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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위, 파장? 파장!] 성소수자는 괜찮은데 ‘호레호게’는 안 된다?

차라리 잘되었다. 당신들 속마음은 사실 그런 거였어.

“LGBT(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 우리가 지금 여기 살고 있다.”
“지금 이곳을 지나가는 열 명 중 한 명은 성소수자 입니다.”

마포구청에서 거부한 현수막

▲ 마포구청에서 거부한 현수막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이하 마레연)이 마포구청 관내 세 곳의 현수막 게시대에 걸고자 했던 현수막의 문구이다. 사실 현수막 광고를 준비하며 문구를 공모하고 결정했을 때 성소수자들이 그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닌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효과적으로 알리는 문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포구청측이 현수막 게시를 거부해서 처음 항의전화를 한 활동가에게 구청 담당자는 ‘혐오스럽다’는 말을 서슴없이 했으며, ‘여기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문제다.’, ‘사람 모양이 상반신을 탈의하고 있어 청소년에게 유해하다.’, ‘문구가 반말이라 안 된다.’ 등의 궤변을 늘어놓았다. 반발이 거세어지자 옥외광고물 심의위원회를 열어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결정하겠다고 했다. 마포구청과 심의위원회는 “열 명 중 한 명”이 과장된 표현이라 현수막을 보는 사람들의 성정체성에 혼란을 줄 수 있다, 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가 직설적인 표현이라서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는 차별적인 발언을 늘어놓으며 문구를 수정하지 않으면 게시할 수 없음을 통보해 왔다.

이후 마포구청 앞에서 일인시위, 기자회견, 야유회(마포구청에 야유를 보내는 모임) 등의 직접행동을 진행하며 주무부서(도시경관과) 과장과 면담을 가졌으나 ‘구청장일지라도 민간위원으로 구성된 심의위의 결과는 번복이 어렵다’며 심의위 뒤에 숨어 마레연의 양보(문구변경)만을 요구하며 끝내 현수막 게시를 거부했다. 또한 구의회를 통한 구정질의에서는 ‘청소년에게 유해한 내용이라서 수정을 요구하였다’고 답변하였고, 마포구청장은 지역 대형교회의 반대의견으로 인해 허가하기가 어렵다고 발언했다.

차별과 편견을 없애고 인권에 기반을 둔 정책을 적극 추진해야하는 지방자치단체가 오히려 성소수자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며 명분 없는 청소년 보호논리로 현수막 게시를 거부하는 것은 차별행위이다. 또한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일이라면 언제든 반대 입장을 내세우는 대형 교회의 반대 의견만을 공적업무 수행에 반영하는 것 또한 차별행위이다. 지자체의 운영이 인권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대형교회의 이해에 좌우된다면 마포주민은 어떻게 평등권을 보장받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정말 화나고 속상하면서도 이 사건이 터진 건 어떤 의미에서 정말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TV 드라마에 동성애 커플도 나오고, 홍석천 씨가 다시 공중파에 모습을 드러내고, 서울 곳곳에 ‘서울 시민 중 누군가는 성소수자 입니다’라는 현수막도 걸리니 성소수자의 인권도 많이 향상되었다, 이 사회도 참 많이 바뀌었다”라고 말하며 성소수자의 인권을 인정하는 척하던 모습의 내면에 숨어있던 혐오와 차별을 그대로 드러내게 만든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갈팡질팡 국가인권위

하지만 이렇게 명백한 차별사건에 빠르게 대응해야 할 인권위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마레연은 이 사건을 2012년 12월에 인권위에 진정을 했지만 아직까지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이러저러한 이유를 대며 시간을 끌었다. 5월 1일 인권위의 조속한 결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한 후인, 5월 15일 마포구청의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 현수막 반려 사건 관련 국가인권위원회 소위원회(위원장 홍진표 상임의원, 소위 위원 김영혜 상임의원, 강명덕 비상임의원)가 있었다. 소위원회의 결과를 담당 조사관에게 문의해보니 ‘국가기관이 광고 내용에 대해 심의, 보완을 요구하는 것이 표현의 자유 침해에 해당되는지에 대해 좀 더 판단이 필요하다’ 며 다음 소위에 재상정하기로 했다고 했다. 정말 엉뚱한 궤변이다. 차별대우를 하는 것이 표현의 자유와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이번 차별사건과 관련해 인권위의 말도 안 되는 태도는 이번뿐이 아니다. 5월 1일 여러 단체들과 함께 마포구청의 성소수자 차별 규탄과 국가인권위의 조속한 대응 촉구 기자회견을 한 후 차별조사과와 면담을 했다. 그 때 조사관들이 '서초구청은 처음부터 현수막을 거절했지만, 마포구청은 심의위원회를 열어 수정 후 게첨이라는 중재안을 제시했다.'며 ‘절차상의 과정이 서초구청 사례와는 유사하면서도 달라 조사가 어렵다.’라는 입장을 들으며 우려했었다. 그런데 역시 소위원회에서는 애초 인권위가 판단해야 할 핵심적인 내용과는 상관없는 ‘마포구청의 처리 절차’를 쟁점으로 만들려고 할 뿐, 차별쟁점을 흐리고 있다.

인권위의 조속한 결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사진

▲ 인권위의 조속한 결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사진


차별금지법안 철회하기도 전에 안건에서 제외

인권위의 태만은 마레연 현수막 사건의 쟁점 흐리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차별금지법안 제정을 위해 국회에 법안이 발의되었을 때도 국회의 요청으로 인권위 상임위원회에 ‘차별금지법안에 대한 의견표명’이 의결 안건으로 예정되었으나, 법안 철회 움직임이 보이자 상임위 안건에서 제외시켰다. 인권위에서 국무총리에게 입법권고까지 했던 법안인 만큼 법안이 철회 될 수도 있는 상황일수록 더욱 차별금지법의 의미와 필요성에 대한 적극적인 의견표명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인권위는 보수기독교 단체의 반대에 법안이 철회될지도 모른다는 소문만 듣고 공식통보가 오기도 전에, 안건을 논의조차 하지 않는 태만이라는 형식으로 방조하기도 했다. 요즘 같은 성소수자 혐오가 판치는 시기에 인권위가 자기 역할을 전혀 하지 않는 실망스러운 모습이다.

‘호레호게’를 허하라!

마레연은 성소수자 당사자들과 지지자들이 ‘지역주민‘의 정체성을 표방하고 나선 한국 최초의 성소수자 지역 모임이다. 그러기에 마레연이 걸고자하는 현수막은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외치는 ’자연을 보호합시다.‘와 같은 내용이 아니라, 성소수자 존재 그대로를 지역에 드러내고 함께 살아가며 동등한 권리를 누릴 주체임을 알리는 의미가 있다. 그러하기에 이 문구들을 고집하며 긴 시간 현수막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가 국가기관인 지자체의 방해로 침해받고 있다는 사실이 한국의 성소수자들이 처한 현실이라는 게 씁쓸하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성적지향 ․ 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금지 조항이 국가인권위원회 법에 명시되어 있는데, 바로 그 성적지향 ․ 성별정체성을 표현하는 말인 ‘게이 ․ 레즈비언 ․ 바이섹슈얼 ․ 트랜스젠더’를 못 쓰게 한다는 것 자체가 차별이라는 사실을 인권위에서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이 말들을 대체해서 어떤 '이해해줘야 할 소수자' 정도의 표현으로 '성소수자'라는 말로 뭉뚱그린다고 해서, 그것이 인권침해가 아닌 것이 아니며, 그렇게 요구하는 것 자체가 이 사회의 기만이다.

※호레호게란 ‘레즈비언을 레즈비언이라 부르고 게이를 게이라 부른다’는 의미로 마포구청 덕분에 생겨난 신조어이다.

덧붙임

홍이 님은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 당번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