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오름 > 인권으로 읽는 세상

[인권으로 읽는 세상] 혐오의 정치에 맞서기 위해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을 맞아

<편집인 주>

세상에 너무나 크고 작은 일들이 넘쳐나지요. 그 일들을 보며 우리가 벼려야 할 인권의 가치,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 질서와 관계는 무엇인지 생각하는게 필요한 시대입니다. 넘쳐나는 '인권' 속에서 진짜 인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나누기 위해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이 하나의 주제에 대해 매주 논의하고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인권감수성을 건드리는 소박한 글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때로는 촉촉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다가가기를 기대합니다.


2007년 10월 31일, 법무부는 자신이 입법 예고한 차별금지법안에서 ‘성적 지향’을 비롯한 7개 항목을 삭제했다. 17대 국회에서 벌어진 일이다. 먼 훗날 이것은 어떤 사건으로 기억될까?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아이다호데이, 5월 17일)’을 맞으며 문득 떠오른 질문이다.

무너지기 시작한 비차별의 원칙

당시 ‘동성애 차별금지법안 저지 의회선교연합’, ‘동성애허용반대국민연합’ 등의 극렬한 반대는 비차별의 원칙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댐에 구멍이 난 것처럼 ‘동성애 반대’가 봇물 터진 듯 확산되었다. 18대 국회에서는 법무부가 차별금지법 입법 자체를 포기했고 19대 국회에서는 민주통합당이 법안을 스스로 철회했다. 20대 총선에서는 ‘동성애 반대’를 정책으로 내건 정당이 등장했고 표를 얻기 위해 국회 다수석을 점하는 여야 양당 대표가 ‘동성애 반대’를 확약했다. 10여 년에 걸쳐 ‘동성애 반대’는 정치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개신교의 정치세력화 움직임은 그 중심에 있었다. 1990년대부터 한국 교회는 적극적인 정치세력화를 시도했다.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성장을 추구하면서 반공과 친미를 강조하는 결속을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97년 ‘바른나라정치연합’ 김한식의 대선 출마를 시작으로 매 총선마다 기독교 정당들이 등장했다. 2000년대 들어 이들은 ‘뉴라이트’ 세력과 함께 한국의 보수정치를 구성하는 핵심세력이 되었다. 특히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사립학교법 개정 등을 반대하면서 정치적 지향을 더욱 분명히 하게 되었다.

2007년의 차별금지법 제정 움직임은 이들에게 새로운 명분을 쥐어주었다. “나라의 위기와 국민의 고통과 불안”에 대한 기독교의 대응은 ‘건강한 가정, 건강한 나라’를 이루는 것이며 이를 위해 ‘사회 혼란을 조장’하는 세력을 심판하려 했다. 동성애에 대한 온갖 편견과 혐오가 활개를 펴기 시작했다. 말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학생인권조례, 서울시민 인권헌장 등의 제정을 물리력으로 저지하기 위해 폭력도 불사했다. 개신교 정치세력화를 위한 주체화는 “‘적’으로 해석된 ‘타자’에 대한 증오와 적대를 기반으로” 다져지게 된다.*

모호해진 혐오

이런 흐름에 반차별운동은 ‘혐오’라는 이름을 붙여왔다.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말이 혐오의 감정에 기대 공세를 펼칠 때 그것이 기대고 있는 혐오를 직감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혐오는 누구나 인지하는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그만큼 혐오의 문제는 모호해진 듯도 하다. 혐오가 문제라고 할 때 무엇이 문제인지 충분히 설명되지는 않는다.

사전적 의미의 혐오는 싫어하고 미워하는 감정을 뜻할 뿐이지만 모든 사회에는 ‘신체의 경계선’과 관련된 혐오가 존재한다. 배설물이나 체액, 시체와 같은 ‘원초적 대상’을 향한 혐오감이 그것이다. 그런데 사회적 현상으로 ‘혐오’가 등장하는 것은 ‘투사적 혐오’를 통해 어떤 집단에 혐오스러운 속성이 전가될 때다.** 이와 같은 혐오는 언제나 소수자를 겨냥했다. 그래서 많은 국제인권기준은 혐오를 문제 삼고 혐오표현이나 혐오범죄를 금지하기 위한 제안을 한다. 이때 금지되는 표현이나 범죄는 증오(hate)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혐오의 감정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소수자에 대한 증오와 차별을 선동하고 실행하는 폭력이라는 점을 문제 삼는다.

그런데 혐오가 사회 문제로 인식되는 만큼 차별에 대한 감각이 쌓이지는 않은 듯하다. 2013년 온라인 사이트인 일베(일간베스트)의 게시물들이 도마에 올랐다. 특히 광주민중항쟁의 피해자들을 모욕하고 ‘민주화’를 조롱하는 게시물들이 야당인 민주당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일베의 ‘혐오’에 소스라치게 놀란 사회는 혐오의 문제를 마치 일베의 문제로 여기기도 했다. 민주당은 일베 폐쇄까지 거론하면서 분노했지만 같은 해 차별금지법안을 스스로 철회했다. 혐오세력은 ‘혐오를 조장하는 세력’과 ‘혐오스러운 세력’을 동시에/모호하게 뜻하는 말처럼 사용되기도 했고, 혐오는 표현의 자유와 쟁점을 형성하면서 의제화되었다.

혐오의 정치

다양한 혐오가 ‘혐오’이므로 같은 문제인 것처럼 다루다 보면 자칫 문제가 흐려질 수 있다. 혐오는 “특정한 집단이나 정체성을 열등한 것으로 취급해서 배제하거나 억압해온 사회문화적인 배경과 맥락 속에서 가지게 되는, 특정한 가치판단이 전제된 태도와 감정”***이다. 혐오는 차별을 심화시키는 구조에 어떤 식으로든 연관된다. 그러나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차별의 다양한 모습에서 혐오의 기능이나 비중은 변화한다. 미국에서 ‘인종’분리정책이 ‘차별’로 인지되지도 못했던 시대에 그것을 지탱한 정서는 혐오다. 그러나 지금은 ‘인종’혐오범죄를 처벌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고 ‘인종’혐오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혐오가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자리잡기는 어렵다.

혐오가 사회 문제로 대두하기 전에도 ‘여성비하발언’, ‘장애인 비하발언’ 같은 것은 문제로 인식되었다. 우리는 ‘여성을 반대한다’는 말은 상상하지 못하지만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말에는 길들여진 사회를 살고 있다. 성소수자혐오는 극심하지만 차별을 인식하는 감수성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혐오가 차별을 용인하고 조장하며 그것에 대한 이성적 검토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때 무엇이 혐오인지를 지목하는 것으로 혐오는 사라지지 않는다.
혐오가 ‘싫은 것’이라면, ‘혐오의 정치’는 ‘싫은 것은 나쁜 것 또는 잘못된 것’으로 규정하며 구조적으로 배제하는 정치다. ‘혐오의 정치’는 성소수자를 사회가 보장하는 기본권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배제한다. 지급하기로 했던 사업 예산을 불용하고, 재단 설립 신청을 반려하고, 축제와 행진을 위한 장소 사용을 불허한다. 단지 성적 지향이 이성애가 아니라는 이유로 결혼제도를 이용할 수 없다. 표현의 자유는 위축되며 모이고 말하고 행동하기 위한 자원과 장소는 줄어든다. 혐오의 정치에 밀려 평등의 이념도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으로 삭제한 1990년 5월17일을 기념하여 매년 5월17일에 열리는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 날(아이다호 데이(IDAHO-International Day Against Homophobia & Transphobia) 홍보 웹자보<br />
<출처-행동하는 성소수자인권연대 홈페이지>

▲ 세계보건기구(WHO)에서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으로 삭제한 1990년 5월17일을 기념하여 매년 5월17일에 열리는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 날(아이다호 데이(IDAHO-International Day Against Homophobia & Transphobia) 홍보 웹자보
<출처-행동하는 성소수자인권연대 홈페이지>


혐오의 정치에 맞서기 위해

‘혐오의 정치’는 혐오의 감정을 발산하는 정치이기도 하다. 성소수자혐오뿐만 아니라 인종혐오 등이 전세계적으로 극우 정치의 주요 이슈가 되고 있다. 정치세력화를 시도하는 한국 개신교 세력이나 일베, 대한민국어버이연합 등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이들의 표현과 행동에 혐오가 짙게 배어 있음도 분명하다. 그것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쏟아져 나온다. 여성, 이슬람, 외국인, 장애인, 종북 등 그들은 필요에 따라 누구든 불러낸다. 그러나 이들은 혐오하기 위해 모이지 않는다. 모이기 때문에 혐오할 수 있으며 더 모이기 위해 혐오한다. 이것이 지금 한국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혐오의 정치’다. 여기에 맞서는 정치를 만드는 것은 모두의 과제일 수밖에 없다.

이들의 ‘혐오’를 문제 삼는 것으로는 ‘혐오의 정치’에 맞설 수 없다. 우리는 다시, 평등의 이념을 복원해야 한다. 사회가 차별을 인지할 수 있는 감각을 북돋아야 한다. 혐오를 직시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혐오 자체에 맞서기보다는 혐오‘에도 불구하고’ 차별이 용인되지 않는 역사를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그럴 때 혐오‘도’ 희미해질 수 있다. 적어도 공공연히 혐오가 선동되고 조장되는 상황은 막을 수 있다. 우리는 혐오를 반박하기보다 평등을 구성하고 실현해가는 싸움을 벌여야 한다.

일본에서 한 관료는 “오키나와 인은 속임수의 달인”이라는 말을 했다가 경질되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유대인을 사회에서 배제시키자’는 신문 기고, ‘이슬람은 떠나라’는 포스터, ‘동성애자가 HIV/AIDS 확산에 책임이 있다’는 유인물 등을 규제한 것은 표현의 자유 침해가 아니거나 해당 표현들은 표현의 자유로서 보호할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려왔다.**** 이와 같은 결정은 한 사회가 공유하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가능해졌다.

차별금지법은 인권을 존중하는 사회라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법이다. 차별금지법으로 모든 차별이 철폐되리라는 기대는 환상이다. 그러나 평등의 가치를 견지하고 선포하는 법조차 성소수자혐오에 밀려 만들지 못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가 기대할 수 있는 인권의 수준이란 뻔하다. 평등 자체도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는 지금, ‘혐오의 정치’에 맞선 싸움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우회할 수 없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한다면 차별금지법 제정을 내걸고 함께 싸울 수 있는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평등을 구성해가는 싸움이다.

평등을 이루기 위한 싸움

다시 2007년으로 가보자. 당시 광화문 네거리에서는 성소수자들의 기습시위가 있었다. 법무부의 차별금지대상 삭제에 항의하며 “차별금지법 대응과 성소수자 차별 혐오 저지를 위한 긴급행동”이 벌인 시위다. 어쩌면 서울시청의 무지개농성은 이때 예고된 것이 아닐까. 법무부의 차별금지법 훼손은 혐오의 정치가 본격화한 사건이기도 하지만, 평등을 이루려는 민중의 힘으로 끝내 차별금지법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된 사건으로 기억될 수는 없을까. 아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

성소수자혐오는 성소수자 인권만 침해하지 않는다. 혐오세력이 ‘동성애’를 희생양 삼아 힘을 불리며 민주주의와 인권 전반을 후퇴시킬 때, 성소수자 인권을 증진시키는 싸움은 성소수자 인권만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다. 성소수자인권운동과의 연대는 지금 한국사회에서 혐오에 맞서기 위한 필요조건 중 하나다. 누군가를 덜 존중해도 되는 존재로 만드는 구조 전체가 우리의 전장이다. 혐오가 만연해도 두려움 없이 모여서 말하고 움직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차별 당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권리를 보유한 사람으로서 만날 수 있는 관계와 장소들이 필요하다. 이렇게 인간의 존엄에 대한 각성이 이루어지고 인간다움이 재구성될 때 혐오의 정치는 무력해질 것이다.


*김진호, ‘1990년’ 이후 한국 개신교의 정치세력화 비판, 진보평론 67호, 73쪽
**마사 누스바움, 『혐오에서 인류애로』, 뿌리와 이파리, 52~55쪽.
***몽, 혐오하는 것도 차별인가요?, [차별금지법-여섯 가지 이유 있는 걱정], 인권오름
****이주영, 혐오표현에 대한 국제인권법적 고찰, <혐오표현의 실태와 대책> 토론회 자료집, 121쪽.

덧붙임

미류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