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재보궐 선거 이후 거대 양당은 페미니즘의 성과를 무너뜨리는 주장에 앞다투어 동조하고 있다. 군복무 논란에 이어 손가락 모양을 화제로 만들더니 이제 여성가족부 폐지 주장을 공론장에 올리고 있다. ‘페미니즘 백래시’로 명명되는 이런 흐름을 넘어서는 것이 더욱 긴박한 과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기존 제도의 재건이나 원상복구가 아니라면, 페미니즘과 함께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나아가려는지 방향을 벼리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다.
권리 주장에 대한 공격
페미니즘은 성차별을 통해 유지되는 구체제를 해체하는 사상이다. 기득권을 누리던 세력의 반발은 새삼스럽지 않다. 한국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성폭력특별법을 만들고 군가산점을 폐지하고 호주제를 폐지하면서 페미니즘이 한걸음씩 전진할 때마다 반발은 있었다. 특히 ‘남성징병제’와 ‘여성가족부’는 2000년대부터 ‘역차별’의 상징으로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백래시를 20년 전과 동일하게 본다면 페미니즘의 전진을 놓치게 된다.
‘페미니즘 리부트’의 시기에, 2016년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이후, 또는 2015년 #나는_페미니스트다 해시태그운동 이후 페미니즘이 이룬 변화는 무엇일까. 앞선 시기 페미니즘의 전진은 여러 제도를 형성하며 변화의 기틀을 다졌지만 동시에 여성을 국가의 보호 아래 배치하기도 했다. 여성부 폐지를 내세웠던 이명박 대통령은 성폭력 사건에 대한 엄단 조치도 강조했다. 광우병 촛불시위에 등장한 ‘예비역’들의 모습도 같은 맥락에 있다. 성평등 요구는 성차별에 보호주의의 옷을 입히는 방식으로 ‘화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이후 보호주의는 불가능해졌다. 여성은 성폭력 가해자와 같은 ‘일부 남성’이 아니라 ‘여성혐오적/남성중심적 사회’ 자체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혜화역에서 시작된 ‘불편한 용기’ 시위는 국가에 더 강한 처벌만 요구하지 않았다. (경찰조직의 ‘생물학적’ 성비 문제에서 멈춘 것이 한계라 하더라도) 편파수사가 이루어지는 국가 자체를 문제 삼았다. 소라넷 폐지나 텔레그램 성착취 고발에 나선 여성들은 반성폭력운동의 새로운 문법을 만들고 있다.
여성은 보호의 대상이기를 거부하는 권리의 주체로 말하기 시작했고 페미니즘은 ‘오빠가 허락한’ 자리를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변화를 기다리는 언어가 아니라 변화를 만들겠다고 다짐하는 언어가 되자, 페미니즘에 대한 거부감이나 반발을 넘어서는 공격이 시작되었다.
증오 선동의 조직화
백래시의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는 2016년 넥슨 성우 계약해지다. “GIRLS Do Not Need A PRINCE”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가 이유였다. 어떤 사건이나 정책에 대한 의견의 충돌과 대립이 아니라 누군가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는 것 자체가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공격은 비난에 그치지 않고 불이익조치로 이어졌다. 수행평가에서 점수를 낮게 받거나 전시나 계약이 취소되거나 동아리에서 퇴출당하거나 모집채용과정에서 거부당하는 등의 차별행위를 낳았다.* 페미니스트의 강연 취소, 대학의 총여학생회 폐지, ‘페미니스트 서울시장’ 후보의 포스터 훼손 등 페미니즘에 근간을 둔 활동이 표적이 되고 저지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문제로 제기되기 시작한 ‘여성혐오(misogyny)’의 맥락에서 거론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보면 가부장제 사회의 성차별 구조가 드러나는 양상의 하나로 문제가 축소될 수 있다. 2016년 이후 공공연히, 그리고 최근 들어 유튜브 등 온라인 커뮤니티 기반으로 세를 결집하고 있는 흐름을 증오선동으로 명백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 여성혐오의 현상이기보다, 여성혐오를 고발하는 페미니스트에 대한 증오 선동(hate speech)과 증오 범죄(hate crime)로서 다뤄야 한다.**
최근 손가락 모양이 논란이 된 일련의 사건들은 증오 범죄의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표적집단에 대한 편견에 기대 증오를 선동하는 세력이 있고, 증오 선동을 위해 ‘가짜뉴스’가 유포된다. 가짜뉴스를 통해 고양된 증오의 감정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조직되면서 현실의 제도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표적집단에 속한 개인에 대한 물리적 폭력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한국사회에서 반동성애 세력이 차별금지법을 빌미로 얻은 정치적 효능감이 인권과 민주주의를 왜곡했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페미니즘을 반대할 수 있고 토론은 얼마든 가능하다. 그러나 페미니즘이라는 사상에 대한 탄압이나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에 대한 부인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성별 대립 구도가 지운 차별의 구조
지금 ‘안티페미니즘’으로 지목되는 것을 특정 사상에 대한 비판적 의견이나 입장으로 혼동하면 안 된다. 그러나 ‘이대남 대 이대녀’라는 허구적 대립 구도에서 폭력의 성격은 삭제되어버렸다. ‘여혐 대 남혐’이라는 구도에서 차별의 구조가 지워진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사회가 ‘혐오’를 다뤄온 방식에 드리운 문제기도 하다.
한국사회는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를 통해 혐오를 문제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특히 ‘일베’에 진보 정치인을 조롱하고 5.18민중항쟁 희생자를 모욕하는 표현이 확산될 때 혐오는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었다. 용납되기 어려운 표현들에 놀란 정치인들은 일베 게시판 폐쇄 등을 주장하며 혐오의 문제를 ‘표현의 자유’에 관한 쟁점으로 만들었다.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혐오 표현이 차별의 구조에서 비롯된 문제라는 인식에는 이르지 못했다.
혐오가 표현의 문제로 협소하게 다뤄지면서 ‘미러링’을 전략으로 삼은 ‘메갈리아’에서 번성한 표현들은 ‘똑같은’ 문제로 취급되었다. ‘여혐 대 남혐’ 구도가 그것이다. 서로 다른 성별을 가진 집단이 상대 집단을 비하하는 표현이라는 관점만 남고, 두 집단의 성원이 대등한 위치에 있지 않다는 점은 지워졌다. 지워진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혐오는 차별의 구조를 따라 형성되는 문제지만 한국사회에서만이 아니라 전지구적 현상으로 등장한 혐오는 또다른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함께 심화된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혐오를 정치적 현상으로 등장시켰다. 그런데 ‘메갈리아’를 혐오의 현상으로 다루는 논의들에서 그런 배경은 사라졌다. ‘일베’의 혐오에서 (남성) 청년의 현실을 읽어내던 분석은 ‘메갈리아’에서 여성의 현실을 읽어내지 않았다. 여성혐오에 대한 반작용으로만 이해하고 ‘페미니즘 내부의 문제’로 떠넘길 뿐이었다.
‘여혐 대 남혐’이라는 그릇된 구도는 ‘이대남 대 이대녀’라는 구도로 이어졌다. 혐오를 낳는, 청년 세대의 남성과 여성 모두가 처한 현실은 완전히 삭제되었다. ‘이대남’의 목소리마저 ‘안티페미니즘’의 기표에 갇혀 지워지고 있다. 불안정한 삶의 원인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혐오만 승리했다.
성차별을 지우면서 사라진 것
혐오의 해악은 표적집단의 말하기를 묵살하고 권리 주장을 어렵게 만드는 점에 있다. 페미니즘 백래시를 넘어서는 길은 여성이 더 많은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때 페미니즘에 기댄 여성의 말하기가 어디에서 멈칫거리고 있는지를 살피자. 바로 일의 세계다. 성차별을 가장 많이 경험하지만 생존을 위해 말하기를 포기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 장소.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이 여전히 진입하기 어려운 장소이기도 하다.
성별임금격차는 한국사회의 성차별 수준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지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표방한 문재인 정부에서도 성별임금격차는 해소될 기미가 없다. 한국보다 적은 격차도 심각하게 여기며 기업에 정보공개, 분석보고서 작성, 시정 의무를 부과하는 남의 나라 얘기가 아득하기만 하다. 한국에서 고용영역 성차별 대응은 ‘일가정 양립 지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일의 세계로 진입하는 모집채용 과정에서의 성차별이나 임금 등 처우에서의 성차별 현실에는 변화가 없다. 결국 ‘일가정 양립 지원’마저도 여성에게 돌봄을 전가하는 명분에 그치고 있다.
‘청년’의 현실을 보자. 청년 세대 고용률을 성별로 비교하면 여성 고용률이 조금 더 높다. 그러나 첫 직장의 임금은 더욱 낮고 비정규직일 가능성은 더욱 높으며 한 직장에 오래 일할 가능성은 낮다. 여성이 일의 세계에서 목소리 내기 어려운 이유는 여성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가 차별을 주장하면, 그것은 비정규직 문제이므로 성차별이 아니고 그것은 여성 문제이므로 비정규직 차별이 아니라는 식의 판결이 반복되어 왔다.
코로나19와 함께 경제적 불평등과 빈곤이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정부는 집값이나 경제성장률 같은 숫자만 셈한다. 그러나 불평등은 당장 손에 쥐어주는 재난지원금이나 한시적 일자리로 해소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를 예측 가능하게 할 노동자의 권리다. 주는 대로 받는 게 아니라 더 달라고 말할 권리, 언제 짤릴지 몰라 전전긍긍할 게 아니라 안정을 요구할 권리. 누가 어떤 자리에서 이러한 권리를 빼앗기고 있는지 말하지 않는다면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여성이 이런 권리를 가장 먼저 빼앗길 때 그것을 ‘여성’ 문제로 만들어 노동으로부터 밀어내고, 노동 문제에서는 여성을 지워 권리를 주장할 자리를 빼앗아왔다. 그 결과 일의 세계에서 우리 모두의 권리가 삭감되고 있다.
페미니즘 백래시를 넘어, 우리가 이루자
‘이대남 대 이대녀’라는 왜곡된 구도, ‘젠더 갈등’이라는 뜻도 불분명한 허상이 공론장을 잠식한 것의 결과는 대선 주자들의 출마선언에서 성평등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도 드러나고 있다. 페미니즘을 분란의 언어 정도로 격하하는 정치권을 비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정치권이 말하는 ‘갈등’ 대신 실질적인 ‘권리 투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요구가 아니라 여성의 위치에서 제기하는 존엄과 권리의 요구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성별뿐만 아니라 나이, 학력, 비정규직 차별에도 맞서는 언어가 된다. 페미니즘을 노동의 언어, 변혁의 언어로 투쟁의 중심에 놓는 책임은 여성이나 페미니즘만의 몫이 아니다. 페미니즘을 생존의 언어로 삶에 새긴 여성들과 함께,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세계의 근간으로 만들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책임이다.
* 한국여성민우회, 라운드테이블 <페미니즘 백래시, 그런 이유로 멈추지 않겠다> 자료집, 2018
** 한국사회에서 ‘혐오’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hate 역시 ‘혐오’로 번역될 수 있지만 뜻의 구분을 위해 이 글에서는 ‘증오’로 쓴다.
인권으로 읽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