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5일 미국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흑인 남성인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경찰 폭력과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대규모의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시위의 구호는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LivesMatter)에서 ‘경찰 예산 폐지’(#DefundThePolice)로 나아가고 있고, 인종차별 문제에 빈번하게 이중적인 태도를 취해온 민주당도 경찰개혁법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연대의 목소리 또한 높아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관심이 집중되던 지난 6월 10일, 미래통합당 의원들이 국회에서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낭독한 뒤 8분 46초 동안 무릎을 꿇는 추모시위를 진행했다. 의원들은 헌법에 명시된 인간의 존엄과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강조했지만, 정작 차별금지법 입법 활동과는 선을 그었다. 8분 46초,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관에게 목을 짓눌렸던 시간은 단순히 경찰 폭력이라는 부정의만이 아니라 ‘구조적 인종차별’이 자리 잡아 온 역사를 소환하고 있다. 현재 진행중인 시위를 통해 한국사회의 차별과 혐오를 돌아보자는 제안들이 등장하는 지금, 우리가 정말 돌아보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죽음
현재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미니애폴리스 길거리에는 그동안 경찰 폭력으로 사망한 흑인 49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조지 플로이드가 있고, 많은 ‘조지 플로이드들’이 있다”는 한 시위 참가자의 말처럼 미국에서 유색인종에 대한 경찰의 잔혹한 공권력 사용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경찰 폭력과 인종차별에 항의하고 변화를 촉구하는 시위 역시 새롭지 않다. 먼 나라에 사는 우리에게도 ‘퍼거슨 사태’나 ‘볼티모어 폭동’은 익숙할 정도다.
미국의 뿌리 깊은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차별 속에서 흑인들은 자신이 49명의 이름과 분리될 수 없다고 느낀다. 1960년대 이후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법제도와 정책들이 시행되고 최초로 흑인 대통령까지 배출했지만, 인종차별로 인한 불평등은 해소되기보다 축적되고 심화되어 왔다. 1965년 이후 급증한 150여 건의 주요 폭동과 소요의 원인을 밝히고 해결책을 제시한 ‘커너 위원회’(The Kerner Commission, 시민 소요에 대한 대통령자문위원회)는 이미 그 원인을 정확하게 짚은 바 있다. 위원회는 미국의 주요 공공·민간 기관부터 시민 개개인의 선택까지 특정한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흑인들을 격리시켜서 사다리 밑바닥까지 강제로 끌어내리고, 백인인 미국인과 매우 다른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미국의 운영 시스템이다. 흑백으로 양극화된 상황이 지속될 경우 민주주의의 파괴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 예견되었지만, 위원회가 제시한 대규모의 과감한 정책은 무시되었다.
그 이후 지속적으로 실행된 것은 현재의 경찰 폭력을 역사적으로 체계화한 ‘형벌 국가’의 확장이었고, 그 결과는 체계적인 유색인종의 ‘대량 투옥’(mass incarceration)과 불공정한 공권력 집행이었다. 문제는 이 기간 동안 범죄 예방에는 가혹한 처벌이 해법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더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흑인·빈곤층은 범죄자로 자연스럽게 등치되었고, 이는 불공정한 법 집행과 인종에 기반해 용의자를 특정하는 인종 프로파일링을 정당화했다. 2019년에 경찰에 의해 살해된 사람은 1천명이 넘지만, 인구의 13%를 차지하는 흑인의 사망률은 24%에 달하고 비무장 상태에서 살해당할 가능성은 백인에 비해 세 배가 높다. 경찰과의 사소한 마찰이 죽음의 첫 번째 단계라는 것을 교육받는 것은 흑인 공동체에서는 일상적인 일이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 범죄의 증가는 인종에 따른 결과보다는 ‘범죄의 인종화’가 만들어낸 결과에 가깝다.
더욱 교묘하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위장된 인종 통제 시스템은 미셸 알렉산더의 책 제목이기도 한 ‘새로운 짐 크로우법’이라고 불린다. 인종 분리를 합법으로 규정했던 ‘짐 크로우법’과 유사하게 흑인을 범죄화하는 것은 공권력의 피해자가 되는 것뿐만 아니라, 고용·교육·주택·참정권 등 모든 영역에서의 법적인 차별을 허용하면서 유색인종을 열등한 지위에 놓는 계층화를 심화시킨다. 이 때문에 알렉산더는 대량 투옥 문제를 인종 정의와 시민권의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의 인종차별 시위가 향하는 곳
인종차별이 녹아든 법제도들은 당연히 유색인종의 사회경제적 지위에도 영향을 미쳤다. 치안 예산과 인력이 증가하면서 이미 공공복지는 급격하게 감소했고, 수감자 교육 예산의 삭제는 사회복귀와 재범 방지를 더 어렵게 했다. 역사적으로 흑인의 주택 소유를 방해해온 정책들과 더불어 공공주택 세입자가 범죄를 저지를 경우 퇴거시키는 정책은 흑인이 다시 빈곤과 범죄에 빠지게 만드는 악순환의 고리였다. 유색인종의 투표율이 낮다는 사실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정치적 권리의 포기에 미치는 영향을 짐작케 한다.
바로 이 지점이 현재 미국 시위의 저항이 향하는 곳이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곳이다. 현재의 시위는 표면적으로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이지만, 이는 미국사회의 일면을 비출 뿐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흑인들은 편향된 형사사법제도, 경제적 불평등과 빈곤, 주거의 흑백 분리와 슬럼화, 교육 및 고용기회의 부족, 취약한 사회보장과 건강보험의 부재, 참정권을 포함한 시민권의 억압을 겪어왔다. 코로나19는 이러한 인종적·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 표출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코로나19로 인한 흑인 사망률은 백인보다 3.5배 높고, 환자 수는 2배가 넘는다. 게다가 최근의 고용통계에서도 백인의 실업률은 감소했지만, 애초에 더 높았던 흑인 실업률은 오히려 증가했다. 인종과 코로나19로 인한 타격이 ‘피부 색깔’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흑인이 처한 ‘근본적인 조건’ 때문이라는 목소리가 시위를 뒤덮고 있다. 현재의 시위는 경찰 폭력과 코로나19로 인해 흑인들이 ‘공공 안전’ 영역에서 더 위험하다는 항의를 넘어, 이미 인종주의와 결합된 채 굴러가는 미국의 억압적인 사회경제체제에 대한 항의다.
한국사회가 미국을 바라보며 해야 할 것이 있다면 인종차별이 사회 시스템의 결함이 아니라 시스템 그 자체였다는 것을 드러낸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추모하는 일, 현재 그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서 분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대를 표현하는 일이 아닐까. 한국사회에도 존재하는 인종차별을 직면하고 변화시켜내야 할 책임이 있는 국회의원들의 역할이 추모와 연대에만 그치지 않아야 함은 물론이다.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 제대로 잘못 짚은 정치인들
하지만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고 말하며 차별금지법 입법 활동에는 거리를 두는 미래통합당 의원들의 대답은 절망스럽다. “시위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이미 시행되고 있어서 차별금지법 입법에 의정활동 목표를 두고 있진 않다”는 말이 미래통합당 의원들의 입에서 나온다. 이는 미국 시위를 통해 가시화된 문제제기를 두 가지 측면에서 정확하게 비껴간다.
먼저 미국의 시위가 차별적인 법제도와 체제에 내재한 인종차별의 문제를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인종차별은 여전히 개인 차원의 문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차별의 해소는 차별을 반대한다는 개인의 선언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재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의 인종차별 문제는 바로 그 ‘다양성 존중과 인정’이라는 담론의 한계 안에서 발생하고 있다. 한국사회가 다른 인종·민족·국적의 사람들을 구성원으로 포함하기 위해 실시해온 정책은 ‘다문화’라는 이름하에 이루어졌고, 이는 사실상 동화주의일 뿐 외부의 타자를 분리한다는 비판 역시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여기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생물학적 차이를 문화나 정체성과 연결 지으면서 두 가지 모두를 본질적인 것으로 전제한다는 점이며, 이는 인종에 기반한 구분과 차등적인 대우, 편견과 낙인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난해 정헌율 익산시장의 발언은 이러한 효과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정헌율 시장은 다문화가족의 자녀에 대해 ‘생물학적 잡종 강세’라고 발언하며 “사회에서 잘 못 관리하면 파리 폭동처럼 사회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후에 적절한 용어가 생각나지 않았다고 변명했지만, 결혼이주여성들의 비판은 한국사회의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는 단순히 ‘혐오표현’이나 ‘말실수’가 아니라, 그러한 혐오를 가능하게 하는 한국 내 인종차별의 문제라는 것이다. 내국인과 다른 인종을 구분하고 이들 집단에 잠재적인 사회불안의 요소이자 범죄자라는 이미지를 결부시키는 것은 미국과 다르지 않은 전형적인 인종화 방식이다.
‘생물학적인 몸’을 차별의 근거로 제기하는 고전적인 인종주의가 아니라, 문화나 종교·신념의 차이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인종주의는 이미 2018년 제주도 예멘 난민 사건에서도 드러났다. 예멘 난민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들의 인종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난민을 받더라도 한국사회와 맞지 않는 문화와 가치를 가진 무슬림은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때 ‘무슬림만의’ 문화는 종교와 히잡, 조혼과 여성 성기 절제, 성폭력과 같이 야만적인 가부장제로 표상되었다. 특히 무슬림이 여성에 대한 폭력을 일삼는 문화라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반대하는 목소리가 드높기도 했다. 이는 우파 포퓰리즘의 흐름 아래 신인종주의로 결합된 극우와 페미니즘 정치가 유럽에 이어 한국사회에서 재현된 것이기도 하다. 무슬림은 ‘인종’이 아니기 때문에 인종차별이 아니라는 주장이나 인종차별 행위의 정확한 양상을 규정하려는 시도는 이처럼 한국사회에서도 현재진행형인 ‘인종화’ 과정을 살펴보지 못하게 한다. 인종차별이 갖는 구조적인 문제와 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은 희석되고, 개인의 정체성과 문화는 본질적인 것으로 고정된다.
인종차별은 ‘인종’만 차별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구조적 차별과 불평등은 언제나 다른 사회적 차별의 구조, 특히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함께 상호교차하면서 작동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유색인종은 ‘인종’으로만 차별받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장애인 차별은 장애인차별금지법만 있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각각의 차별이 독립적으로 작동한다는 편리하고 왜곡된 인식은 포괄적 차별금지의 의미를 쉽게 기각한다.
한국을 비롯해 이주노동이 일상화된 국가들은 세계 자본주의 시장에서 값싼 노동력으로 경쟁력을 확보하면서도, 이주로 인해 발생하는 불평등의 문제를 노동시장을 계층화하는 방식으로 관리·통제해왔다. 인종차별은 노예제나 흑백분리가 존재했던 시대에나 남아있는 역사가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여겨지는 차이를 기준으로 사회구성원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 권리와 자격을 배제하는 체계에서 작동하는 정치적 행위가 인종차별이다. 체류자격의 복잡한 분할, 산업연수제도와 고용허가제를 통한 노동영역 및 직종의 제한, 임금과 근로조건의 차등화는 한국사회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인종주의 시장전략이기도 하다. 그 결과는 특정한 인종·민족·국가의 이주민들이 하층 노동을 담당하는 ‘열등한’ 사람으로, 그래서 권리가 제한되고 차별과 멸시를 받는 게 당연한 일로 여겨지게 만든다.
100여 곳의 일자리를 알아본 끝에 호텔 세탁업에 취업한 난민인정자가 거부감을 느낀 매니저에 의해서 문자로 해고당한 사건, 에리트레아 출신 난민인정자가 “심한 인종차별을 받았고 다른 외국인들과 비교해 일자리 구하기도 힘들었다”며 중국행 선박에 몰래 탑승하려고 했던 일은 단순히 ‘인종’에 대한 차별 사례가 아니다. 그나마 법적 지위를 인정받는 난민인정자조차 일자리를 얻고 인간답게 노동하기 어려운 현실, 저임금 일자리만 주어지는 노동시장은 한국의 모든 이주민과 외국인이 놓인 조건이다. 지난 3월 이주노동자 5명이 사업장을 선택할 자유와 권리를 침해한다며 사업장 변경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고용허가제에 대해 헌법소원을 낸 것은 한국 사회경제체제에 내재한 구조적 차별을 더 깊이 고민해야 할 필요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차별에 반대한다면 평등을 위해 나서야 할 때
한국사회에서도 코로나19 이후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제기하는 목소리가 높다. ‘외부’로 여겨진 사람들은 초기 마스크와 재난지원금 등 공적 지원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배제되었다. “한국경제에 기여한 바가 없기 때문에 외국인에게 똑같은 임금을 주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의 발언은 현재 대량 해고와 실업의 위기 속에서 더 힘을 얻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는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 정헌율 익산시장의 발언에 시위를 열었던 결혼이주여성들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더욱 그러하다. 차별금지법은 인종차별을 선동하는 ‘혐오표현’을 규제하는 방안이자, 나아가 ‘차별금지’를 실현하기 위해서 ‘차별'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줄 수 있는 법이 될 수 있다. 인종차별이 무엇인지, 인종차별이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지, 인종차별이 다른 사회적 위계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등 자신의 차별 경험이 자신의 정체성이나 조건 때문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문제임을 논의할 수 있는 시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그러한 공간과 기회가 제도를 통해 주어지지 않는다면, 사회는 여전히 차별의 원인으로 차별받는 당사자를 지목할 것이다.
정치적 억압 구조로 작동하는 인종차별을 계속 부정하는 게 아니라 고통스러운 사회적 각성이 필요하다는 목소리 앞에, 한국사회의 차별과 분리된 미래통합당의 8분 46초는 추모가 되기에는 역부족이다. ‘차별 반대’를 위한 입법을 유보하는 행위가 평등을 향한 ‘연대’와 함께 갈 수 있는지 또한 의문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 나서지 않으면서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것은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는 시위대 앞에서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고 말하는 꼴이다. 한국사회의 차별과 혐오를 변화시키고 싶다면 미국의 현재를 제대로 돌아보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직면해야 하지 않나.
차별에 반대한다면, 모든 인간이 존엄한 세상을 원한다면 미래통합당뿐만 아니라 21대 국회는 지금이야말로 차별금지법 제정에 나서야 한다. ‘나중에’라는 변명, 침묵으로 가장된 유예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그래서 차별의 역사성과 복잡성을 사회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기회, 이미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불평등과 모순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하는 논의의 장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한국사회를 평등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당기는 과정, 모든 인간이 서로를 평등하고 존엄한 관계로 만날 수 있는 제도화의 시작이다. 정말로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면, 평등을 위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는 것보다 실질적인 연대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