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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도래

[기획] 차별금지법안 뜯어보기 (6) 차별사유 삭제의 의미

지난 10월 2일 법무부가 차별금지법안을 입법예고했다. 성별, 장애 등을 이유로 고용 등 다양한 차별영역에서 벌어지는 차별행위를 금지하면서 피해자 구제 절차를 담고 있는 이 법안은 최초의 종합적인 차별금지법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지만 다양한 소수자들의 경험을 온전하게 반영하지 못할 가능성과 함께 성적지향 등 다수의 차별사유를 제외함으로써 차별금지법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 또한 존재해 우려를 더하고 있다. <인권오름>은 그동안 반차별 운동을 해온 활동가들의 연속기고를 통해 정부의 차별금지법안이 과연 다양한 ‘소수자들’의 차별 현실을 바꾸고 반차별 의식을 확산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지 점검한다. <편집인주>


한 소동이 있었다. ‘차별금지법’이라는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재계와 극우 개신교 등 기득권층의 사회적 ‘압력’과 ‘협상’에 의해 성적 지향, 학력, 병력, 가족형태 등 7개 항목이 삭제된 사건이 그것이다. 이 소동이 없었다면 이 법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그 법의 가치를 알아보는 몇몇 인권활동가들과 국가인권위원회, 그리고 한국의 ‘사례’를 통하여 비서구국가에 인권의 제도화를 퍼트리고자 하는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에서나 법의 통과를 환호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소동이 갑자기 커지면서 우리 사회,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이라는 나라의 통치성과 시민권 형식을 드러내는 ‘사건’이 되고 말았다. 이 소동은 논란과 저항, 대결을 피해갈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차별금지법 파동은 삭제된 7개 항목이 다시 들어가거나, 혹은 빠지거나, 혹은 법 자체가 통과되지 않더라도 이화여대 조순경 교수의 말처럼 ‘잘된 일’이 된 셈이다.

법무부 차별금지법안에 반대하는 성소수자들이 19일 서울 광화문 사거리 건널목에서 무지개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출처] 차별금지법 대응 및 성소수자 혐오 차별저지를 위한 긴급 공동행동(www.lgbtact.org)

▲ 법무부 차별금지법안에 반대하는 성소수자들이 19일 서울 광화문 사거리 건널목에서 무지개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출처] 차별금지법 대응 및 성소수자 혐오 차별저지를 위한 긴급 공동행동(www.lgbtact.org)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이후 ‘인권의 제도화’라는 이름으로 봉합되어 있던 우리 사회의 적대가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만 생기면 국가인권위원회로 쪼르르 달려가는 것에서 벗어나 이제 적대와 정면으로 마주 대해야 하는 ‘정치’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봉합’의 시간 동안 모든 적대를 다루는 방법은 인권에의 호소라는 이름으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청원’하는 행동으로 깔대기처럼 환원되었었다. 이제 모든 정치를 무력화한 이 봉합의 실밥이 터져버렸다. 열린 ‘정치’의 시간 속에서 감내해야할 고통은 크겠지만 말이다.

‘인권’이라는 봉합의 시간이 갔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성소수자도, 이주노동자도 아니라 국가인권위원회이다. 반면 이번 사건의 승자는 극우 개신교 세력도 기득권 재계도 아니고 ‘정치’ 그 자체이다. 이 글에서는 이런 ‘정치’의 재구성을 위하여 이번 사건이 우리 사회의 통치와 시민권 형식이라는 맥락에서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를 먼저 물어보고자한다. 그리고 지금 적대의 형식에서 가려지고 드러나고 있는, 펼쳐지고 있는 정치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점검해 보고자 한다.

무능한 통치, 혹은 통치로부터의 배제

특히 근대 사회에서의 통치가 푸코의 말처럼 개인과 특정 인구집단의 몸에 대한 지식에 입각하여 작동하는 권력 행위라고 한다면 차별금지법이야말로 생체권력(bio-power)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생체권력은 국가가 특정한 인구집단의 특징을 이러저러하게 파악하는 지식-즉 인권취약집단이라거나 차별에 노출된 집단이라거나 혹은 비생산적 집단이라거나-에 입각하여 앞으로 이들을 특수하게 취급-즉 차별을 해서는 안된다거나 이들과 접촉해서는 안된다거나-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또한 국가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른 인구집단에게도 국가의 통치에 준해 이들을 취급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즉 자신이 구성한 그 인구집단에 대한 지식과 그 지식에 기반을 둔 처리방식을 다른 인구집단들이 ‘진리’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한 특정인구집단에 대한 통치에서 다른 인구집단 모두의 행동에 대한 통치로 스스로를 확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번 사건의 생체권력이 한국의 통치성의 어떤 특징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일까? 또한 통치성 차원에서 이 사건의 효과는 무엇일까?

차별금지법안에서 7개 항목이 빠지게 된 것에 대한 법무부의 해석을 들어보자. 이들에 따르면 원안의 20개 항목은 지나치게 많이 망라되어 있다고 판단하여 예시 조항으로 처리하기로 했다고 한다. 명시적으로 열거하는 항목의 선정은 1)둘 이상의 국내법에서 차별 금지 사유로 규정하거나, 2)세계 인권 선언 및 자유권 규약에 차별 금지로 규정된 사유로 한정하고 나머지 사유는 ‘등’에 포함되는 예시 규정이라는 것이 법무부의 설명이다. 따라서 명시되지 않았다고 차별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맞는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법무부의 주관적이고 낙관적인 해석과는 달리 이 성적 지향 등이 ‘등’에 들어간 것을 극우 개신교측과 기득권 세력은 자신들의 승리로 해석하고 있다. 법무부의 해석과는 달리 실제로 이들은 이제 성적 지향 등은 차별을 받거나 공공연히 공격하고 비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공공연하게 이들은 앞으로 개신교에서 설립한 학교나 언론 매체를 통해서 성소수자들의 비도덕성과 ‘죄인됨’을 보다 더 철저하게 다루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성적 지향 등이 항목으로 명시되어 있다가 ‘등’으로 빠지는 ‘통치 행위’의 효과가 이렇게 될 것이라는 점을 법무부는 몰랐을까? 이것을 몰랐다면 우리가 한국의 통치성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유일한 점은 그것이 지독히 무능하다는 점일 것이다. 통치는 그저 정책을 하나 세우고 집행하고 마는 그런 행위가 아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근대 사회에서 통치는 특정한 인구 집단의 신체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생체권력을 통해서 작동한다. 따라서 통치권력은 그 인구집단이 전체사회에서 어떻게 취급을 받는지, 그리고 그들이 법의 영역에서 가시화(항목으로 드러나는 것) 혹은 비가시화(‘등’으로 처리되어 숨져지는 것)하는 자신의 행위로 인해 다른 인구집단으로부터 어떤 반응을 불러오는가에 대한 치밀한 계산을 전제하였을 경우에만 작동할 수 있다.

국가의 통치행위가 사회적 갈등과 적대를 조장하거나 드러내기보다는 은폐하고 봉합하려는 힘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 왜 푸코가 권력을 그저 권력이라고 하지 않고 ‘지식-권력’이라고 불렀는지를 알 수 있다. 지식은 통치를 위해서 그 집단뿐만 아니라 그 집단을 어떻게 다루어야 ‘사회가 가능해지는가’에 대한 전략과 기술들을 포함하는 지식이기 때문에 권력이며, 권력은 그 지식을 축적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작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든 권력은 그의 말처럼 ‘지식-권력’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논란의 핵심이 되는 성적 지향과 7개 항목이 들어갔다 나오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한국의 통치 권력은 이런 최소한의 지식을 축적하지도 생산하지도 못하는, 그에 기반을 두어 치밀하게 작동하고자하는 ‘지식-권력’에 대한 의지도 없는 무지몽매한 ‘무식한’ 권력이라는 점이다.

오히려 이들 7개 항목, 특히 성적 지향은 사회의 공격으로부터 대응을 할 만한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의 존재만 대대적으로 노출되었다. 아직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고 협상할만한 힘이 되지 못한 자를 보호하기는커녕 외부적으로 노출만 시킨 셈이다. 따라서 그것이 적대이건 협상이건 헤게모니가 어느 한쪽으로 쏠릴 것인가는 너무나 명확하다. 국가는 이들의 존재를 노출시킴으로써 권력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을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이것이 부시 행정부처럼 국가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다시 한 번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통치성의 실패이다.

이 말을 반대로 뒤집으면 빠진 7개 항목에 해당하는 인구집단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차등화된 집단인지를 통치권력 자체가 개신교 등 다른 기득권 세력에게 예시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즉, 이들 7개 항목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통치 권력이 최소한의 지식을 갖추고 정교하게 다룰 필요조차 없는 집단이라는 것을 스스로 예시해버렸다. 이들은 이렇게 다루어도 된다는 것을 법무부라는 통치 권력 스스로가 법이 생기기도 전에 미리 보여준 셈이기 때문이다. 이번 소동에서 가장 나쁜 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또한 모든 국민에게 아무런 차이와 차별없이 동등하게 가해지는 권력-비록 단 한 번도 제대로 시행되어본 적은 없겠지만-이라는 근대 권력의 신화를 스스로 붕괴시켜버렸다. 이게 이번 사건에서 가장 좋은 점이다. 시민, 혹은 잠재적 시민이라고 착각하고 있던 사람들이 자신은 국민 내부에서 망명신청자라는 ‘비-시민’의 지위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시민과 비-시민, 언제나 차별적으로 서열 지워지는 ‘국민’의 내부

모든 통치 행위는 사회 권력 관계 안에서의 타협과 협상의 소산이다. 따라서 타협과 협상의 과정에서 법 조항은 새로 생길 수도 있고 삭제될 수도 있다. 이것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흔한 일이다. 이 타협과 협상의 과정은 권력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한 사회의 권력 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협상에서 배제되거나 밀려난 세력은 이를 갈면서 스스로의 세를 더욱 키워 다음에 도전한다. 그것이 영향력이건 숫자이건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문지방을 통과해야만 법의 우산 밑으로 들어가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 시민권은 모두에게 약속된 권리이지만 지연되고 유예된 권리이다. 당신이 속한 특정한 인구집단이 사회 내에서 충분한 힘과 숫자를 가지는 한에서 권리가 보장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권리에 대한 약속의 유예로 권리를 얻고자하는 세력은 체재 내 경쟁을 펼쳐야한다. 자강을 통해 이 문턱을 넘어 법에 명시된 사람은 시민이며, 아직 그 문턱을 넘지 못한 사람들은 ‘덜-시민’, 혹은 잠재적 시민이며, 그 문턱을 장기간 도저히 못 넘을 것 같은 사람들은 ‘비-시민’으로 분류된다.

이로써 통치권력 스스로 ‘국민’이라는 단일 기표의 신화 밑에서 특정 인구 집단들을 그 집단의 권력에 따라 어떻게 차등화 서열화하여 다루고 있는지를, 즉 통치권력은 국민을 ‘시민’과 ‘비-시민’으로 나누고 차등적으로 다루는 권력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것을 같은 ‘피랍’사태에서도 전혀 다른 접근을 택한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와 소말리아 ‘어부’ 피랍 사태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통치권력은 같은 피랍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처한 다양한 맥락과 정치적 효과에 의한 치밀한(!) 계산에 의해서 움직이거나 안 움직이거나 한다. 그리고 그 정치적 배려의 차이가 각 집단의 시민됨을 차등적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즉 ‘더-시민’이 있고, ‘덜-시민’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번에 빠진 7개 항목의 사람들은 ‘덜-시민’도 아니고 아예 ‘비-시민’이다. 왜냐하면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움직이고 안 움직이고를 정하는 것 자체가 맥락과 효과, 그리고 권력관계에 대한 치밀한 계산에서 나누는 것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통치 행위의 정교한 고려 바깥에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성적 지향’ 등 7개 항목에 속하는 인구집단은 ‘국민’이기는 하지만 ‘비-시민’이다.

무엇보다 이들 ‘비-시민’은 인권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명시화된 차별 금지의 대상에서 배제되어 ‘등’에 배치됨으로써 이들의 인권은 국가기관으로부터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입증해야하는 것이 된다. 즉 ‘인권의 주체’가 아닌 ‘논란의 대상’이 되는 셈이다. 이번 차별금지법이 7개 항목을 빼는 과정의 담론적·사회적 효과는 이처럼 차이의 차별을 명시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몰고 올 구체적 파장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미 개신교쪽에서 공공연하게 밝힌 것처럼 성적소수자 등에 대한 공개적인 모욕, 멸시, 공격, 폭력이 충분히 예상된다. 이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이미 차별금지법을 차별허용법으로 사용하려고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등’에 속한 인구집단은 한편에서는 상시적으로 이들의 폭력에 시달리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이 ‘폭력’임을 증명해야하는 이중고에 처하게 된 셈이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자동적으로’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왜 자신이 보호 받아야 하는지를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는 점에서 망명신청자(Asylum seeker)와 처지가 똑같다. 망명신청자들은 오랜 기간 보호소에 머무르며 자신들이 왜 망명을 와야 했고, 자신이 지금 있는 국가는 왜 자신을 보호하고 망명자로서 인정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국가가 하는 일은 망명신청자를 ‘검사’하는 일이다. 망명신청자들처럼 7개 항목에 해당하는 사람들도 스스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점에서 국민 내부의 망명신청자, ‘비-시민’이 되어버린 셈이다.

정체성의 정치, 그것으로 충분한가?

이런 상태에서 성소수자들을 선두로 해서 발 빠른 움직임이 있는 것은 아주 다행한 일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억압받고 차별받는 정체성에 기반하여 조직을 꾸리고 다양한 저항을 조직하고 있다. 홈페이지(www.lgbtact.org)도 만들고 유엔인권이사회 초대의장의 초청강연에 스페인어 통역까지 데리고 가서 질문과 인터뷰를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한 시민사회의 각 진영에서도 발빠른 대응을 하고 있는데 이대 여성학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여성학회에서 긴급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것은 ‘학회’라고 하는 제도권 안으로도 이 논의를 가져가려는 긍정적인 시도일 것이다.

그러나 성소수자들을 중심으로 한 이런 발 빠른 대응의 의의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싶다. 이처럼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에 기반을 둔 정치를 통해서 그어지고 가시화되는 적대의 전선은 무엇이고 은폐되는 적대와 주체들은 누구냐는 점이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차별금지법의 전선이 ‘성소수자 대 극우(보수) 개신교’로 설정되어 한편에서는 성소수자들의 고립을 낳고, 다른 한편에서는 나머지 항목들의 비가시화, 투쟁에서의 주변화를 낳지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특히 병력이나 가족형태와 같이 ‘조직화’ 자체가 극히 어려운 ‘정체성’ 항목들의 경우 이 운동에서의 비가시화, 주변화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이밖에도 7개 항목에 해당하는 인구집단은 성소수자와 같이 정체성의 정치로 정체화가 가능한 범주부터 숫자와 역량의 문제에서 정체성은 있지만 집단화가 극히 어려운 집단, 그리고 학력처럼 정체성으로 정체화 되기보다는 정치-경제적 문제인 경우 등으로 나누어진다.

특히 학력의 문제에서 이번 차별금지법이 누더기법이 되는데 가장 크게 공헌하고 혜택을 받는 집단으로서 기업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성학회 긴급토론회에서 권김현영(이대 여성학 박사과정)이 잠시 지적했듯이 재계 역시 이번 차별금지법이 누더기가 되는 과정에서 배후에서 움직인 세력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용과 관련된 전 분야에 있어 차별 금지를 담고 있어, 사적 영역에 대한 과도한 개입일 뿐만 아니라 기업 운영의 자율성을 심대히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특히 연령과 학력 제한에 대해서 문제를 삼았다. 특히 학력에 기초해 고용에서부터 승진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차별이 횡행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학력 역시 삭제가 된 것은 지금의 저항이 정체성의 정치를 넘어서는 정치적 맥락에서 구성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력하게 증언하고 있다. 이것은 정체성의 정치로는 폭로되기는커녕 오히려 은폐되어버리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분명 인권의 이름으로 적대가 봉합되고 국가인권위원회 청원으로 우회되던 시대가 가고 정치가 도래하고 있다. 이 정치의 시간에 정체성의 정치에 머무를지 아니면 정체성의 정치를 넘어 ‘비-시민’들의 새로운 인권과 정치의 급진화를 이룰 것인지는 전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와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 달려 있다.
덧붙임

◎ 엄기호 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