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후 5년간 국가인권정책의 청사진으로 제시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권고'에 대해 지난 17일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이른바 재계 5개단체들이 입장을 발표했다. 이들은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권고가 한국사회에 큰 혼란을 초래한다며, 권고 내용이 일부 진보세력의 주장만을 반영했고, 기본적 인권은 안보와 사회질서 하에서만 보장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국가인권위원회가 헌법재판소 결정 및 대법원 판례를 거스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재계 5개단체의 행보를 보면서, 인권단체로서는 '적반하장도 유분수' 라는 속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비정규직을 양산해오고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억압하는 등 인권침해를 자행해온 이들이 '기본적 인권' 운운하는 것 자체가 우습고, 황당하기까지 하다. 재계 5개단체의 행보는 한마디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권고에 대한 위상을 낮추고, 국가인권위원회의 존재를 왜곡시키는 몰역사적이고 반인권적인 발언이며 비상식적인 행동이다. 이들의 경거망동은 국가인권위원회 및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에 대한 무지의 결과라고 판단한다.
국가인권위원회와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은 국제인권규범의 국내적 이행을 이끌어내기 위한 장치이다. 유엔은 1993년 비엔나세계인권대회에서 비엔나선언과 행동강령을 통해 각 국가가 인권보호를 위한 장치로서 국가인권기구를 만들 것을 권고했다. 또한 2001년 유엔 사회권위원회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보고서 심의 후 한국정부에게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을 수립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지난 1990년 유엔의 주요 인권규약을 비준했으나, 국제적인 인권규범에 부합하는 국내적 이행조치를 실행하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유엔 자유권위원회는 두 차례 국가보안법 개정과 폐지를 권고한 바 있고, 유엔 사회권위원회는 한국 내 노동자의 단결권이 지나치게 제한적이라고 지적했으나,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한국정부는 취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권고는 지난 10년간 유엔인권기구가 한국정부를 향해 권고한 것을 이행하겠다는 약속을 국내외적으로 다시금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국내 인권상황을 계속 모니터해 온 인권단체로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권고의 내용이 현재 한국사회에서 풀어야할 인권침해적인 관행과 제도, 정책의 변화를 반영한 결과라고 판단한다.
재계 5개단체는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권고로 사회가 혼란스러워 질 것이고 말한다. 그러나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권고는 인권을 옹호하고 예방하기 위한 정책 목표의 제시이지 사회불안을 초래하고자 하는 정책이 아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 3년간의 노력 끝에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권고를 발표하였고, 그것은 국가인권위원회가 인권옹호기구로 거듭나기 위한 결실의 결과이다.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은 개별적인 인권침해 사안에 대한 사후적인 대응을 넘어 구조적인 인권침해를 예방하기 위한 제안인 것이다. 따라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권고가 사회혼란을 야기한다는 재계 5개단체의 주장은 어불성설일 뿐이다. 한국사회가 민주화를 경험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억압적인 법제와 관행·기구가 존재하며, 경제발전 지상주의 아래서 희생되거나 유보된 인권이 또 다른 성장주의에 묶여 인권의 대접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권고는 국제적인 인권규범에 부합하지 못하는 제도와 정책을 '인권의 기준'으로 재검토해 미래지향적인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재계 5개단체는 국가인권위원회가 헌법을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인권이 형성되었는지를 모른 채 인권을 그저 앙상한 뼈대만 있는 '법'으로 좁게 해석한 무지의 결과이다. 인권은 실정법을 반영하기는 하지만, 실정법 그 자체가 인권의 기준과 잣대가 될 수 없다. 인권은 '법질서' 만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서 가장 억압받고 핍박받는 사람의 목소리가 투영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애초 만들어진 취지와 달리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인권의 보루'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한국사회에서 변화되어야할 제도-국가보안법,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등-에 대해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은 인권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 결정과 판결을 해왔던 것을 감안할 때 당연히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들의 견해를 뛰어넘어야 한다. 이는 국가인권위원회가 헌법 위에 군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헌법 및 법제를 인권친화적인 환경으로 만들어가기 위한 과정이다. 때로는 기존의 법질서와 대립할 수도 있으나 이러한 모습이 본질적으로 국제적인 인권규범이 국내적으로 작동되는 과정이다. 앞으로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역시 인권의 기준과 잣대를 통해 법률을 심판하고 인권침해에 대한 구제기능을 담당할 수 있도록 거듭나야 한다.
재계 5개단체는 인권이 '안보와 사회질서'에서 보장될 수 있다고 있지만, 이러한 주장은 결국 자신의 '이익'을 '인권'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재계 5개단체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얘기하는 '안보와 사회질서'가 무엇인가? 당신들이 말하는 안보는 국가권력의 비호 가운데 수많은 노동자들의 희생 속에서 만들어진 절대적인 경제 권력의 보존이고, 그러한 사회질서를 유지시키는 것이 진짜 목적이 아닌가! 신자유주의 세계화 질서가 '기업 활동의 자유'를 극대화한 결과 국내·국제적으로 빈곤이 확산되고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현실을 비추어볼 때, 오히려 이들의 '이익'은 '인권의 이름'으로 통제되어야 한다. 또한 인권보장이 경제성장을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기에 기업의 경쟁력 확보가 우선이라는 주장은 기만일 뿐이다. 우리사회 양극화 현상은 일부 기업과 가진 자의 부만 극대화시키고 있는 경제구조의 문제이지, 성장을 가속화 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재계 5개단체는 인권침해를 자행해왔던 과거를 반성하고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권고에 따라 노동권을 준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정부는 선별수용 방침을 철회하고,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권고에 따라 범정부적인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이행 기구를 구성하여, 권고에 따른 구체적인 이행계획을 국가 정책 전 분야에 걸쳐 세울 것을 촉구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인권단체는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권고의 수용과 이행과정을 똑똑히 지켜볼 것이며, 만약 정부와 재계가 반대만을 일삼고 이의 이행을 거부하고 방해한다면 엄중히 그 책임을 물을 것임을 밝힌다.
- 2976호
- 국가인권위원회,논평
- 인권운동사랑방
- 2006-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