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가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 아래 인권정책계획)을 마련 중이다. 법무부가 정부 각 부처의 의견을 수렴하여 인권정책계획 초안을 작성했고, 각계의 의견을 수렴 중에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인권정책계획 권고안을 발표한지 1년도 넘어서 나온 초안인데, 사실 내용은 매우 실망스럽다. 한 신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인권정책계획 초안은 마지못해서 낸 모양새다. 정부 각 부처가 인권정책계획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고, 정부의 정책이 인권적 관점에서 조율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지난 1993년 6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린 유엔 세계인권회의에서는 비엔나선언과 행동계획을 채택했다. 여기에서는 각국에 국가인권위원회를 설치할 것과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을 수립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런 권고를 받아서 한국은 국가인권위원회를 설치하였고, 국가인권위원회는 2007년부터 2011년 사이 5년간의 인권정책계획 수립을 권고하는 안을 지난해 1월 발표하고, 정부에 전달하였다. 지난 2001년 5월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아래 유엔사회권위원회)가 2006년 6월까지 인권정책계획 수립에 대해 보고하라고 권고한 것에 따른 의무이기도 하다. 2005년까지 인권정책계획을 작성하여 유엔에 보고한 국가는 1993년 호주를 시작으로 20개국에 달하고 있었으니 유엔의 구성원인 대한민국의 인권정책계획 수립이 아주 늦은 것은 아니지만, 유엔사회권위원회가 제시한 시한은 맞추지 못했다.
본격적인 개발단계에 접어든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인권정책계획은 “국가의 인권정책의 청사진으로서 인권과 관련된 법·제도·관행의 개선을 목표로 하는 범국가적인 인권정책 종합 계획”이다. 다시 말하자면 국가의 인권의 증진과 보호를 위한 ‘행동계획’을 말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2년 4월에 작업을 시작하여 인권정책계획 수립을 위한 인권 기초현황 조사를 벌였고, 실무팀을 구성한 후 추진기획단을 구성하고, 정부 각 부처와 인권정책관계자협의회를 구성하여 논의하였으며, 인권단체의 의견도 수렴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국가인권위원회조차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부족으로 경로를 잘못 설정하였다가 수정하는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다. 이러한 결과 국가인권위원회는 약 4년간의 작업 끝에 정부에 인권정책계획 수립을 위한 권고를 하기에 이르렀고, 정부는 이를 받아서 법무부에 인권국을 신설하고 인권국이 인권정책계획 개발단계의 실무를 총괄하도록 했다. 그런 결과가 오늘 우리가 보는 법무부 인권정책계획 초안이다.
말하자면 국가인권위원회가 준비단계에서 권고안을 만들어 정부에 권고를 한 것이고, 정부는 이를 기초로 인권정책계획을 개발하는 중에 있다. 이후에는 인권정책계획을 이행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그 후 모니터링과 평가의 단계를 밟게 된다. 따라서 법무부가 작성 중인 인권정책계획은 곧바로 종합적인 정부의 인권정책으로 추진된다는 뜻이다.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대응, 지금이 중요
인권단체들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정책계획 권고안 수립단계에서 의견을 적극적으로 제시했다. 도리어 초기엔 국가인권위원회가 인권단체들의 의견 수렴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한 측면이 강했지만, 나중에는 인권단체들의 광범한 의견을 수렴하여 의견서를 작성하였다.
정부가 인권정책계획을 개발하는 단계에서 인권단체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단지 인권단체들의 의견을 인권정책계획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경제계나 보수적인 시민단체들과 비중을 맞추어서 의견을 수렴하는 정도로는 안된다. 법무부는 지금까지 두 차례의 공청회를 통해서 마치 객관적으로 의견을 수렴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인권정책계획을 둘러싸고 찬반양론이 분명 존재하므로 일견 공정한 과정인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시민단체들이 인권적인 관점에서 활동하고 있지는 않고 때로는 반인권적인 활동을 전개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모든 시민단체들의 의견을 동등하게 수렴한다는 것은 오히려 형평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법무부는 인권에 대해 적대적인 단체들의 의견까지 수렴하겠다는 모습을 보여왔다. 하지만 인권에 반하는 활동을 하고, 인권의 증진을 위한 정책 수립에 반대해온 단체들에게 향후 5년간의 국가의 인권증진과 보호를 위한 정책 수립을 위한 의견을 듣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수립의 의의에 반하는 것이다.
이대로는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법무부는 그간 몇 차례 정부 관계자들과 인권정책계획 수립을 위한 논의를 진행했다. 하지만 이번 인권정책계획 초안은 5년 동안 한국 정부의 인권증진과 보호를 위한 정책으로서는 수치스러울 정도로 조악한 것이다. 정부 각 부처는 인권 증진의 의지를 가지고 임하기보다는 마지못해 한 흔적이 역력하다.
또 이를 제대로 작성하도록 지휘하고 감독할 책임이 있는 법무부장관과 국무총리, 대통령은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고, 인권정책계획이 제대로 개발되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독려했는지 의심스럽다. 오히려 친기업적인 발언을 내뱉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법무부장관의 그간의 행태를 봤을 땐,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못할 바도 아니다. 청와대를 포함해 주무부처의 책임자인 법무부장관과 각 부처의 장관들이 머리를 맞대고 국제인권조약들뿐만 아니라 헌법의 기본권 조항들에 나타난 인권의 실현을 위해서 국가의 정책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걸맞는 구체적인 법과 제도, 관행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을 개발하고 그에 따른 예산과 조직을 뒷받침하도록 해야 한다.
인권은 외교적 수사도 아니고, 장식물도 아니다.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은 현대사회에서 인권을 실현하는 국가모델의 한 전형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즉 정부의 인권실현의 의지가 말로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계획으로 이어질 수 있느냐를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인 평가 자료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초안은 ‘인권실현의 의지’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초라하고 오히려 반인권적이다. 졸속적으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인권오름 > 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