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壯子)에 나오는 이야기다. 바닷새가 바라는 것은 화려한 궁궐이 아닌 드넓은 바다였을 것이다. 술과 귀한 음식보다는 조개와 물고기를 더 바랐을 것이다. 왕의 사랑은 진심이었지만, 그 사랑은 바닷새에게 슬픔이 되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정해 놓은 기준과 방식에 의한 배려는 오히려 날카로운 이기심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생채기를 낼 수 있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배려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삶의 기준을 존중하고, 진정 무엇을 바라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세상을 보는 방법
『보이지 않는다면』 (차이자오룬 글, 그림/웅진주니어)은 한 아이가 눈을 가린 채 공원을 찾아 가는 이야기다. 우리는 아이의 여정을 통해 시각장애인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눈을 가리니 세상은 온통 까맣다. 어디에 부딪치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이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쳤을 작은 소리가 귀를 쫑긋하게 한다.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지는 않을지 걱정스럽다. 눈이 보이지 않는 세상은 낯섦과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드디어 공원에 도착. 이제 감겨졌던 눈을 뜨면... 화려한 공원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공원을 본 아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안도감이 아니었을까. 작가는 앞이 보이지 않는 경험을 통해 이러한 생각을 나누고 싶었던 것 같다.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없음은 불행한 일이다. 시각장애인은 이러한 불편함과 불안함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배려해야 한다.’ 이 이야기에는 시각장애인의 삶을 이해하고 배려하고자 하는 노력이 담겨있다. 하지만 못내 마음이 씁쓸하다. 장애를 품은 삶은 단지 불행함과 불편함을 의미하는 것일까?
장애의 불편함을 공감하고자 하는 노력은 소중한 경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이 경험만으로 한 사람의 삶을 가늠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장애인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은 결국 비장애인으로서의 우월감이다. 곧 자신의 기준에 따라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존재와 할 수 없는 존재로 사람을 구분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배려는 선의로 포장된 이기심이 될 뿐이다. 노나라의 왕이 사람의 방식으로 바닷새를 사랑했듯이 말이다. 어떤 경우에서든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우월함과 열등함으로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
언젠가 맹학교 아이들의 미술 시간을 그린 다큐멘터리를 봤다. 봄을 느끼기 위해 선생님과 아이들이 마을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는 장면이 있었다. 벚꽃 나무가 길게 늘어선 골목에 다다르자 선생님은 흩어져 있는 벚꽃 잎을 모아 한 아이의 손에 쥐어 주었다. 아이는 곰곰이 벚꽃을 느꼈다. 그때 문득 나는 벚꽃을 만져 본 적이 없음을 알았다. 벚꽃은 무슨 느낌일까?
『눈을 감고 느끼는 색깔여행』 (메네다 코틴 지음, 로사나 파리아 그림/고래이야기)은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년, 토마스가 들려주는 색깔 이야기다. 이 책은 온통 까맣다. 까만 바탕 위에는 우둘투둘하게 솟은 그림이 있다. 우리는 그림들을 매만지며 토마스와 함께 색깔을 상상하고 느껴본다.
“노란색은 코를 톡 쏘는 겨자 맛이고, 병아리의 솜털처럼 보들보들한 느낌이야.”
“빨간색은 딸기처럼 새콤하고 수박처럼 달콤해. 그런데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날 때처럼 아픈 느낌이기도 해.”
“갈색은 바스락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야. 초콜릿 냄새가 나기도 하지만 가끔 고약한 똥냄새 도 나.”
“나는 모든 색깔을 좋아해. 볼 수는 없지만 소리와 냄새와 말과 촉각으로 세상 모든 색깔을 느낄 수 있거든 너도 눈을 감고 느껴봐.”
『눈을 감고 느끼는 색깔여행』은 우리가 가진 ‘본다’는 것에 대한 편견을 알뜰하게 깨뜨린다. 토마스는 눈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음을 일러준다. 흔히 세상을 경험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본다’라고 말한다. 맛을 본다, 소리를 들어 본다, 만져 본다, 생각해 본다... 세상을 보는 방법은 이처럼 다양하다. 하지만 우리는 눈으로밖에 세상을 보지 못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벚꽃을 만져보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나는 눈으로 벚꽃을 보고 벚꽃의 전부를 알게 되었다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다. 사람마다 제각각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 모두 주어진 조건과 환경 속에 적응하고 살며, 삶의 순간순간에 나름의 의미를 담아내며 산다. 장애는 단순히 불가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장애는 또 다른 가능성, 다양한 삶의 방식이다. 다시 말해 장애인의 삶, 비장애인의 삶은 없다. 한 사람의 삶과 또 한 사람의 삶이 있을 뿐이다.
친구가 되는 방법
에즈라 잭 키츠의 그림책은 소수 민족의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1962년 그가 발표한 『눈 오는 날』은 처음으로 흑인아이가 주인공인 등장한 그림책이다. 그 이전에는 중산층의 백인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동화로 가득했다. 하지만 키츠는 흑인 아이의 소소한 일상, 이민 온 아이들의 경험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민적인 이야기를 그려내며 조용한 혁명을 이루었다.
『내 친구 루이』 (에즈라 잭 키츠 글, 그림/비룡소)는 수지, 로베르토, 루이가 친구가 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다. 수지와 로베르토는 친구들을 초대해 인형극을 열었다. 인형극에는 조금 특별한 친구, 루이도 왔다. 인형극이 시작되고 인형 ‘구씨’가 무대에 나왔다. 루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구씨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루이 뒤에 앉은 친구들이 불평을 하지만 루이는 더 큰 소리로 인사를 한다. 인형극이 끝나고 루이는 껑충껑충 뛰며 그 누구보다 크게 박수를 쳤다.
인형극이 끝나고 루이는 ‘구씨’와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시무룩하게 집으로 돌아온 루이 방에 들어가 구씨와 함께하는 꿈을 꾼다. 엄마는 루이에게 쪽지하나를 건넨다.
“안녕! 안녕! 안녕! 밖으로 나가서 녹색 줄을 따라가 봐.”
녹색 줄을 따라가니 구씨가 팔을 벌리고 루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를 내고, 인형 ‘구씨’에게 말을 거는 루이의 모습에서 발달장애의 특성을 볼 수 있다. 물론 루이의 장애여부에 대한 작가의 직접적인 설명은 없다. 아니 이 이야기에서 루이가 어떤 장애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수지와 로베르토와 루이가 친구가 되는데 ‘장애’라는 개념이 필요 없듯이 말이다.
사회학자 메이어슨은 “장애란 한 개인에게 객관적인 사실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가치 판단에 의해 필요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곧 장애라는 개념은 태어나면서부터 부여 받는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사회의 필요에 따라 부여된 명칭이며 사회, 문화의 영향에 의해 바뀔 수 있는 개념이다.
‘장애인을 사랑하자, 장애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따위의 공익광고 문구를 흔히 볼 수 있다. 이 문구들은 장애인식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문제를 올바르게 표현하고 있을까? 문구들을 바꾸어 보면 장애인은 사랑을 받아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이고, 장애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여기에도 비장애인으로서의 ‘선의로 포장된 우월감과 이기심’이 담겨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 짓는 인식과 노력이 과연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있어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진정한 장애 인식의 개선은 ‘장애’라는 단어를 지우는데서 시작된다. 수지와 로베르토가 루이와 친구가 되기 위해 했던 고민과 노력을 상상해 보자. 그 상상 속에 함께 사는 세상 대한 답이 담겨 있을 것이다.
“아저씨, 저는 누구나 상상력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상상력을 통해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상상력은 사람들을 친절하고 인정 많고 이해심 있게 만들어요.” -키다리 아저씨 중에서
덧붙임
김인호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의 활동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