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황당해진 2기 NAP 수립과정
인권단체들은 2기 NAP 수립에서 ‘인권위 인권정책관계자협의회’ 참여를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인권위가 정부의 입김에 따라 흔들리고 정부의 후퇴된 인권정책에 대해서 침묵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NAP 수립에 손을 뗀 것은 아니었다. 1기 NAP의 기간이 완료되는 작년 여름부터 인권단체들이 모여 1기 NAP에 대해 수립과정, 내용, 이행에 대한 평가를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2기 NAP에 들어가야 할 내용과 방향을 작성하였다. 작성 중에 NAP 소관부처인 법무부 인권과로부터 1월 18일까지 2기 NAP에 담겨야 할 인권정책을 보내달라는 공문을 받았다. 전화 한통 없는 무성의한 인권수렴 절차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인권단체로서 NAP에 꼭 들어가야 할 인권정책이 있다면 들어갈 수 있도록, 최소한의 방향성을 잡은 2기 NAP가 만들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인권정책을 발표하고 법무부에 우리의 내용을 전달하였다.
이후 3월 14일, 법무부는 2기 NAP 초안을 제출하면서 필자를 비롯한 인권단체에게 공청회 참여요청을 하였다. 하지만 2기 NAP 초안에는 인권단체들이 공동으로 제출한 인권정책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이런 상태라면 공청회에 참여해도 내용은 반영되지 않고, 법무부가 의견수렴 절차를 거쳤다는 알리바이로 포장되는 것 이상이하의 의미가 없을 터였다. 더구나 공청회에 노동권과 관련된 주요 행위자인 민주노총은 빠진 채, 경총이 발제자로 참여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인권단체들은 법무부를 비롯한 각 행정부처에 ‘인권단체들이 제출한 인권정책을 보았는지’, ‘왜 포함되지 않았는지’를 묻는 질의서를 보내고 공청회 참여를 거부하였다. 지금은 거부하지만 추후라도 인권단체를 비롯한 시민사회의 의견이 최소한이라도 반영한 2기 NAP 수정안이 나오면 간담회든, 공청회든 참여하겠다고 법무부 담당자에게 전하였다. 하지만 질의서에 대한 최소한의 답변도 듣지 못하고, 3월 30일 2기 NAP 최종안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NAP 담당부서인 법부무로부터 듣지 못한 채 한 달여가 지난 뒤인 5월에 알게 되었다.
의견수렴 하지 않는 시민사회와의 협력
이런 엉터리 의견수렴절차를 직접 겪게 되면서 정부가 하는 공청회란,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거쳤다는 의미 외에는 없다는 생각이 분명해졌다. 왜냐하면 국제인권가이드라인에서는 시민사회와의 협력을 강조하고 프로세스에 의견수렴과정을 포함하도록 되어 있어 정부로서는 억지 춘향이마냥 형식적으로 공청회를 할 뿐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인권단체를 비롯한 시민사회가 제출한 내용을 반영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러한 통과의례만 있으면 된다. 그 결과 한국정부는 국제사회에서 NAP도 수립했고, 수립과정에서 인권단체들의 의견도 수렴했다는 보고를 할 수 있게 된다. 이번 인종차별철폐협약 국가보고서에도 NAP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인권의 제도화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
인권이 모든 사람에게 보장될 수 있도록 인권 관련 법․제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인권단체들의 주요한 방향이었다. 권력이 있고 힘이 있는 자는 소리를 낼 수 있지만, 힘없는 사회적 약자는 목소리조차 내기 어렵다. 모두가 인권을 향유할 수 없는 이러한 불평등의 질서에서 사회구성원의 인권보장을 위한 법․제도를 국가가 마련하도록 강제하는 일은 중요한 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노력이 국가인권위원회도 만들고, 인권 관련 법․제도 수립으로도 이어졌다. NAP도 그러한 노력으로 만들어졌지만 현실에서는 무의미한 제도로 전락하고 있는 지금, ‘인권의 제도화’가 시민사회에, 인권운동에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묻게 된다.
인권 관련 법․제도를 만들라는 인권단체들의 요구는 ‘인권의 제도화’를 촉진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 그러한 인권의 제도화의 틀 속에서 인권관련 법․제도가 국가권력, 행정기관에 정착되면서 ‘박제화’되거나 ‘왜곡’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인권의 제도화’는 그 자체로 선이나 악으로 단편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인권의 제도화인 국가인권위원회는 우리 사회 최소한의 인권기준을 설정하고 인권의식을 높이는 역할을 하였다. 정부나 기업에게 인권정책을 권고하고 반인권정책에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 1993년 비엔나세계인권회의의 결과이자 2001년 유엔 사회권위원회 권고로 만들어진 NAP는 그 내용에 제대로 된 인권정책이 없어도 ‘인권정책’이라는 명칭과 틀은 그대로 유지된다. 그 결과 국제인권기구들이 볼 때(외부에서 얼핏 보기만 한다면), 한국은 NAP도 있는 국가, 최소한의 인권시스템이 있는 국가라는, ‘인권의지가 조금은 있는 국가’라는 이미지를 만든다. 나아가 ‘무엇이 인권인지 아닌지’를 국가가 거르는 속에서 인권의 내용을 하향화하거나 무의미하게 만드는 담론적 효과를 발휘한다. 이미지만 만드는 인권의 제도화는 인권운동이 요구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짚어야 하는 질문은 ‘어떠한 인권의 제도화여야 하는가? 인권의 제도화가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어떠한 제도화여야 하는가
만들어질 때 유의미했던 인권제도라 할지라도 운동의 역학관계에 따라 다른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인권위의 후퇴를 경험하면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독립성이 훼손된 이후 인권위는 최소한의 인권기준이 될 인권현안에 대한 입장표명도 제대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인권침해행위에 대해 면죄부를 주고 있는 형편이다. 인권의 제도화가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인권관련 법․제도를 만들 때만이 아니라 집행과 운용과정에서도 인권주체들의 참여와 감시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과정이 인권단체들을 비롯한 주체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기는 하다.
또한 시민사회의 참여나 인권주체들의 운동이 비어 있는 ‘인권의 제도화’는 인권주체들이 구체적인 인권요구를 자기의 것으로, 권리로 내면화하도록 이끌지 못한다. 인권관련법이나 기구는 그저 법이나 기구일 뿐이고, 그 기구와 법이 다양한 행위자들의 인권감수성을 자극하고 향상시키지 못할 것이다. 이러할 경우, 인권의 제도화가 박제화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완벽한 법․제도를 만들면 우리 사회가 인권적인 사회가 될 것이라는 환상이 지닌 위험성이며, 정책결정자인 정부나 전문가와 정책의 수혜자인 주체(권리당사자)로 나누는 방식의 제도화는 질서나 제도에서 권리주체를 수동화시키고 제도를 박제화한다. 여기서 우리는 인권의 중요한 원칙이 왜 주체(당사자)의 자력화, 권한 강화인지 되새기게 된다. 그러한 바탕에서 인권의 제도화를 생각한다면, 주체들이 제도화과정에서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여러 방법을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실제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과정은 장애인권운동의 성과이기도 하였으며, 제정이후 장차법을 실효성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도 장애인권운동이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장애인 당사자들의 인권을 증진하기도 하였을 뿐 아니라 장애인권운동의 조직화로 이어졌다. 작년에 만들어진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주민발의로 추진된 것은 학생인권조례의 필요성과 내용, 기준을 범사회적으로 설득하고 홍보하고 주체를 조직화하는 과정이었기에 더욱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시민사회의 참여 없이 만들어진 각종 인권조례는 사문화되고 있는 현실이다.
지방정부의 인권정책기본계획 수립을 접하며
인권이 수사적 장치로 남발되는 시대에 인권관련 제도는 인권운동이나 인권주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국회의원이나 정부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할 경우 인권주체들의 참여나 시민사회의 참여가 더욱 중요해진다. 인권관련 법하나 만드는 것을 치적으로 쌓으려는 정치인들의 욕구에 머물지 못하도록 제어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년부터 여러 지방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인권조례에는 지방정부가 인권정책기본계획을 주기적으로(대략 5년마다) 수립하는 안이 담겨져 있다. 인권정책기본계획을 수립하도록 강제하는 법․제도가 있다는 것만으로 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한국정부의 NAP 수립과정이나 NAP 내용에서 보았다. 행정부처의 계획을 짜깁기하는 것으로 NAP라 하고, 의견수렴 없는 형식적 절차일 뿐인 공청회를 하기도 하였다. 인권의 제도화는 무조건 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권의 제도화가 긍정적인 의미로 작동할 수 있으려면 주체의 참여, 시민사회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것을 새겨야 할 일이다. 나아가 인권관련 제도가 우후죽순 만들어지는 것이 행정관료의 자리를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도록 제어하고, 인권운동을 비롯한 주체들이 인권의 제도화 방향과 상에 대해 그림을 그려야 할 때이다.
덧붙임
명숙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