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들이 보도한 내용을 보면, 그의 다양한 이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김기춘 씨가 살아온 삶의 궤적은 고구마 줄기처럼 지배 권력과 어떻게 끈을 이어가는지 보여준다. 김기춘 씨는 5.16 군사 쿠데타 직전 1960년 10월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5.16장학회(정수장학회 전신)의 첫 수혜자로 1972년 법무부 검사로 재직할 당시 유신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했으며, 1974년부터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 중앙정보부장 비서관, 대공수사국장을 역임했다. 유신헌법은 입법·사법·행정 권력을 무시한 채 제왕적으로 대통령의 권한을 확장시켰다. 대통령도 간접 선거를 통해 뽑고, 국회를 해산하며, 법관까지 대통령이 임명했다. 게다가 헌법 효력까지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를 발동시켜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행위를 모두 금지시켰다. 유신 시절 김기춘 씨가 남긴 기록을 보면, 역사의식과 정치관이 드러난다.
“유신헌법은 우리 현실에 가장 알맞은 민주주의 제도를 이 땅 위에 뿌리박아 토착화시키는 일대 유신적 개혁의 시발점”(출처: ‘유신헌법해설’, 대검찰청 발행 <검찰>48호, 1972.12)
“자유가 없는 질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질서 없는 자유는 가질 수 없다.” (‘변호사 자격 실질적 검사제 도입 요구’에서 재인용, 인권운동사랑방 발행 <인권하루소식> 1993.10.28.)
“전체 국민의 생존권보다 더 큰 인권은 없다.”(‘변호사 자격 실질적 검사제 도입 요구’에서 재인용, 인권운동사랑방 발행 <인권하루소식> 1993.10.28.)
이렇듯 김기춘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의 정신적 지주라도 되는 듯, 유신질서를 옹호·유지하는 발언들을 쏟아냈다. 그가 근무한 중앙정보부는 유신헌법을 집행하는 곳으로 정권유지 차원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납치, 고문을 하여 간첩을 조작하던 곳이었다. 입법, 사법, 행정부가 마치 한 몸처럼 국민을 감시하고 통치하던 그 시절, 김기춘 씨는 국민을 어떻게 다루는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포지션을 갖춰야하는지 몸으로 체득하며 20대와 30대를 보냈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1979년 박정희 씨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독재자 한명은 사라졌을지언정 유신 체제를 유지시키던 인물들은 그 명맥을 유지해왔다. 유신체제를 떠받치고 있던 사람들은 계속 공직에 남았고 김기춘 씨 역시 노태우 정권에서 다시 화려하게 공안검사로 부활해 노태우 정권 공안통치의 주역으로 검찰총장까지 역임했다. 1991년 범죄와의 전쟁, 명지대생 강경대 사망사건 등 공안통치의 절정에서 김기춘 씨는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강기훈 유서대필조작사건으로 위기국면을 넘겼다. 이후 공직에서 물러난 김기춘 씨는 변호사로 개업을 시작했다. 1993년 당시 그의 변호사 개업에 대해 강대성 등 변호사 100명은 “김기춘 씨의 일생은 이 나라 법치주의 말살과 인권의 억압에 시종하여 있다”고 우려했다.
그의 활약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부산 초원복집 사건으로 김영삼 대통령 당선의 1등 공신이 된 김기춘 씨는 1996년 한나라당에 입당해 내리 15, 16, 17대 3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기춘 씨는 입법기관이 어떻게 인권을 후퇴시킬 수 있을지도 여실히 보여주었다. 2004년 2월 26일 사회보호법 폐지를 바로 눈 앞에 둔 상황, 당시 한나라당 의원으로 법제사법위원장이던 김기춘 씨는 “심도있는 논의가 필요하다”며 법안통과를 저지시켰다. 당시 한나라당, 열린우리당 모두 사회보호법 폐지를 당론으로 정한 상태였고, 청송피감호자들이 여섯 차례에 이르는 단식으로 사회보호법의 반인권성이 세상에 드러난 상태였다. 지금도 호시탐탐 사회보호법 부활을 꿈꾸는 공안세력에게 김기춘 씨의 복귀는 반가운 뉴스일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국가권력이 저지른 반인도적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두지 않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에 대해서도 김기춘 씨는 “공소시효제도에 함부로 손을 대는 것에 부정적”이라고 했고, 국가보안법 개·폐지에 결사 반대하는 한나라당 의원 63명 중 1인이었다.
김기춘 씨가 대통령비서실장이라는 2인자의 위치로 등극하자 ‘유신의 부활이다’, ‘반역사적인 인사다’ 라는 평가가 주류이다. 그러나 단순히 유신의 부활로 치부하기에 우리는 많은 것을 감내해야 한다. 독재자는 사라졌으나 독재를 지탱하며 인권침해를 유지시키는 구조와 그 질서에 복무했던 사람들을 단죄하지 못한 결과, 김기춘 씨 같은 사람이 국가 고위 공직자로 등장하는 것을 보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인권침해를 유지시키는 구조적 질서의 재구축이라는 점에서 김기춘 씨의 대통령비서실장 임명을 봐야하지 않을까? 지금은 과거처럼 유신헌법이나 긴급조치를 만들지 않고도, 인터넷에 댓글을 조작해서 국민의 불만쯤은 넘길 수 있다. 과거처럼 비밀정보기관이 사람들을 납치, 고문해서 간첩으로 둔갑시키지 않고도,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을 ‘종북세력’이라고 낙인찍어 왕따 시키면 된다. 촛불집회에 3만에 이르는 시민이 참여해도 언론은 자발적으로 보도를 축소시킨다.
박근혜 대통령은 2기 청와대실무인선을 마무리 하면서, 공직사회 기강을 잡고 부정부패를 척결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 메시지가 국민을 향한 선전포고로 들린다. 법질서와 공권력을 앞세울 테니 알아서 잘 하라는 그런 메시지.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기기보다는 그냥 나를 따라와, 다른 말은 필요 없어, 그런 메시지. 부디 박근혜 대통령이 그녀가 좋아하는 길보다는 싫어하는 길을 선택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야 ‘부전여전’이라는 평가를 남기지 않을 수 있다.
부산 초원복집 사건이란?
14대 대선 직전 1992년 12월 11일, 전직 법무부 장관이던 김기춘 씨가 부산 지역 기관장이던 김영환 부산직할시장, 박일용 부산지방경찰청장, 이규삼 국가안전기획부 부산지부장, 우명수 부산직할시 교육감, 정경식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박남수 부산상공회의소장 등을 불러모아 민주자유당 후보였던 김영삼 씨를 당선시키기 위해 야당 후보들을 비방하는 내용을 유포시키는 등 대화를 나누었다. 이 내용을 통일국민당 관계자들이 도청하여 언론에 폭로했다. 이들은 모임에서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안 되면 영도다리에 빠져 죽자",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부추겨야 돼."와 같은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대화를 나누었다. 이 사건은 김영삼 후보에 대해 영남 지지층을 결집하는 계기가 되어 김영삼 씨는 1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참고:위키피디아]
덧붙임
최은아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