인 목표를 정하는 것, 가용할 수 있는 기존 인권 메커니즘을 모두 활용할 뿐 아니라 무국적 문제에 집중하는 단위를 만드는 것, 식량과 의료 등 긴급한 필요에 지원하는 것, 무국적과 관련된 정보의 공유, 무국적과 관련된 국제기준의 당사국이 될 것 등이다.
여러 국가들에서 시민권은 새로운 권리를 추구함으로써 이전의 특권을 권리로 변형시키고, 권리의 주체를 확장해왔다. 새로운 권리는 이전 권리의 이용을 보다 효과적으로 만들고 이전에 법률로나 관습으로 분리됐던 집단들간의 장벽을 제거해왔다. 그런데 무국적자에게는 그런 시민권이 없기에 권리의 변화와 생성도 없다. 어느 국가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국제적으로는 미약한 협약과 기구가 있을 뿐이다. ‘시민권과 인권이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이고, 시민권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인권이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까’는 인권의 생명과 뗄 수 없는 문제이다.
덧붙임
*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의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