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평등’은 어디쯤 왔는가
제헌헌법에서부터 우리 사회는 ‘평등’을 천명하고,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선언하여왔다. 그러나 ‘반공’을 국시로 하는 독재 체제에서 ‘평등’은 언제나 불온한 것으로 배제되었다.
1987년 민주화항쟁으로 재편된 87년 체제는 ‘평등’을 되살렸을까? 1995년 ‘여성발전기본법’과 ‘남녀평등기본법’이 발의되었을 때 ‘여성발전’이라는 용어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평등’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평등은 ‘약자’이므로 배려한다는 의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1997년 외환위기가 잇따르면서 성차별에 대한 인식보다 ‘역차별’에 대한 불만이 빠르게 확산되었고, 이는 ‘성평등기본법’이라는 개정 요구를 좌절시켜 ‘양성평등기본법’으로 왜곡하는 결과를 낳았다. ‘평등’은 이제 불온한 말은 아닐지언정 비틀린 말이 되어 최근 ‘양성평등복무제’와 같은 논란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평등을, 대립하는 집단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정도로 여기게 된 것이다.
‘남녀평등’과 같은 선언적 수준으로 언급되는 것과 달리,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제 우리는 평등으로 한 발 더 나아가게 된 것일까.
1. 약속도 받지 못한 사람들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은 인권 증진을 위한 국가의 계획을 5년마다 수립하자는 국제사회의 약속이다. 법무부가 주관하여 2018년에 수립한 제3차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은 8가지 항목으로 우리 사회의 전망을 제시했다. 그 중 하나가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다. 그러나 앞선 보수정부에서도 포함되었던 ‘성소수자’ 항목이 삭제되었다. 차별금지에 관한 기본법 제정을 추진하겠다는 계획도 “차별금지 관련 입법적 공백을 최소화하고 효과적 차별 피해 구제를 위한 방안 검토”로 후퇴했다.
2007년 참여정부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추진하면서 ‘차별금지사유 삭제’를 시도한 이후 벌어지는 일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한 발 더 나아갔다. ‘이견’ ‘대립’ ‘사회적 합의 필요’와 같은 말로 성소수자를 비가시화하고 차별금지법을 국정과제에서 지웠다. 정부의 태도가 혐오를 조장하는 줄은 모르고 문제를 ‘혐오’에 돌리고 있다. 차별금지법을 발의하지 않는 여당도 혐오표현금지법은 논의한다. 표현만 문제 삼으며 혐오를 가능하게 하는 차별의 구조를 그대로 두고, 평등을 도덕과 관용의 문제로 만들고 있다. 문제는, 성소수자가 그런 집단이 되었다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 구성원 중 특정한 집단을 누군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집단으로 만든다는 데 있다.
2. 알맹이가 사라진 인권
2018년 한국사회는 ‘예멘 난민’을 둘러싼 논란에 휩싸였다. 난민을 반대하며 난민법을 폐지하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최고기록을 경신했다. 법무부는 ‘국제적 위상과 국익에 미치는 문제점을 고려할 때 난민협약 탈퇴나 난민법 폐지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다’고 답하면서도 “난민 문제는 인권의 문제이나 인권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했다. 인권을 대놓고 부정할 수는 없지만 무조건 난민을 인정하지도 않겠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10월 예멘 난민신청자 모두에 대한 심사가 끝났을 때 난민으로 인정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난민대책국민행동>은 성명을 발표했다. “법무부는 예멘인 전원이 난민이 아니라고 최종 결정하여 이들이 가짜 난민임이 밝혀진바 국민행동의 주장은 사실로 증명되었다.” ‘국제적 위상’을 위해 지킨 난민법은 난민이 ‘허위’라는 주장을 입증하는 근거가 되어버렸다.
2019년 이주민 건강보험 제도가 개악되었다. 건강보험 가입 의무화는 이주민 건강권 보장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월평균 소득이 내국인보다 낮은 점을 고려하지 않고 보험료를 책정하고, 세대 개념을 다르게 적용해 부모와 자녀를 피부양자로 등록할 수 없게 만들었다.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거나 임시직, 일용직 비율이 높다 보니 지역가입자로서 건보료 부담이 늘어난다. 체납이 계속되면 체류자격을 잃고 쫓겨난다. 유사한 상황이 반복되어왔다. 부양의무제를 폐지하겠다면서 생계급여의 단계적 폐지 계획만 세우고, 최저임금을 인상하겠다면서 최저임금 산입방식을 바꿔버렸다. 탈시설을 하겠다며 기존의 시설을 개편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개혁의 명분만 남고 인권의 알맹이가 사라진 자리에서 불평등이 자라난다.
3. 불평등의 구조
불평등을 우려하는 말들은 끊이지 않았다. 코로나19를 겪으며 불평등은 더욱 극명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한국은행은 1년 동안의 거리두기로 소득의 7.4%가 줄었다는 보고서를 냈다. 소득불평등을 보여주는 지니 계수도 큰 폭으로 악화되었다. 취약계층일수록 임금 손실이 더 크다는 것이다. 통계청의 가계동향조사(2020년 4분기)는 저소득층(하위 20%) 가구의 근로소득이 13% 감소했지만 고소득층(상위 20%)의 소득은 오히려 증가했다는 결과도 보여주었다. 굳이 수치로 확인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제적 불평등을 체감한다.
그런데 불평등의 현실을 누가 어떻게 겪는지는 그리 주목받지 못한다. 2020년 11월 고용동향을 보면 여성 실업자가 1년 전보다 28.8% 증가해, 남성 실업자 1.0%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폭이다. 여성뿐 아니라 청년, 저학력, 고령, 이주노동자 등이 그 자리에 있다. 평균 소득은 낮고 비정규직이 많고 노동조건은 열악하다.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조사결과다. 불안정노동은 차별의 구조를 통해 확산된다. 일의 세계에서 소수자가 겪는 문제는 ‘노동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거꾸로다. 소수자는 일의 세계를 먼저 겪는 사람들이다.
불평등과 차별이 마치 다른 문제인 것처럼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소득불평등은 경제의 문제고, 저소득층에 여성이 많은 것은 여성문제라는 듯. 일의 세계에서 존엄을 되찾으려는 사람들의 요구가 특정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요구로 치부될 때 누구도 존엄을 이룰 수 없다. 여성이 더 일자리를 잃기 쉬운 데는 두 가지 맥락이 있다. 97년 외환위기에서 여성 우선 해고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처럼, 남성 생계부양자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영향을 미친다. 다른 하나는, 저임금 불안정 일자리에 여성이 더 많고 경제위기에서 이런 일자리가 먼저 사라진다. 우리는 실태 자체보다 이런 구조가 유지되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여성이 우선 해고를 강요당할 때 왜 대항하지 못하는가, 일하고 싶은 자리에서 번번히 탈락할 때 어떻게 대항할 수 있는가. 개인과 집단이 불리한 조건을 부당하게 강요당할 때 싸울 수 있어야 한다.
4.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능력주의가 많은 이들의 관심사다. 그런데 능력주의 비판은 공정하게 대우받고 싶다는 감각을 해석하는 데 집중될 뿐, 이윤을 위해 능력을 배치하는 자본을 향한 비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흑인이라서 노예가 됐던 것이 아니라 노예가 필요했기에 흑인이 되어야 했다’는 노예제의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능력이 낮은 사람들이 불안정노동을 감수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불안정노동을 강요해야 하기에 능력이 낮다고 간주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투쟁해왔다. 인적 속성을 이유로 능력이 공정하게 평가받지 못하거나,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차별당해서는 안 된다거나 하는 주장이 반차별운동의 흐름을 형성해왔다. 반차별운동이 고용영역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이유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재화와 서비스 접근이 화폐라는 단일한 ‘능력’을 기준으로 이루어진다면, 고용영역은 인간의 ‘능력’이 화폐로 교환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일터에서 괴롭힘을 당하거나 임금을 적게 받거나 승진에서 불리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은 말할 수 있을까? 뽑는 대로 줄 서지 않겠다, 배정하고 배치하는 대로 따르지 않겠다며 차별을 주장할 제도가 필요하다.
성별, 장애, 학력, 나이, 인종,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등의 차별금지사유는 차별의 구조에 맞서는 투쟁이 역사화된 개념이다. 그러나 국가는 이것을 특정한 정체성의 문제로 순치시키고 ‘소수자의 보호’를 차별금지의 목적으로 만들어버린다. 차별금지는 ‘나중에’로 밀린다. 명분은 남지만 알맹이는 사라진다. 플랫폼노동이 주목받을 때에도 여성종사자가 많은 IT서비스나 디자인 업종은 비가시화된다. 청년노동이 사회적으로 등장할 때에도 고졸 청년들이 겪는 현실은 부차화된다. 각자의 자리에서 평등한 삶을 위해 싸우기 어렵다. 차별의 구조가 견고할수록 함께 일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기 어려워진다. 소수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에게는 보호가 아니라 말할 권리가 필요하다.
5. 목소리를 지우는 방식을 반복하지 말아야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라고 약속했던 문재인 정부는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을 추진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청년 정규직 노동자들의 반발에 부딪치게 됐다. 정부의 태도는 성소수자를 대할 때와 다르지 않았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리가 정규직 노동자들의 승인에 달려있다는 듯 설득하려고 했을 뿐 비정규직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장은 열지 않았다.
‘청년’의 분노가 여러 계기로 표출될 때마다 정부는 청년에게 일자리와 주택을 주겠다는 대책만 허겁지겁 세웠다. 제1차 청년정책기본계획은 2021년 55만5천 명, 2025년 128만 명 이상의 청년구직자를 지원하고 고용보험 가입, 창업 지원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6개월 간 구직촉진수당을 지원한다고 원하는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되지도 않으며, 일정 기간 근속해야 수령할 수 있는 청년내일채움공제는 기업에 자신의 권리를 저당잡히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런 제도의 의의를 부정할 것은 아니나, 일자리를 쥐어주거나 바꿔주는 것이 인권을 대신할 수는 없다. ‘청년’이 분석과 정책의 대상으로만 등장하는 것은 또다른 차별 효과를 낳기도 한다.
청년 정책뿐 아니라 정부가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정책들이 비슷하다. 불평등을 말하되 대안은 일자리 정책인 것처럼 말한다. 한정된 자원을 누구에게 할당할 것인가로 평등의 문제를 치환해버린다. 그래서 공정, 역차별, 평등과 같은 말들이 어지럽게 섞이며 모두가 파이 싸움을 하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 자원의 크기는 정부가 정할까? 코로나19로 재정정책이 사회적 의제가 되었다.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파이의 크기와 질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자본이다. 경제성장률 및 산업생산은 차차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일자리가 그만큼 증가하거나 소득이 그만큼 증가할 것이라는 기대는 환상이다. 위기에 따른 부담이 누구에게 전가되고 있는지를 보자.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다. 이것이 자본이 권력을 쌓는 방식이다. 불평등을 일자리 문제로 축소시키지 말아야 한다. 일자리는 중요하지만, 일의 자리에서 누구나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중요한 것이다.
6. 평등의 약속, 누가 할 것인가
평등은, 어디쯤 왔는가. 혐오의 정치는 누구나 문제 삼지만 평등의 정치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평등한 세계로 나아가자는 정치가 이제는 시작되어야 한다. 평등이 소수자 보호나 소득분배 같은 정책에 갇혀 비틀리게 두어서는 안 된다. 기득권 세력이 불평등을 유지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2007년 차별금지법이 입법예고되었을 때 경총이 “사용자의 재산권을 침해”하며 “기업의 인력운용 전반에 중대한 악영향을 미쳐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심화”시킬 것이라며 반대 의견을 제출했다. 왜일까. 자본은 차별을 통하지 않고 이윤을 꾀할 수 없다. 반동성애 세력이, 반공정권을 지지하며 세력을 키운 보수개신교에 대중적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자본’은 기업의 경제력 이상이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며 근본적으로 동등한 존재라는 감각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무너뜨리는 질서다. 차별금지법 제정 없이 기득권세력은 해체되지 않는다.
시민권의 인정에 사회적 합의는 필요하지 않다. 사회적 합의는 배제된 사람들의 시민권을 인정한 후 평등한 관계맺기를 위해 필요한 혼란을 함께 겪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다. 평등의 약속은 누가 주고 누가 받는 것이 아니다. 저마다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며 싸우다 보면 평등이 도래하는 것도 아니다. 함께 평등에 도전할 때에만 권리가 도래한다. ‘우리’가 함께 평등을 약속하자.
* 정의당 정책위원회 주최로 열린, 문재인 정부 4년 평가 토론회 <깨어진 약속, 문재인 정부 4년의 개혁을 평가하다>에서 발제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