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 접속하면 또 다른 부고소식에 그 슬픔들이 밀려와서 어찌할 바를 모르기도 했고, 친구와 이 이야기를 하면서 걱정과 분노로 며칠을 보냈던 것 같다. 결국엔 우리가 송전탑에 있는 노동자들을 보러가야 하지 않을까 하며 이것저것 얘기하다가 연대하러 가기엔 현실이 녹록치 않음을 깨달았다. 20대 초반 지갑사정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아는 사람도 없고, 낯선 지역에서 길도 모르고, 무작정 가서 방해가 되면 어쩌나 하는 고민들 때문에 쉽사리 '그래! 가자'라고 선택할 수가 없었던... 막막함에 이것저것 얘기가 이어지다가 2011년에 있었던 희망버스 얘기가 나왔고, 우리뿐만 아니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과 같이 버스를 탈 수 있는 희망버스 같은 기획을 막연하게 기대하게 되었다.
역시나 며칠 후 같이 버스를 타고 그들을 만나러 가자는 '희망버스' 기획이 있었고 친구에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같이 신청해서 당일 버스를 타게 되었다. 내가 탄 버스는 ‘함께살자! 농성촌’에 있는 사람들, 쌍차동지들부터 시작해서 용산유가족 어머니, 연분홍치마, 동성애자인권연대, 강정지킴이, 인권운동사랑방, 김선우 시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했다. 버스안 분위기도 화기애애하고 즐거웠다. 맛있는 것도 나눠먹고 각자 어떻게 이 버스를 타게 되었는지 등등 이야기도 하면서 버스는 출발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나는 왜 그렇게 그들을 보러가는 것이 중요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도 송전탑에 올라가 있는 그들이 보고 싶었고, 천의봉, 최병승 동지를 보면서 힘을 받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혼자 싸우는 게 아니라는, 당신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그게 정말 큰 힘이 될 것 같았다. 막상 울산에 도착하니 송전탑은 생각했던 것보다 높았고 올려다볼수록 아찔하기만 했다. 왜 사람이 땅에 발붙이고 못살고 저 높은 곳에 올라가야만 하는지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울산에서 함께 기운을 나누고 힘을 다지고 부산을 향해 다시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추모영상을 보면서 한진중공업 최강서 열사의 죽음이 너무나 억울하고 아까운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평범하게 일터로 돌아가는 일상을 꿈꿨던 사람, 그 사람을 벼랑으로 내몰고 또 내몰아버린 한진자본. 손배청구된 상상도 못할 돈 158억. 그 무게를 어떤 사람인들 감당할 수 있었을까. 살면서 만져본 적도 없는 아니, 앞으로 구경도 못할 그 돈을 노조에게 때리면서 그가 느껴야만했던 절망은 아마도 158억의 더러운 돈의 무게보다 더 컸을 것이다. 2011년 여름 치열하게 싸워서 얻어낸 업무복귀 그러나 출근 몇 시간 만에 내려진 강제무기한휴업. 어떻게 사람이 약속을 했는데 그렇게 쉽게 어길 수 있는 건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의 죽음이 더욱 슬프게 다가왔다.
그렇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별로 없었지만 울산에 도착해 송전탑을 바라보았고 거기엔 두 동지들이 있었다. 차에서 받은 '함께 살자'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힘껏 흔들어보았다. 그리고 착각일 수 있겠지만 위에 있던 동지가 꼭 날 보며 손을 흔들어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무척 좋았다. 진심은 통한다던데 그들도 보았겠지. ‘함께 살자’라는 구호를. 다시 다음을 생각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떻게 하면 함께 살 수 있을지 고민해보고 또 다시 이러한 비극이 없는 사회를 위해 뭘 할 수 있을지 말이다.
난 희망'이 뭔지도 잘 모르겠고 우리에게 '희망'이란 게 과연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괜히 '희망'이라는 말로 오히려 고문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지만 그래도 송전탑에 있는 노동자들이 웃으며 내려오는 것이, 한진노동자들이 제대로 다시 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 이 땅에 절망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덜 절망스러운 현실이 '작은 희망'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덧붙임
공기 님은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희망버스 참가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