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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대학생이 말하는 차별 이야기

[기획: 대학생이 말하는 차별 이야기] 왜 대학의 영어 교수들은 모두 백인일까?

인종주의, 보일 듯 보이지 않는 한국 사회의 그늘을 움켜쥐다

[편집인주]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대학모임은 <대차별: 대학생의 차별이야기>라는 주제로 릴레이 강연회를 진행하고 있다. 총 네 번에 걸쳐 각각 다른 주제로 진행되는 이번 기획은 그 동안 대학 사회에 존재했지만, 잘 드러나지 않았던 혹은 잘 드러낼 수 없었던 차별 이야기를 대학생들이 솔직하게 직접 꺼내 보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각 강연회가 끝난 후 강연회를 기획한 대학생이 직접 기사를 작성해 보내주었다. 대학생이 말하는 대학생의 차별이야기, 사회가 함께 귀 기울여야 할 우리 사회의 차별이야기이기도 하다.


기획 초기, 우리는 의기양양했다. 잘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일단 주제부터가 신선했다. 한국 대학 내 외국 학생들의 차별 문제는 그동안 본격적으로 논의된 바 없었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리라 여겼다. 또한 우리는 형식에 있어서도 차별(긍정적 의미의!)화를 꾀할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특정 연사 한명이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강연회보다는, 차별의 당사자인 외국 학생들을 직접 패널로 섭외하여 토크쇼를 여는 게 어떨까. 당사자들이 그들이 겪은 이야기를 생생하게 한국 학생들 앞에 털어놓을 수 있도록 말이야. 그러면 청중들의 차별감수성을 더욱 효과적으로 높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또 사전에 학내 외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 보는 건 어떨까. 몇몇은 직접 인터뷰도 시도해보자. 오, 좋아. 그렇다. 우리는 우리 기획의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선 우리는 전부터 개인적으로 알아왔던 외국인 학생들을 직접 만나서 사전 인터뷰를 하기로 하였다. 우리 학교의 학부생으로 정식 입학하여 학교를 다니고 있는 우크라이나인 학생 한 명과, 우리 학교 부속 어학당을 다니는 중국인 학생 두 명을 각각 만나 이런 저런 질문을 던졌다. 그들에게서 많은 이야기가 나오리라는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의외였다. 인터뷰에서 학생들은 수업 중에, 혹은 한국 학생들과 함께 하는 친교 모임 중에 딱히 차별을 느낀 적이 없다고 말하였다.

사전 설문조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차별을 받았다고 답한 학생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심지어 어떤 학생들은 타지에서 생활하면서 겪는 어려움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설문지에 적어놓기도 하였다. 패널 섭외 과정은 더욱 난관이었다. 외국인 학생들의 인터넷 사이트에 방문하여 홍보도 하고 설문조사 맨 뒷면에 섭외문구도 적어 놓았지만 연락이 전혀 오지 않았다.

대학 내 인종차별 없다는데? ‘레알’?

막막해졌다. 우리 기획의 내용 및 형식에 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문제의식이 과연 타당한지, 유효한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사실 우리 사회는 인종주의를 점차 불식시켜 나가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우리가 괜히 없는 문제를 만들어내고, 너무 ‘삐딱한’ 시선으로만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까지 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의구심은 인종주의에만 그치지 않고 차별 전반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다. 피해자라고 여겼던 사람들이 자신은 차별을 당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데, 과연 제3자인 우리가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차별’의 유무를 정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피해자의 상해 유무? 가해자의 고의 유무? 아니면 차별 행위 자체를 별도로 설정해야 하는 걸까? 그런데 그러한 설정이 과연 가능하기는 할까? 내 머릿속은 점점 혼란스러워져만 갔다.

결국 기존의 주제를 수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즉 학내 인종차별에서 우리 사회의 인종차별 전반으로 주제의 폭을 확장하기로 하였다. 인종차별 문제를 대학 사회 내로 한정하다 보니 인종차별 문제가 분명히 있는데도 대학 사회 자체가 가지는 특수성에 가려서 제대로 표면화되는 않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주제를 이와 같이 확대하게 되면, 외국인 학생들의 피해 사례 위주 토크쇼의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외국인=피해자/한국인=가해자라는 단순 도식에서 벗어나서, 청중들이 한국인들 또한 한국 사회 내 인종주의의 가해자임과 동시에 피해자임을 인지하고 인종주의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할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도 한몫했다. 한편으로는 토크쇼의 패널 섭외도 잘 이루어지지 않아 아쉽지만 형식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토크쇼를 접고 강연회로 가닥을 잡아갔다.


강연회 당일, 찾아온 학생들의 숫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넓은 강의실에 드문드문 앉아있는 학생들을 보면서, 인종주의에 관한 흥미도 강연회에 참가한 사람들 수만큼 적은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막상 강연이 시작되고 나서 보니, 그런 걱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강연자의 강연은 명쾌하였고, 학생들의 질문 자세는 적극적이었다. 강연자는 지난 2009년에 있었던 인도 출신 보노짓 후세인 씨에게 있었던 언어폭력 사건에 관한 설명으로 강연을 시작하며, 우리 사회 내의 인종차별이 단선적 양상이 아닌 복합적 양상으로 나타남을 강조하였다. 이어서 강연자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광고, 영화 포스터, 신문 사진 등을 제시하며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잠복해있는 인종주의를 짚어 냈다. 설명을 들으면서, 이렇게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인종주의의 면면을 일거에 파악하기란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후세인 씨가 당한 성·인종차별 사건의 형태가 욕설이 아닌 시선 등과 같은 비언어적 폭력의 형태였다면, 사건 피해자는 자신이 차별을 겪고 있다고 쉬이 깨달았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진행했던 설문조사에서 '차별을 겪은 적이 없다'고 답한 외국인 학생들 역시, 인종주의로 인한 차별에 무뎠기 때문에 쉽게 체감하지 못했던 걸까.

인종주의와 발전이데올로기, ‘글로벌 리더’의 두 얼굴

인종주의는 왜 여전히 강력하고, 또한 매력적인 코드로 남아있을까. 강연자에 따르면 인종주의는 제국주의와 그 역사를 같이 한다. 제국주의가 힘을 얻으려면 제국을 만들어나가는 내부 구성원 간의 결속력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때 주체가 아닌 자들에 대한 배척 및 차별은 그러한 결속력을 지속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인종주의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인종주의는 한국 사회 내 구성원들간의 단합을 용이하게 해주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 발전'을 부추기는 강력한 기제라는 것이다.

‘발전’. 이 단어만큼 그토록 오랫동안 한국 사회를 강력하게 옭아매는 단어가 또 있을까.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발전, 성장이라는 한 마디면 그를 위한 모든 것이 무조건적으로 정당화 되어 왔다. 인종주의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오랫동안 묵인되어왔다고 생각하니 발전·성장이데올로기가 더욱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당장 나를 포함한 오늘날의 대학생들 역시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희생양 아니던가. 요즘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이른바 ‘글로벌 리더의 양성’을 기치로 내걸고 그 일환으로 학생들이 의무적으로 영어강의를 수강하도록 강요한다. 이때 ‘글로벌 리더’는 오늘날의 서구권 선진국들 틈새를 어떻게든 파고들고자 하는 한국 기득권층의 열등감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수사어구이며, 영어는 이러한 열등감 극복을 위해 반드시 획득하여야 하는 상징적 자본이다. 여기에 인종 감수성을 투영하여 보면, 글로벌 리더가 되고 싶어 하는 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곳은 지구 전역이 아니라 영미권, 유럽권 국가에 한정되며, 그들이 배우고자 하는 영어는 필리핀 영어, 라틴 영어가 아닌 미국 영어이다. 돌이켜 보니, 내가 그동안 들었던 영어강의에서는 대부분, 아니, 모든 교수들이 미국식 영어를 구사하였다. 원어민 강사나 교수들 또한 영미권 혹은 유럽권 출신의 백인(개인적으로 이 단어를 가급적으로 쓰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백인’, ‘황인’, ‘흑인’이라는 표현 또한 과거 서구의 제국주의 국가 위주의 인종 서열의식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들이었다. 씁쓸했다. 단순히 귀찮은 마음에 투덜대면서 영어 강의를 신청했던 그 순간이, 나도 모르게 인종주의에 물들게 되는 순간이었다니.

인종주의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인종주의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걸까. 강연자는 인종주의를 진정으로 뿌리 뽑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 간에 진정한 사회발전, 국가발전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법적 차원뿐만 아니라, 교육 등 다른 차원에서 인종주의에 접근할 필요성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그렇다. 당연하다.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한편으로는 기획을 준비하는 내내 내 머릿속을 가득 메웠던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인종차별, 더 나아가 차별 전반의 존재 유무를 어떻게 규정짓고 이에 대항해 나갈 수 있는 걸까. 아니, 과연 그럴 수나 있는 걸까.

강연회가 끝난 후 뒤풀이 자리에서 강연자와 술잔을 기울이며 그 동안 풀리지 않았던 나의 의문들을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강연자는 학내 여성주의 교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나의 자기소개를 의식한 듯, 한국의 초기 여성주의 활동가들을 예로 들었다. 강연자는 종갓집 큰며느리에게 그녀가 가부장체제 하에서 부당하게 억압받고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그녀는 당연히 단번에 납득하려 하지 않을 거라고 하며, 나에게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여성주의 운동을 할 지 되물어보았다.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에 강연자는 초기 여성주의 활동가들은 공장노동자, 성매매여성들을 대상으로 우선 운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다가, 이내 감이 잡혔다.

차별의 양상은 다양하다. 어떠한 차별은 노골적이고 어떠한 차별은 은밀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본질에는 차이가 없음에도 사람들은 후자의 차별은 쉽게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노골적인 차별부터 대상으로 하여 우선 철폐운동을 벌여 사회 내의 차별감수성을 서서히 날카롭게 벼림으로써 점차 그들이 스스로 은밀한 차별에 대하여도 자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점을 깨닫는 순간 그동안 막혔던 무엇인가가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차별을 규정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차별을 규정하는 일 자체를 포기해서도 안 된다. 이번 기획을 준비하면서, 그동안 막연하게 “나쁘다. 없어져야 한다.”고만 생각해왔던 차별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복잡하게 우리의 일상과 뒤엉켜있는지, 그 때문에 무엇이 차별이고 아닌지를 가려내는 일 또한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실감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를 포함한 사회 구성원들의 차별감수성을 높여나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한 깨닫게 되었다.

이번 기획을 쉽게 포기하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대차별: 대학생의 차별이야기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대학모임에서 준비한 릴레이 강연회는 다음 네 번의 주제로 진행됩니다. 첫 번째 강연회는 <가족, 애정과 투쟁 사이>라는 제목으로 정상가족 신화의 모순을 꼬집고 대학생이 진정으로 원하는 가족을 상상하는 시간으로 기획되었습니다(5/18). 두 번째 강연회 <The LGBTQ word(엘지비티큐 워드)>는 다양한 인권활동가들이 대학생들과 함께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퀘스처닝 등 다양한 성소수자 정체성과 차별에 대해 토크쇼를 벌입니다(5/24). 세 번째 강연회는 <학벌의 중심에서 차별을 외치다>라는 제목으로 학벌차별의 전체 구조를 통해 누가 수혜자이고 누가 피해자라고 말할 수 있는지, 대학생들은 학벌차별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5/26). 마지막으로 네 번째 강연회 <한국에 인종주의는 이제 없다?!>는 우리 사회의 인종주의를 깊이 성찰하며 대학 내에서 인종차별과 성차별, 영어중심주의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를 살펴봅니다(5/31).

덧붙임

희윤 님은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대학모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대학모임은 고려대학교, 동국대학교, 서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동아리, 단체)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