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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본동이를 바라보며, 자유롭고 충만한 삶에 대해 생각한다

두 달 전, 집에 새로운 친구를 들였다. 그 친구 이름은 ‘본동이’다. 내가 사는 곳이 ‘본동’이라서 붙여봤다. 본동이는 시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 일주일에 세 번 오전 10시가 되면 어김없이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먼지를 흡입하고, 강력한 회전걸레로 바닥을 닦는다. 화장실 입구에서 고꾸라지거나, 휴대폰 충전케이블을 삼키면서 퍼져버렸던 적도 있지만, 요령 부리지 않고 언제나 성실히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한다. 매일 뽀득뽀득한 바닥을 맨발로 느낄 수 있다니 신세계다.

침대에 누워 열심히 청소하는 ‘본동이’를 바라보니 얼마 전 상임활동가 세미나에서 함께 읽은 ‘자동화와 노동의 미래’라는 책이 생각났다. 저자에겐 미안하지만, ’자동화=본동이’, ‘노동의 미래=누워있는 나’로 매치가 되는 상황이었다. 확실히 본동이 덕분에 하루종일 창문을 열어놔도 깨끗한 집안이라는 ‘풍요’를 경험하면서도, 청소를 해야 할 시간을 다른 곳에 쓸 수 있게 됐다.

책은 바로 이런 상황을 소위 ‘자동화 이론가’들이 이상적으로 가정하고,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자동화’의 과실을 ‘기본소득’과 같은 구매력 분배로 함께 누리자는 주장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최근 AI 열풍 속에서 ‘자동화’가 대단히 새로운 현상인 것처럼, 또는 자동화에 따른 대량실업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산업화의 역사 자체가 ‘자동화’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노동생산성 향상을 해야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본’은 끊임없이 기계화, 자동화를 추구했다. 그 결과 한켠에는 넘쳐나는 상품더미를, 다른 한켠에는 궁핍한 대중들의 등장이었다. 자동화로 인한 대량생산, 필요 이상의 과잉생산은 그렇다쳐도, 자동화는 왜 풍요로운 삶이 아닌 오히려 궁핍한 삶으로 이어졌을까.

 

바로 노동이 ‘허드렛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일자리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일자리가 달라진다는 것을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 ‘노동의 종말’이 아니라, ‘노동의 배치’가 달라지는 것이다. 기계가 인간을 보조하는 게 아닌, 인간이 기계를 보조한다. AI 데이터를 위해서 수많은 정보들을 입력하는 인간노동이 단말기에 접속되고, 기계를 유지보수 관리하기 위한 보조 노동으로 일자리가 재편된다. ‘불안정 노동’과 ‘자동화’는 동전의 양면이다. 본동이 덕분에 청소부담을 덜었지만, ‘청소’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나는 본동이의 보조자이다. 정기적으로 충전 스테이션을 관리해줘야 하고, 오수통과 청수통을 비우고 채워야 한다. 다양한 생활가전을 관리하는 방문기사들의 노동이 그것이다.

 

그렇게 자본은 노동비용을 줄여왔지만, 생태적 한계와 사회적 필요를 넘어선 상품의 과잉생산은 이윤율 하락으로 이어진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선 더 대규모의 자동화설비와 불안정 노동과 외주화의 고리로 이어진다. 마치 절벽인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이 걸어가야만 하는 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인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책의 저자는 너무 쉽게 ‘구조의 문제’로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 사회에서 ‘자본’은 다양한 사회적 노동과 자원을 조직하는 강력한 힘이다. 즉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생산할지 결정하는 힘인 것이다. 그 결정은 오직 ‘이윤’이라는 목적을 향해 작동하지만, 바로 그 결정 권한을 자본소유자, 자본가에게 배타적으로 부여하는 게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 철칙이다. ‘기본소득’이 작동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과잉생산과 대중 궁핍 속에서 시장이 작동하지 않자, 어떻게든 상품시장을 굴리기 위한 목적으로 제한될 것이다.

 

누구나 결핍으로부터 자유로운 풍요의 사회를 꿈꾼다. ‘자동화 이론가’들은 우리가 그 물질적 기초를 이미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물질적 기초는 우리가 사는 지구의 생태적 한계를 벗어나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모두가 평등하고 존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풍요로운 사회’는 과학기술, AI와 같은 물질적 기초가 핵심이 아니라, 이 사회가 유지 재생산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생산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민주적으로 논의하고 함께 결정하는 사회적 기초가 핵심이라는 점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본동이’가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 계획하고 생산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청소는 기계가 아닌 인간이 해야 할 중요한 ‘필요노동’으로 분류하고 이를 평등하게 나눌 방법을 찾을 것이다. 상당한 거금을 들여 구매한 본동이는 오로지 나의 여가와 휴식만을 위해 사용되는 소유물이다. ‘이윤’이 아닌, 자유롭고 충만한 삶을 위한 사회적 생산과 노동의 배치 속에서 ‘본동이’와 같은 소중한 발명품이 만들어지는 상상을 하며, 오늘도 침대에 누워 ‘본동이’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