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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이야기

다른 세상을 향해 봄바람은 계속 불 것이다

40일 봄바람 순례 여정에 길동무로 함께 하며

“평생 산 삶보다 더 많이 살아가는 기분입니다.” 3월 15일 제주 강정에서 출발한 ‘다른 세상을 만나는 40일의 순례 봄바람’ 여정이 중반에 다다른 4월 초, 순례단인 평화바람 활동가가 전해준 안부였다. 해군기지 반대투쟁을 하며 강정마을 주민으로 산지 10여 년, 평화바람 식구들의 집이 있는 군산에는 미군기지를 더욱 확장하는 새만금 신공항 건설계획이 졸속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공항부지로 쓰겠다는 수라갯벌에 작년 기후정의버스를 타고 다녀온 적이 있다. 물길을 막은 간척사업이 20년 동안 진행되면서 조개를 캐며 삶을 일구던 어민들, 어느 읍내 못지 않은 활력으로 가득 찼던 마을들은 다 사라졌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마지막’ 갯벌인 수라갯벌, 그 생명의 땅에 시멘트를 붓고 죽음의 땅으로 바꿀 새만금 신공항 건설사업에 대해 환경부는 20대 대통령 선거 직전인 3월 2일 환경영향평가 조건부 동의 결정으로 추진을 본격화할 길을 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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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과 군사주의를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의 터전은 송두리째 무너지고 평화는 오지 않습니다. 평화는 정의의 실현이며 죽어가는 뭇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평화는 불평등과 차별에 반대하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것입니다. 평화는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한반도 평화, 평등, 생태를 위한 40일 순례길의 시작을 알리며 문정현 신부님과 평화바람 활동가들의 발길이 전국 곳곳의 투쟁현장들로 향했다. “지금 당장 기후정의! 차별을 끊고 평등으로! 전쟁 연습 말고 평화 연습! 일하다 죽지 않게,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외치며 제주-경상-전라-충청-강원-경기-서울로 이어졌다. 순례단의 여정에 마음과 시간을 내어 함께 하는 ‘길동무’들이 모인 SNS에는 매일 순례단이 만난 현장과 사람들의 사진과 이야기가 올라왔다.

다른 세상을 만나러 가는 길, 봄바람이 불다

동해안에 줄지어 짓는 핵발전소와 석탄발전소, 그로부터 전기를 실어나를 송전탑을 모든 산등성이에 꽂으려 하고, 제주-성주-군산-평택으로 서쪽 라인을 따라 군사기지 벨트화가 더욱 촘촘하게 차곡차곡 진행되고, 중부지역은 수도권과 가깝다는 이유로 폐기물 처리장과 유해시설을 다루는 공장이 별다른 제재 없이 난립하고 있었다. 공공의 이익을 내세우며 추진되는 개발사업의 실체는 지역/주민들에 대한 착취와 수탈이었다. 권력과 자본이 집중된 도시에서 때론 좀 더 편리한 삶을 위해서라며, 때론 돈벌이의 기회라 여기면서 묵인하거나 동조해온 과정 속에서 모든 고통과 책임이 지역에 전가되고 있었다. 정치와 기업, 공권력의 합세 속에서 지역이나 사업의 명칭은 달라도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판박이처럼 닮았다며 “제국주의가 멀리 있는 게 아니더라”는 순례단 활동가의 말이 망치처럼 내리꽂혔다.

수많은 이슈 속에서 작은 지역, 적은 사람들이 겪는 일들은 주목되지 않고, 오래된 투쟁은 더 이상 새롭지 않은 ‘낡은’ 것처럼 여겨지면서 세상의 무관심, 정치의 무책임 속에 투쟁현장마다 외로운 시간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 시간 한 켠에 찾아든 봄바람이었다. 분하고 억울하고 무엇보다 부당하기에 결코 투쟁을 멈추거나 끝낼 수 없는 사람들의 얼굴을 새기고 ‘만리장성’을 쌓을 만큼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순례단은 그간의 여정이 끝없이 고통을 마주하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크나큰 환대를 받는 시간이기도 했다고 전해줬다. “그저 하루 충실하게 최선을 다해 귀 기울이는” 날들은 순례단에게는 몇 곱절이나 되는 삶들을 만나고 살아가는 여정이었다. 봄바람이 만난 투쟁현장들에도 고립감을 잠시나마 떨쳐내며 ‘곁’이 되어준 연대의 순간이었을 듯싶다.

‘보수’와 ‘진보’를 자처하는 기성정치권력에 우리의 삶과 미래를 맡길 수 없음은 분명하지만,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세상이 더욱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들기도 했다. 그때 순례길에 나선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매일매일 빼곡하게 순례를 다니고 있는 소식을 접하며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언젠가 갑자기 도래하는 순간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곳에서 쌓고 있는 시간이고 짓고 있는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 평화, 평등, 존엄을 지키기 위해 계속되는 투쟁들은 그렇게 다른 세상을 향하는 길을 이미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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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상을 지어갈 길 위에 함께 서서

그렇게 다른 세상을 함께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모이고 얼굴을 맞대며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시간, 순례가 마무리되는 4월 30일 봄바람 행진과 문화제는 그러한 바람 속에서 준비되었다. 햇살은 따뜻하지만 바람은 대차게 부는 날이었다. 수많은 집회가 도심 곳곳에서 동시에 열리기도 한 날, 용산에서 출발해 종로로 향하는 행진에 얼마나 사람이 모일지 걱정했던 게 무색할 만큼 길고 긴 행렬이 이어졌다.

차별금지법 제정 쟁취를 위해 농성하며 만든 430개 평등의 고깔모자를 나누어 쓴 사람들, 군비증강과 군사훈련으로 지속되어온 전쟁연습을 멈추고 평화의 바람이 나부끼길 바라며 바람개비를 든 사람들, ‘깨끗한’ 에너지인 양 포장하지만 절대 사라지지 않는 핵발전소의 방사능폐기물을 상징하는 드럼통을 맨 사람들, 일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이들을 기억하며 영정을 든 사람들이 공존과 평화, 생명을 상징하는 거대한 상징물들과 함께, 풍물패의 흥겹고 신명나는 소리를 따라 행진하면서 한데 어울리고 춤추며 노래하고 외쳤다.

그 기세를 몰아 이어진 문화제에서는 순례단이 만났던 현장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생명의 땅을 사라지게 하는 공항과 발전소,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이야기가, 삶의 터전을 밀어버리며 전쟁기지로 만드는 군사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나를 구성하는 여러 정체성에 위계를 부여하는 차별의 구조를 깨고 내가 나로서 살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비정규직이라서 하청노동자라서 일하다 죽고 차별받는 세상은 이제 그만이라는 선을 긋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귀 기울여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러 지역과 의제로 저마다 지켜야 할 자리가 있지만 따로 동떨어져 각각 해야 하는 투쟁이 아님을, 다른 세상을 지어가고자 하는 우리가 서로 만나고 모이면서 계속 열어가고 이어져야 할 길 위에 함께 서 있음을 떠올리고 새겼다.

계절은 바뀌어 가고, 우리의 삶과 미래는 안중에도 없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다. 더욱 단단하게 서로를 받혀주고 밀어주고 기대어주면서 싸워갈 시간이 이어질 것이고 몹시 고되고 힘들겠지만, 외롭거나 두려운 마음은 덜할 것 같다. 다른 세상을 향해 지금도 저마다의 자리를 지키면서 따뜻하지만 대차게 불고 있을 봄바람을 떠올리며 더욱 크게 그 바람을 일으킬 날을 기다리고 싶다.

* 봄바람 순례 소식에 기록으로 연대해온 영상활동가들이 모여 투쟁현장들을 함께 잇는 미디어프로젝트를 추진했고 5개 섹션 16개의 단편이 제작되었다. 유튜브에 계속 업로드해갈 예정이며, 지역과 현장에서 상영회도 추진해갈 예정이다. 많은 분들과 함께 보면서 봄바람을 이어가길 바란다. https://bit.ly/봄바람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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