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통이 아이들에게 비껴갈 리 없지만, 오히려 더 노골적이거나 폭력적인 경우도 많다. 살아가다 보면 시기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이들도 누군가의 죽음을 만나게 되고 때로는 자신의 죽음과 대면하게 된다. 가족 안에서 죽음을 어떻게 풀어가는지 보여주는 두 가지 이야기를 소개한다.
관계의 아쉬움 남기는 죽음
어느 날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와 불편한 동거를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별명을 지어 부르고, 집안 여기저기에 담뱃재를 함부로 버려 매일 엄마와 실랑이를 벌인다. 또 서부 출신의 사나이다움을 뽐내며 도시인인 아빠를 못마땅하게 여겨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할아버지와 같이 있는 시간은 재미가 없다. 심지어 옛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주며 요즘 아이들은 물러서 탈이라고 말한다. 가족 안에서 유기적 관계를 맺기보다는 갈등의 상황을 만들어내는 고집 세고 심술궂어 보이는 할아버지다. 물론 할아버지도 우리와 함께 살게 된 점이 좋지만은 않다. 평생을 시골에서 일하며 독립적으로 살았던 분인데 도시에서는 집안 소파에 앉아 무료한 시간을 보내니 말이다.
불편함으로 기억되는 동거는 한쪽의 죽음으로 아쉬움마저 쉬 없어질 것 같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사람이란, 관계란 보이고 느끼는 일면만 있지 않다. 시골에서 먹던 음식을 고집했던 할아버지 때문에 좋아하는 요리를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엄마도 그리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나도 할아버지에게 내주었던 방을 되찾아 다락방에서 내려왔지만, 할아버지가 좀 더 오래 계셨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보면 할아버지는 고장 난 물건을 솜씨 좋게 고쳤고, 쇠못으로 장난감도 만들어주었다. 그의 죽음은 안타깝게도 평소 인식하지 못했던 할아버지의 다른 면을 떠올리게 한다.
오열하거나 과장하지 않은 슬픔은 그간의 감정의 골을 보여줄 수도 있다. 존 버닝햄이 그린 『우리 할아버지』는 친구 같은 모습이지만, 그런 관계를 만나는 행운도, 만들어가는 능력도 쉽지만은 않다. 릴리 노만의 『우리 할아버지』는 흔히 볼 수 있는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는 좀 괴팍스런 성격의 우리 할아버지다. 이런 할아버지와 행복한 추억을 만들지 못할 이유도 없겠지만 떠난 후에 관계는 아쉬움만을 남긴다.
다양하고 대체로 불운한 사건을 보여주는 뉴스는 ‘죽음’을 사고와 높은 자살률, 살인, 오래도록 발견되지 않았던 사체로 이야기한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남은 가족이 지켜보는 죽음을 맞는 노인은 제명을 다 하고 산 것 같아 축복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어찌 됐건 노인은 삶이라는 과정을 마쳤고, 남은 이들도 자신의 삶과 죽음을 자연스럽게 그려보게 되니 말이다.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든 가족과 새로운 죽음의 해석
노인의 죽음에 비해 아이들의 죽음은 좀 더 안타깝다. 남은 가족은 상실감에 불필요한 죄책감까지 더해 삶의 의욕을 잃기까지 한다. 『잘가라, 내동생』은 갑작스런 동생의 죽음을 가족과 죽은 빈센트 본인이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준다. 작가는 죽음을 다른 차원으로의 여행으로 그려 죽음이 가진 어두운 이미지를 거두고 신선함까지 더한다.
늘 씩씩하고 생기 넘치던 동생 빈센트는 돌연 심장병으로 가족들을 떠나게 된다. 빈센트의 몸에서 빠져나온 또 하나의 빈센트는 병원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사후과정과 장례식을 지켜본다. 또 집으로 가서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가족을 보며 추억을 떠올린다. 하지만 산 사람들은 빈센트의 또 다른 실존을 알지 못한다.
병원에서 만난 피엔체 할머니는 죽기 전에 아프던 몸이 죽고 나서 멀쩡해졌다며 누구 못지않은 활기참으로 죽음의 장을 즐긴다. 이승에서 오랜 삶을 살아온 할머니는 애석하게도 그녀의 죽음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적다. 덕분에 더 빨리 진정한 죽은 자의 세계로 빛을 따라간다. 그러나 죽은 지 7년이나 된 쿠르트는 가족들이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빈센트보다 더 뚜렷한 영혼의 형체를 가지고 있다. 쿠르트의 부모님은 똑똑한 아들의 죽음 이후, 자신들의 현실생활을 더 이상 돌보지 않는다. 관계는 형성되지 않고 멈췄다. 덕분에 살아있는 형마저 집 밖을 떠돌며 방황한다.
빈센트의 가족은 추억과 슬픔에 젖는 것을 멀리하지도 않지만, 평소의 일상생활을 해나가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이들의 슬픔을 마주하기 어려워한다. 빈센트의 엄마와 누나는 같은 슬픔을 가진 사람들과의 모임으로 살아가는 힘을 갖게 된다. 빈센트의 가족과 우연히 묘지에서 만나면서 쿠르트의 부모님은 처음으로 남과 아들 잃은 슬픔을 나누게 된다. 쿠르트의 가족에게 시작된 관계는 받아들이지 않던 현실과의 접촉도 앞당길 것이다. 빈센트의 가족이 빈센트를 떠나보낼 준비가 된 것처럼 언젠가 쿠르트도 가족과 이승의 세계를 떠나 진정한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죽음 이후에 깜깜한 암흑이나 창백한 얼굴의 저승사자 대신에 나름의 이별시간과 축제, 빛의 세계를 맞을 수도 있다니 죽음이 두렵기만 한 것은 아니다. 죽음마저 무섭지 않게 써내려간 작가의 역량은 죽음 직전까지 갔다 돌아온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와 닮았다. 믿든 안 믿든 이 이야기가 보여주는 사후세계는 자못 신비스러워 새로운 여행처럼 기대마저 일으킨다.
덧붙임
보영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