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일 법무부가 차별금지법안을 입법예고했다. 성별, 장애 등을 이유로 고용 등 다양한 차별영역에서 벌어지는 차별행위를 금지하면서 피해자 구제 절차를 담고 있는 이 법안은 최초의 종합적인 차별금지법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지만 다양한 소수자들의 경험을 온전하게 반영하지 못할 가능성과 함께 성적지향 등 다수의 차별사유를 제외함으로써 차별금지법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 또한 존재해 우려를 더하고 있다. <인권오름>은 그동안 반차별 운동을 해온 활동가들의 연속기고를 통해 정부의 차별금지법안이 과연 다양한 ‘소수자들’의 차별 현실을 바꾸고 반차별 의식을 확산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지 점검한다. <편집인주>
87년 이른바 민주화투쟁 이후 20년이 지났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제도적 민주주의에 있어서 많은 진전이 있었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가입하고 이른바 ‘평화의 사절’이라는 유엔 사무총장도 배출했다. 소득수준도 곧 2만 불을 넘어서는 등 선진국과도 어깨 견줄만하게 되었다고들 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의 과제가 민주주의의 발전과 정착이라면 이젠 선진화가 과제라는 주장이 대통령선거 국면에서까지 이슈가 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인권수준만을 놓고 보면 아직도 후진국이라 아니할 수 없다. 특히 각종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에 대한 차별로 인한 문제가 ‘매우 커서’ 차별의 관행이 철폐되기 전까지는 선진화는 어림없다. 그중에서도 각종 질환이나 병력으로 인한 차별 역시 우리 사회 전 영역에 걸쳐 만연해 있지만 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부족은 가히 심각한 수준이다.
잘못된 상식이 부르는 차별
한국에서 B형간염 바이러스 보유자들의 수는 전 인구의 약 5~10% 정도 된다. 이들은 취업에 제한을 받고 있으며 직장을 다니면서도 부서배치나 승진과정에서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많다. 고혈압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 인구의 20%가 고혈압 환자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평생 동안 혈압관리를 하면서 살아간다. 사실 이들은 적절한 치료와 관리를 하면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직업현장을 비롯한 사회생활에서 차별받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회적 차별이 만연하다보니 당사자들조차도 차별이나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을 당연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차별은 그 자체로도 문제이지만 많은 경우 잘못된 지식이나 옳지 않은 사회적 통념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 사실 현대인들은 적지 않은 수가 한 두 가지 만성질환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고혈압은 심장질환이나 뇌혈관질환의 위험요인이지만 적절한 관리와 치료를 한다면 혈압이 정상인 이들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직장생활을 원활히 한다는 것을 핑계로 흡연과 음주를 많이 하는 이들이 건강상 더 위험할 수 있다. B형간염 바이러스 보유자들 역시 타인에게 감염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취업이 안 되는 등 차별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단순히 술잔을 같이 한다거나 음식을 같이 먹는다거나 하여 간염이 전염되지는 않는다. 에이즈 역시 마찬가지이다. 단순한 입술 접촉이나 모기가 HIV를 옮겨 에이즈가 발병한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마치 의학적 사실인양 잘못 알려져 있다. 심지어는 HIV/AIDS 감염인의 손조차 잡지 않으려는 의료인이 아직도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잘못된 사회적 통념들은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의 잘못이 크다. 정부 역시 과거 한때 “B형간염을 예방하기 위해 술잔을 돌리지 말자”라는 잘못된 캠페인을 벌이는 바람에 마치 간염이 술잔을 돌리거나 음식을 같이 먹어도 전염될 수 있다는 오해가 확산되도록 조장한 책임이 있다. B형간염은 출산시 모자간 수직감염과 수혈, 빈번한 성적접촉 등이 감염의 원인이지 술잔을 돌리거나 국을 같이 떠먹는다고 해서 감염될 위험은 거의 없다.
질병 예방에도 도움 안 되는 병력 차별
질병이나 병력을 이유로 고용을 기피하는 것은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질환자나 병력을 가진 이들을 차별하는 관행이 광범위하게 남아있다. 이것은 여러가지 면에서 문제점을 안겨주고 있으며 우리 사회가 아직 인권 후진국임을 보여주고 있다.
인권적인 측면에서 볼 때 차별받는 당사자들의 고통은 당해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도 못할 만큼 크고 심각하다. 질환이나 병력을 가진 이들이 질병 그 자체로 인한 고통에 더하여 차별로 인한 불이익과 인권침해로 인한 소외가 더해져서 감수하지 않아도 될 고통이 가중된다. 과거 한센병 질환자에 대한 잘못된 통념으로 인하여 그들에게 가해진 차별은 국가와 집단의 따돌림과 폭력의 수준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보여준 심각한 인권침해였음이 밝혀졌다.
둘째, 공중보건상으로도 해당 질병의 예방과 관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전염성질환에 대한 전통적인 공중보건정책은 감염인을 격리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감염인을 강제 등록케 하는 등 실명관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 통념처럼 되어 있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 너무나 당연하게도 자신의 질병을 감추게 되고 더 나아가 치료나 관리마저 소홀히 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이젠 HIV 감염인도 에이즈 발생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며 최근에는 복합요법의 발전으로 마치 당뇨나 고혈압 환자처럼 적절한 치료와 관리만 하면 장시간 별다른 증상 없이 생활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도 사적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비밀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세계적으로도 HIV/AIDS 감염인들의 실명관리 및 강제검진방식은 효과가 거의 없으며 감염인의 신고나 실명관리보다는 감염인에게 자유를 주어 자발적인 상담을 통해 관리하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셋째, 질환 혹은 병력을 가진 이들에 대한 근거 없는 차별로 인하여 우리 사회가 감수해야 할 손해도 적지 않다. 이들은 차별로 인하여 고용 및 직장 등에서의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활동을 제한당하는 만큼 삶이 어려워질뿐더러 우리 사회 전체의 활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들의 신체조건에 맞게 작업환경을 적절하게 맞추어서 이들 역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잠재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삶의 질을 높이고 우리 사회 전체의 수준향상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복지이며 우리 사회가 선진화된 사회가 되는 길이 아닐까?
‘참여정부’에 묻는다
질환 혹은 병력을 가진 이를 비롯한 각종 차별이나 배제에는 제도적인 요인과 함께 사회적·문화적 요인이 깊이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단순히 차별금지의 선언만 크게 외친다고 해서 차별을 없애기는 어렵다. 국가가 주도적으로 개입하여 이러한 잘못된 차별을 철폐하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미국에서도 매우 강력한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 있어서 취업, 직장에서의 부서배치나 승진, 희롱, 보험 등 7가지 구체적 항목을 명시하여 장애인과 마찬가지로 특정질환이나 병력을 가진 이들의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차별로 인한 법 위반 사항이 적발되면 징벌에 가까운 벌과금을 물림으로써 적극적으로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국가가 노력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최근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그 시안이 입법예고 되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정부 내 검토과정에서 병력에 의한 차별 등 7가지 항목이 삭제되었다고 한다. 만약 이대로 제정된다면 차별금지는 선언에만 그치고 법의 이름으로 오히려 차별을 온존시키고 합법화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높다. 이른바 ‘참여정부’에 차별을 해소하겠다는 의지가 과연 있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우리 사회에서 각종 차별을 구체적인 수준에서 실효성 있게 해소할 수 있도록 차별금지라는 목표를 명확히 한 올바른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야 할 것이다.
덧붙임
◎ 김정범 님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동대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