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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의 인권이야기] 활동보조 제도화 이후, 경험과 확장된 고민들

내가 독립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부분이자 가장 많이 고민하게 되는 것이 활동보조 관한 이야기이다. 앞서 글들에도 간간이 언급을 했었지만, 활동보조 이야기는 며칠 동안 밤새서 글을 쓰고 이야기를 해도 부족할 만큼 지속적인 고민과 경험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활동보조 제도를 알게 되었을 때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마치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내 장애에서 해방되는 길이 열린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나는 내 의견대로 활동보조를 안 해 주는 가족들과 매일 언성을 높이며 감정적인 다툼이 일어나곤 했는데, 활동보조 제도는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 같았다.

활동보조 제도만 생긴다면 이제는 가족에게 불편함을 끼치지 않고 내 선택권을 존중받으며 원하는 무언가를 당당히 요구할 수 있게 된다는 믿음은 너무나 강렬했다. 가슴이 너무나 벅찼다.

하지만 그 당시에 좀 더 깊은 고민과 여러 가지 문제점을 생각해내지 못한 것은 이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제도가 주는 희망적인 메시지만 쫓아갔을 뿐 비판적인 관점은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활동가들은 다를 수 있지만….) 그러기에는 당장 일상을 보조할 누군가 필요했고, 그것이 제도 제정에 시급성으로 다가왔을 뿐이었다. 그래서 어느 장애운동 투쟁보다 열심히 활동했었고 가장 절실한 맘으로 활동보조 제도를 외쳤다.

하지만 막상 제도화가 되고 활동보조 서비스를 이용한 지 10년 가까이 되어 온 나는 활동보조 제도가 내가 느끼는 장애에 대한 불편함을 해소하는 수단으로서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흔히 활동보조인에게 금전적인 대가를 제공하기 때문에 장애인의 선택권과 결정권을 존중해 줘야 하며, 손과 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경험을 통해서 이 말이 현장에서 실행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활동보조인은 감정을 가진 인격체이고, 그들이 금전적인 대가를 받는다고 해서 무조건 시키는 대로 다 해야 한다는 것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 활동보조인은 장애인의 삶에서 절대적 위치, 장애인은 활동보조인의 생계를 담보하는 위치에서 서로의 긴장감 없이, 서열적 계급적으로 상호 무조건적 권리를 요구할 때 문제는 발생한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핵심에는 금전적인 부분이 있고, 그 자체는 자본주의에 기반 제도에서 발생하는 문제라 생각한다. 장애인과 활동보조인이 무엇보다 상호 이해하는 관계가 필요하다.

실제로 활동보조를 받아오면서 활동보조인과 서로 다른 생활 습관과 가치관의 차이로 힘든 적이 많았다. 예를 들면 나는 식사 이후에 커피를 마시는 습관이 있다. 그런데 어떤 활동보조인은 자신에 건강을 생각해서 커피를 마시지 않는데 커피를 타 달라는 나의 요구에 언짢아한다. 건강에 좋지 않은 건데 왜 마시느냐며 나의 요구에 거부했다. 그리고 나는 종교를 믿고 싶지 않은데 종교를 강요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녔다. 자기네 종교시설로 가면 장애가 나아져서 걸을 수 있다면서 강요를 하기에 그것에 완강히 거부하니 모욕적인 말과 함께 활동보조를 그만둔 분도 있다.

사실 활동보조 일 자체가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그들이 지녀 온 생활 습관을 모두 버리고 나한테 맞추라는 것은 어쩌면 폭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어느 한쪽이든 자신이 가진 습관이나 가치관을 상대에게 무조건 강요할 때 그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 또한, 관계에서 공적인 관계를 유지하라는 규칙도 사실 지키지 어려운 약속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내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과 어떻게 공적인 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더구나 여성 활동보조를 받아오면서 여성들 만에 연대의식도 간혹 생기기도 하고 힘을 받을 때도 잦았다.

그렇지만 돈의 매개체로 형성된 관계에서 한계는 늘 존재했다. 활동보조 시간이 부족했던 달이나 자신이 계산한 것보다 급여가 적게 들어오는 날이 있으면 그동안의 관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부족한 활동보조 시간과 급여만 남는다. 그러고는 다른 일자리를 구한다며 떠나 버린다.

이를 통해 나는 사람과의 공허한 관계를 배웠다. 그리고 의지했던 활동보조인이 어느 날 갑자기 그만두고 안 나오는 날들을 경험함으로써 사람한테 너무 많은 의지를 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활동보조인들과 오래 있다 보니 나에 대한 너무 많은 정보를 알게 되는데 그것들에 대해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 문제로 여겨지곤 했다. 활동보조인과 병원에 함께 가면 의료진들은 활동보조인을 내 보호자로 지목하면서 내 질병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하려고 한다. 그 상황에서 언어장애를 가진 나는 어떤 것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물론 활동보조 제도가 생긴 뒤부터 내 삶이 많이 달라졌고, 독립에 있어서 기초적인인 기반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장애가 중증일수록 활동보조가 더 절실히 필요하고 24시간 활동보조 쟁취를 위한 투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활동보조 시간이 더 많이 늘어난다고 해서 그 시간을 다 쓸 생각이 없다. 타인과 한 시간도 안 빼고 늘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일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 통하는 좋아하는 사람과 매일 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좋아하는 감정이 지배적이라도 권태기가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어떠한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혼자만의 시간은 만들고 싶다. (위험하지 않도록 다른 대안적인 대책이 마련되었으면 좋겠지만….)

어쩌면 지금에 내 글이 오해를 불러일으켜서 열심히 활동보조 투쟁을 하고 24시간 활동보조가 필요한 분들께 불편한 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각 개인에 욕구와 상황에 따라서 시간 분배가 자유롭게 이루어지면 좋겠다. 지금은 내가 24시간 활동보조가 필요치 않더라도 갑자기 아프거나 몸이 쇠약해지면 24시간 쓸 수 있는 상황에서 시간을 자유롭게 요청할 수 있는 통로가 언제든지 열려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 글을 통해 활동보조 관하여 다르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활동보조를 받아오면서 또는 이념적인 부분에서 불편함을 느꼈고,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불편함을 참으면 오로지 불편함으로 남겠지만 불편함을 밖으로 꺼냈을 때, 또 다른 고민과 대안들이 만들어질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 그래서 더 많이 불편함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언어화해서 말할 수 있는 고민과 용기가 멈추지 않도록 노력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덧붙임

김상 님은 사회적기업 노란들판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