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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교육, 인권운동의 바오밥나무 될까?

가능성과 한계의 경계에 선 인권교육

인권교육이 우리 사회에서 실험된 지 10여년. 몇몇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국내에서 씨앗을 뿌리기 시작한 인권교육은 이제 그 영역을 성큼성큼 확장해 가고 있다. 인권교육에 초대장을 내미는 현장도 다양해졌다. 교육을 담당하는 활동주체들도 다양해졌다. 미처 인권운동의 고민과 실천이 미치지 못한 곳에서도 인권교육은 싹을 틔운다. 심지어 경찰도 인권교육을 ‘한다’.


인권교육, 인권운동의 바오밥나무 될까

하지만 인권운동에 튼튼히 뿌리박지 못한 인권교육의 확산은 인권교육의 개념과 방향성에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인권교육을 착한 사람 만드는 교육 정도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도 많다. 인권교육이 다른 실천을 대체하면서 손쉬운 운동의 방편으로 활용되는 장면도 종종 목격된다. <어린 왕자>의 작은 별을 뚫고 자라나는 바오밥나무처럼 인권교육이 자칫 인권운동을 침식시킬 우려도 있는 이 때, 인권운동에서 인권교육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인권교육 하면 사람들은 어떤 말들을 떠올릴까?

▲ 인권교육 하면 사람들은 어떤 말들을 떠올릴까?



안타깝게도 인권교육에 대한 이해와 실천이 가장 절실하면서도 기대만큼 뿌리내리지 못한 곳이 바로 인권운동 내부인 듯하다. 인권교육과 인권운동 사이엔 보이지 않는 막이 존재한다. 인권운동의 기획 속에 인권교육이 통합되지 않는 것은 물론, 인권교육을 도구적으로만 대하는 태도도 자주 접할 수 있다. 인권교육에 대한 오해를 털고 ‘인권운동으로서의 인권교육’을 자리 잡히게 하는 일이 절실한 이유다.


인권교육 한다고 세상이 바뀌냐고?

인권교육이 가진 힘을 둘러싸고 엄청난 이해의 격차가 존재한다. 마치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양 인권교육의 가능성을 극대화시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인권교육만으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며 인권교육을 부차적으로 취급하는 이들도 많다. 물론 인권교육만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인권교육 없이 세상이 바뀌지도 않는다.

인권교육은 단지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인권에 대한 교육’(앎)이 아니다. 인권교육은 인권을 위한 실천, 삶을 변화시키는 열망을 기르기 위한 교육이다. 또한 인권을 존중받는 경험, 곧 인권을 통한 교육을 경험하면서 인권적인 태도와 감수성을 고양하는 과정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삼박자가 고루 갖춰져야 비로소 인권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양한 소수자들을 5가지 은유로 표현한 활동 자료. 이 과정을 통해 소수자들의 입장과 마음과 공감하는 길을 만난다.

▲ 다양한 소수자들을 5가지 은유로 표현한 활동 자료. 이 과정을 통해 소수자들의 입장과 마음과 공감하는 길을 만난다.



인권교육의 핵심은 ‘권한 강화’에 있다. 인권이 열망하는 세계와 척박한 인권현실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바로 인권교육의 목표다. 개인과 집단으로서 사회적 약자/소수자들의 권한 강화는 인권운동이 추구하는 사회변화를 위한 토대일 뿐 아니라, 역동적인 사회변화의 한 과정이기도 하다. 권리주체로서 자기 목소리를 되찾을 때, 자신의 삶과 다른 이들의 삶을 옥죄는 질서에 대항하는 연대의 필요성을 자각할 때, 세상은 이미 바뀌고 있다. 인권교육만으로 모든 변화를 일구어낼 수는 없지만, 삶/관계/운동의 기초인 인권교육 없이는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인권운동의 기획 속에 인권교육은 적극적으로 통합될 필요가 있다.


감동 만빵의 인권강연 vs. 참여자가 주인공인 인권교육

누구에게나 커다란 영감과 감동을 준 강연이 있을 것이다. 그만큼 청중을 사로잡는 강연자의 입심과 날카로운 시선은 많은 이들을 변화시킨다. 강연은 수많은 청중을 대상으로도 효율적인 교육이 가능하다. 인권강연도 훌륭한 교육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강연은 간혹 손을 든 청중의 용기로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경우를 제외하면 청중을 수동적 위치에 묶어둔다. 교육의 자원은 강연자의 지식과 경험이지 청중의 것이 아니다. 청중들이 각자 어떤 생각을 품고 돌아갔는지,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확인할 길이 없고,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 강연은 대개 1회로 끝나니까. 그래서 아무리 감동 넘치는 강연이었다고 해도 막이 내린 다음에는 강연자와 청중 모두에게 허전함이 남는다. 바로 이러한 점들에서 강연은 인권교육과 구분된다.

인권교육에서 주인공은 강연자가 아니라 교육에 참가한 이들이다. 인권교육의 가장 중요한 자원은 참가자들의 생각과 경험이다. 인권교육은 참가자들이 기꺼이 자신의 생각과 삶살이를 풀어내고 소통하는 과정이며, 그래서 참가자들이 도움닫기를 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다. 인권교육이 인권강연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권교육만이 가진 힘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노동과정에서 당면하게 되는 문제점을 상황극으로 표현하고 있다.

▲ 청소년들이 노동과정에서 당면하게 되는 문제점을 상황극으로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인권교육이 강연을 원천 배제하지는 않는다. 활동 경험→토론→정보제공→분석→종합으로 이어지는 교육의 과정에서 강연은 종합을 위한 기법으로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의 강연은 정답을 알려주기 위한 과정이 아니다. 참가자들을 위해 어떤 교육이 뒤를 이어야하는지, 어떤 생각할거리가 남아있는지를 정리하기 위한 종합이다.


인권교육, 놀이와 재미의 경계를 넘어

인권교육을 가벼운 놀이 정도로 치부하는 것도 인권교육에 대한 대표적 오해 가운데 하나이다. 본격적인 교육이나 토론에 앞서 분위기 띄우기용 놀이 정도로 인권교육을 바라보는 이도 있다. 왁자지껄 떠들면서 인권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재미있는 ‘기법’ 정도로 인권교육을 도구화하기도 한다.

물론 인권교육은 재미있다. 인권교육이 재미있는 이유는 참여할 수 있고 북돋움의 경험을 제공받기 때문이다. 그 재미는 가벼운 놀이가 주는 기쁨 이상이다.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무겁게, 때로는 상상의 나래를 펴고 때로는 무거운 현실을 분석하고, 때로는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면서 인권교육은 ‘좁은 의미의 놀이와 재미의 경계’를 넘어선다. 스스로 뛰어놀고 함께 노는 사람들과 교감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의미의 놀이와 재미를 창조해낸다.

인권교육이 추구하는 살아뛰는 인권감수성, 자율적 행동능력, 비판적 인권의식은 역동적 참여를 통해서만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인권교육에서 참여적 방법론, 새로운 놀이를 통한 교육은 단지 교육 효과를 높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인권교육의 본질적 요소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역동적 참여를 통해서만 진정한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참여를 통해서만 인권교육의 목표인 권한강화도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해와 오해의 경계에서, 가능성과 한계의 경계에서 인권교육은 흔들리고 있다. 인권운동은 인권교육을 자기 운동의 기획 속에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 인권교육과 함께 가는 인권운동은 새로운 운동의 가능성을 개척할 수 있을 테고, 인권운동과 함께 가는 인권교육은 인권교육의 제도화와 왜곡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