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모든 사람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과학적, 문학적, 예술적 창작물에서 생기는 정신적, 물질적 이익을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다.
인권에서 문화권에 대한 논의는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다. 인권을 분류하여 ‘시민적․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권리라 할 때 흔히 맨 뒤에 오는 문화적 권리는 빼먹기 일쑤다. ‘문화’라는 것을 정의하는 것의 어려움 때문이며, 거기에다가 문화권을 정의한다는 것은 ‘미션 임파서블’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한 정의의 불가능성이 정의가 아예 불가능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그로 인해 문화권의 존재를 부정하는 근거일 수도 없다.
문화권은 인권의 모습을 골고루 갖고 있다. 문화를 좁게 정의하면 특정 예술 활동과 관련되겠지만 넓게 정의하면 인간의 살림살이, 살아가는 양식 전체가 포함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간 문화권의 개념은 예술의 생산, 매개, 수용과 관련된 권리개념에서 인간의 생활양식 전반에 대한 창조적 진보의 개념으로 확대돼 왔다고 볼 수 있다.
문화권은 기존의 권리를 더 세심하고 폭넓게 볼 수 있도록 해준다. 공교육 제도를 통해 모국어와 외국어를 습득할 기회를 갖는 것이 기존의 교육권이라면 이주노동자 자녀들이 체류국의 교육기관을 통해 체류국 언어 뿐 아니라 모국어를 학습할 수 있는 것은 다문화사회에서 필수적인 교육권이다. 창작자는 사상․양심․표현의 자유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금기의 부재와 극복 등이 중요하다는 면에서 정신적 자유의 측면을 갖는다. 이런 점은 과거에도 강조됐다면, 오늘날 창작 활동은 자유 보장만으론 안 된다. 예술 활동으로 기초생계가 가능하도록 하는 창작 지원 정책이나 보조금 정책 같은 사회적 권리의 의미를 가져야 상업주의와 자본의 공세 속에서 창작자의 생존이 가능하다. 자유권과 사회권의 측면, 이 둘이 맞아 떨어져야 예술 활동의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회경제적 약자나 청소년 등이 밥과 옷만이 아니라 문화예술을 향유할 기회를 갖고 창조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사회권의 중요한 측면이다.
소수민족에게 문화는 존재 그 자체
문화적 권리는 개인이 속한 공동체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언어를 생각해보자. 언어는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특정 집단이나 종족이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고 존중받는 것은 중요하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타자와의 교류를 통해 상호존중을 이루는 것, 특정 문화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억제하는 것, 인종주의적, 차별적인 관행과 제도를 극복하는 것, 자문화 특수성을 내세워 인권침해를 정당화하지 않는 것은 인권의 주요 문제이다. 그간 국제인권에서 주목돼온 문제는 소수민족의 생존 자체에 관한 것이다. 이들에게 자기들만의 고유한 생존 양식, 곧 문화에 대한 위협은 곧 존재의 위협이기 때문이다.
태국에서 소수민족 바자회에 간 일이 있다. 숲속 한가운데에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모였다. 저지대에서 고산지대에 사는 사람들까지 사는 높이와 환경에 따라 옷도 다르고 음식도 달랐다.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와 비슷한 아궁이 같은 것과 된장 비슷한 장류도 가지고 나왔다. 우리의 공깃돌 같은 것을 교환양식으로 쓰는 규칙에 따라 몇 개의 공깃돌을 구입해서 실컷 구경도 하고 이런 저런 음식도 맛보았다. 날 안내한 친구는 소수민족의 인권문제를 다루는 활동가였는데, 그 친구가 마련한 천막에서는 무국적과 소수민족의 인권문제를 다룬 그림책을 팔고 있었다. 친구에게 얘기를 들어보니 소수민족 대개가 무국적이라 했다. 태국이란 국가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이들은 여기서 살아왔다. 그러나 국가가 생긴 후 그들이 살아온 곳이 국립공원이 돼버렸다. 국립공원 안에서 그들의 경작도 여타의 활동도 불법이다. 시민권이 없는 이들은 아이를 학교에 보낼 수도 토지를 소유할 수도 없다. 생계를 위해 산에서 내려와 미등록 이주노동자처럼 살아가거나 국가가 지정해준 대로 살면서 관광객들 앞에서 쇼를 할 때만 고유의상을 입고 춤을 출 수 있다고 했다. 어렵게라도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선 고유의 삶을 버리고 태국인처럼 살아야 한다고 했다.
이런 문제들은 문화, 민족, 종교 등의 이유로 한 국가 안에서 또는 국가 간에 지배 복속의 문제가 발생하는 곳에서 등장한다. 또한 다인종, 다민족, 다문화 사회하고도 관련되는 문제이다. 여기서 문화권은 개인의 권리일 뿐 아니라 집단정체성에 대한 인정을 빼먹고는 말할 수 없는 권리이다. 흔히 개인의 선택이라고 하면서 집단정체성에 대한 인정이 없는 경우 특정 공동체에서 ‘빠져 나올’ 권리만 선택이 되지, 특정 공동체의 생활양식대로 살아갈 권리는 선택될 수가 없다면 선택의 자유는 없는 것이 된다. 이에 세계인권선언을 상세화한 여러 국제인권기준에서는 ‘소수민족에게 고유어 사용과 교육활동에 대한 자주권을 인정할 것’, ‘이주노동자의 문화적 독자성을 인정하고 이주자들의 문화적 유대의 유지를 방해하지 말 것’, ‘이주노동자 자녀의 모국어 및 출신국 문화에 대한 교육에 필요한 조치’등을 규정하고 있다.
문화다양성의 존중
집단정체성에 대한 존중은 문화다양성 존중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한 국가 또는 세계 안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보호받을 권리란 자기 문화를 박탈당하거나 강제 동화되지 않을 권리, 문화적 정체성을 보존하고 교육받을 권리를 요구한다.
그런데 이 다양성이라는 것은 말로만 ‘너를 인정해, 다양성을 존중하니까 알아서 해봐’라고 했을 때는 생존할 수 없다. 다양성은 둥근 접시에 똑같이 골고루 담긴 샐러드가 아니다. 주류가 있고 강력한 정치적, 경제적 지원을 입는 것이 있고, 마법의 램프처럼 엄청난 수익을 눈 깜짝할 새에 가져다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이 모두를 같이 취급한다는 것은 접시 자체를 깨뜨리는 일이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은 접시를 마련하지 않고 접시에 골고루 담긴 샐러드를 찬양하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 모두가 돈 되는 예술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기초예술에도 매달릴 수 있는 조건이 마련돼야, 전문가의 예술이 있으면 평범한 일상속의 예술도 있어야 다양성이 존중된다고 할 수 있다.
문화권에서 다양성을 담을 접시를 마련하는 일은 문화 참여의 권리가 향유되고 촉진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할 국가의 의무를 말한다. 유엔사회권위원회는 국가가 취해야 할 조치로서 다음과 같은 목록을 제시한 바 있다. ‘입법적 및 기타의 조치, 문화발전과 대중 참여를 위해 이용 가능한 기금마련, 제도적 기본시설(예를 들어 문화센터, 박물관, 도서관, 극장, 영화관 등)의 설립 및 유지, 소수민족과 소수자의 문화적 유산에 대한 인식과 향유의 증진, 매스미디어와 통신매체의 다양성을 위한 조치, 인류문화유산의 보존과 제시, 예술적 창조와 퍼포먼스의 자유, 창조활동의 결과물을 유포할 자유의 보호, 문화와 예술 분야의 전문교육' 등이다.
문화 창조․참여․수용의 주체로서의 인간
학창시절에 총학생회에서 문화부장이란 걸 한 친구가 있다. 이 친구의 포부는 무슨 초청공연 같은 걸 많이 하는 게 아니라 누구나 취향에 따라 작곡을 하거나 악기 하나쯤을 다루거나 시를 읊을 수 있는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보겠다는 거였다. 세월이 흘러 우연히 만났을 때 그 학창시절의 꿈을 내가 얘기하니 언제 그런 적이 있었는지 까맣게 잊고 실적 늘리기에 찌든 생활인이 되어 있었다. 주변 사람들 중에 왕년에 문학소녀, 그룹사운드 리더, 천재 화가가 아니었던 사람이 없다. 악기 하나쯤 맘껏 다뤄봤으면 하는 소원을 여전히 품고 사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문화권은 창조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생각하는 개념이다. 문화가 또 다른 산업으로서 경쟁과 시장성의 목록이 아니라 인간의 권리로서 의미를 가지려면 문화생활에 참여하여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권리로 인식되고 그런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한 노동자는 이런 말을 했다. 3교대로 근무하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환자들을 위한 무슨 문화공연을 하는데 짬짬이 연습한 무대의 수준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조금만 더 여가가 주어지고 문화생활에 참여할 수 있고, 전문가를 초청하여 교육받을 수 있는 조건 등이 노동조건에서 고려된다면 모두가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직접 창조자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객과 감상자가 되는 것도 참여의 중요한 권리다. 많은 사람에게 특히 소외계층에게 고급문화에 대한 접근성 및 참여기회의 확보가 필요하다. 고급문화란 비싼 입장료 때문에 고급문화인 게 아니라 그 완성도를 위해 길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숙성된 경지의 문화를 말한다. 어떤 선생님은 오페라가 뭔지도 모르는 빈민지역 아이들에게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공짜로 보여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했다. 왜 의미가 없을까. 나는 뮤지컬과 발레를 청소년 시절에 딱 한 번씩 봤다. 당시로선 입장료가 꽤 비싼 공연들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1년에 한번 공짜에 가까운 집단관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 노랫가락과 배우들의 몸짓을 기억한다. 언제 생각해도 아름답게 완성된 것의 절정을 본 벅찬 느낌을 잊을 수 없다. 그런 고급예술에 누구나 저렴한 비용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먹을 것과 주거에 대한 권리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나는 보통 기준으로 불효녀이다. 돈도 못 벌고 인권운동이란 것만 하고 다닌다. 그런 내가 부모님께 효도하는 방식은 부모님과 같이 놀기이다. 엄마 아빠도 잘 아는 인기가수 콘서트나 같이 볼만한 영화를 같이 보거나 여행을 함께 가는 것이다. 그때마다 엄마는 ‘돈으로 달라. 돈이 남아돌아서 그런 걸 보러 다니느냐, TV로 보면 되지’라고 하시지만 나는 밀어붙인다. 결과는 언제나 기대이상이다. 무대에서의 진짜 열창과 가수의 살아온 얘기를 듣는 것은 돈 때문에 숨죽이고 있던 엄마의 감성을 깨운다. 얼마나 좋아하고 흥분하시는지 느낄 수 있다. 복지관에서 일하는 친구가 가장 보람 있었을 때는 생전 처음으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장애인의 눈물이었다고 한다. 복지관에서 어떤 서비스를 해도 그런 반응을 얻지 못했었는데, 장애인 접근권을 보장하고 영화 상영을 했더니 TV가 아니라 영화관에서 영화감상을 하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펑펑 울었다 한다. 이주노동자들은 모국어로 된 잡지와 책에 목말라 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도서관은 못돼도 작은 문고라도 설치할 걸 제안하면 사장들이 ‘재들이 무슨 책을 읽어’라는 말을 한다는 칼럼을 본 적이 있다. 장애인 뿐 아니라 이주노동자, 농어촌 지역 거주민, 다문화 가정 아이들, 빈곤 청소년 등에게 문화예술에 대한 접근권은 경제사회적 자원의 평등을 추구하는 중요한 방식이다.
지적재산권과 문화권은 달라
그런데 문화권에 대한 사고가 문화 ‘산업’의 수익을 올릴 권리에 방점이 찍힌 것으로 오해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영국 배우 휴 그랜트가 주연한 ‘어바웃 어 보이’란 영화가 있다. 백수건달로 맨 날 소비하고 몸 가꾸고 여자 만나기에 빠져 사는 휴 그랜트가 마커스란 왕따 소년과의 우정 속에서 자기 인생을 돌아보고 관계를 생각하게 되는 영화이다. 로맨틱 코미디 단골 주연인 휴 그랜트가 인간극장에 출연한 느낌을 준 영화다. 이 영화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상황에서 이 영화 얘기를 꺼낸 이유는 따로 있다. 휴 그랜트의 자유롭고 소비를 만끽하는 백수 생활이 왜 가능했는지를 묻고 싶어서다. 휴 그랜트의 아버지는 작곡가였는데 크리스마스 때면 누구나 틀어대는 히트곡을 하나 남기고 죽었다. 그게 휴 그랜트의 밑천이다. 수십 년간 지속되는 저작권이 휴 그랜트에게 상속됐기에 그는 백수지만 잘 살 수 있었다.
이런 식의 지적재산권을 세계인권선언에서 말하는 창작물의 보호와 연결시키면 어쩌나하고 선언의 기초자들은 우려했다. 이런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27조 2항이 들어갔지만, 세계인권선언에서 보호하려한 창작자의 정신적 및 물질적 이익의 보호범위는 흔히 지적재산권으로 지칭되는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학문적․문학적․예술적 저작을 보호받을 권리가 상품화와 시장논리와의 대결에서 보호받는 것, 산업자본과의 대결에서 창작자를 보호하는 것으로 여겨야지, 인간의 권리를 기업과 자본의 권리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기존법률이 계약적 이해관계를 따지는 것과 인권으로서의 창작자의 보호는 취지가 다르다고 봐야 한다. 인권으로서의 창작의 보호는 모든 사람이 그 혜택을 향유할 권리에서 배제되거나 산업자본의 특허권 때문에 진짜 생산자들의 권리가 침해받는 걸 막으려는 의미로 봐야 한다.
27조의 내용에서 과학의 진보와 그 혜택을 향유할 권리에 대해서는 3조 생명권에서 다룬 바와 같다. 여기서도 지적재산권의 문제는 마찬가지다. 농업의 생물다양성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해온 농부들의 권리를 무시하면서 초국적 기업이 종자에 대한 특허권을 갖고 농부의 권리를 침해하는 걸 볼 때 인권의 논리로서 보호해야 할 권리는 어느 편이겠는가.
국제인권논의의 진전에서 한 사례를 살펴보자.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권리라는 게 정보사회와 관련하여 제기된 바 있다. 인간은 개인이면서 사회적 존재이다. 커뮤니케이션은 개인 정체성과 집단 정체성의 원천이 되는 독특한 사회문화적 거주를 창조하고 유지하는데 핵심이 된다. 관계에 들어가고 공동체를 수립하고 생존하기 위해서 인간은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은 따라서 음식, 옷, 주거처럼 기본적인 인간의 필요이다.
기존의 인권 목록에 있는 표현의 자유로 충분치 않고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권리가 제기된 이유가 있다. 우리는 평등하게 권한을 가진 개인들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권력에 대한 접근이 엄청나게 차이나는 세상에 살고 있고, 이 세상에서 대부분의 커뮤니케이션은 조정되고 걸러진다. 대중매체, 정부, 상업적 기업, 특수한 이해집단 등이 커뮤니케이션의 내용과 유통에 영향을 끼치고 통제한다. 표현의 자유만을 배타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사회의 표현의 수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신문, TV, 라디오, 영화, 음악, 교육기제 등 표현수단은 그것을 작동하는 자들의 이익 속에서 통제된다. 이런 맥락에서 직접적인 정부의 개입을 금지하고 자유로운 언론을 사수하기 위한 법이라는 의미에서의 ‘표현의 자유’는 제일 큰 목소리(예를 들어 사회내의 통신수단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들)의 지배를 방지하는데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권리는 정보의 독점, 극단적 상업주의, 정보내용의 조작, 지식과 정보에 대한 통제에 대해 반대하는 의미가 있다. 문화권이 문화자본의 배타적 권리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처럼 문화권은 일련의 정치․경제․사회적 권리를 전제로 하는 동시에 이들 권리가 보다 높은 수준에서 성취되는 과정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권의 불가분성과 상호의존성에 대한 고려는 돈벌이 문화에서 고전하는 문화권을 고려할 때 특히 빼먹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다.
덧붙임
*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