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베이징 합의가 있은 지 60일이 가까워오고 있다. 지난해 북의 미사일 실험과 핵실험으로 최고조에 이르렀던 이른바 ‘북핵위기’는 지난 2월의 6자회담 참가국들의 2.13 합의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10년 동안 핵을 둘러싼 북미 간의 갈등이 해결국면에 들어섰고, 공공연하게 한반도 평화체제가 거론되는 상황이 되었다. 일상적인 전쟁 위협을 겪는 한반도 민중들의 입장에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만한 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2.13합의가 예정하고 있는 한반도 평화체제가 민중들에게도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인지는 꼼꼼히 따져야 한다.
2.13 합의, 항구적인 평화체제로 초기 단계
‘2.13 합의’는 새로운 약속이 아니다. 정식 이름이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 조치’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2005년 이미 6자회담 참가국들이 합의한 9.19 공동성명을 이행하기 위한 초기 단계의 조치를 열거한 것이다. 따라서 그 목적은 9.19 공동성명 1항의 “한반도의 검증 가능한 비핵화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달성하는 것”이며, 그 내용도 9.19 공동성명에서 이미 언급된 △북미관계 정상화 △북일관계 정상화 △대북 에너지 지원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 등이 포함되었다.
그럼에도 2.13 합의가 이전 합의와 다른 점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의 구축을 3단계로 나누고 참가국들이 각 단계에서 이행해야 할 조치를 명시하고 있는 점이다. 60일이 시한인 초기단계에서 북은 △재처리 시설을 포함한 영변 핵시설의 폐쇄·봉인 △감시·검증 활동을 위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요원의 초청 △모든 핵프로그램의 목록 협의를 진행해야 한다. 미국은 북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와 대적성국교역법 적용 종료 과정을 개시해야 한다. 또한 중유 5만톤 상당의 긴급 에너지 지원의 최초 운송이 개시된다. 한편으로 참가국들은 △한반도 비핵화 △북미관계 정상화 △북일관계 정상화 △경제 및 에너지 협력 △동북아 평화·안보 체제의 5개 실무그룹을 설치하고 30일 이내에 개최하는데 합의했다.
초기단계 조치들이 이행되면, 시한이 명시되지 않은 중간단계가 진행된다. 중간단계에서 북은 모든 핵프로그램에 대한 완전한 신고와 모든 현존하는 핵시설의 불능화를 진행하며, 다른 참가국들은 중유 100만톤 상당의 경제·에너지·인도적 지원이 제공된다. 또 동북아 안보협력 증진방안 모색을 위한 장관급 회담을 개최하며, ‘직접 관련 당사국들’이 ‘적절한 별도의 포럼’에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갖는다.
2.13 합의 이후
2.13 합의는 핵 문제를 둘러싼 지난 10여년의 북미 갈등이 마침내 출구를 찾았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동안 북은 ‘북미 불가침조약’ 등 평화체제가 만들어지면 자연스럽게 비핵화가 달성될 것이라는 ‘선평화체제론’을 내세웠고, 미국은 한반도 비핵화가 달성되어야만 평화체제로 전환될 수 있다는 ‘선비핵화론’을 내세우면서 대립해왔다. 2.13 합의는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수교, 평화체제의 문제를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병행추진하기로 합의했고, 초기단계에 60일이라는 구체적인 시한을 정함으로써 실효성을 높여 실질적인 협상 진전이 기대된다.
2.13 합의의 초기조치 이행에는 북과 미국이 맨 앞에 나섰다. 북은 엘바라데이 IAEA 사무총장을 초청했고 실제로 3월 13일 방북이 이뤄져 핵사찰 실무협의를 진행했다. 이에 앞서 3월 5일 김계관 북 외무성 부상이 미국을 방문해 북미관계정상화 실무그룹 회의를 열었다. 회의 후 김 부상은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와 적성국교역법에 따른 제재 해제 등의 조미 현안을 하루 빨리 전략적 이해관계에 맞게 해결하고 정상화하기로 합의가 됐다”고 밝혔다.
남북관계 또한 북미관계의 진전을 쫓아가고 있다. 2월 27일부터 평양에서 열린 제20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남북은 △이산가족 상봉행사 △상반기 안 열차시험운행 실시 △‘납북자’와 ‘국군포로’ 등 ‘전쟁시기와 그 이후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사람들’ 문제의 협의 해결 등을 합의했다.
2.13 합의에 대한 이행은 북미 양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시기시기 난관이 있더라도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행이 완료되면 북과 미국은 한국전쟁의 종전선언과 한반도 평화협정의 체결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2.13 합의에서도 별도 포럼을 설치해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를 다루도록 되어 있다. 남과 북, 미국이 주체가 되어 종전선언을 할 가능성이 높다.
다음 차례는 ‘한반도 평화협정’이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신안보연구실장은 평화협정의 내용으로 △비무장지대를 평화지대로 발전시키고 △남북이 중심이 되는 남북군사통제위를 설치하며 △평화협정의 이행을 감시·보장하기 위해 미국과 중국이 중심이 되는 ‘한반도평화보장위원회’의 설치를 제안했다. 평화협정의 당사국을 남·북·미·중 4자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또 남북 상주 대표부의 교환 설치와 남북정상회담의 정례화도 빼놓지 않았다.
한반도 평화체제로 가기 위한 전제들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는 예상보다 빨리 진행될 수 있다. 하지만 정전선언과 평화협정은 평화체제의 법제도적 선언일 뿐, 그 자체가 평화체제의 종착역이 될 수는 없다. 평화체제의 수립 과정은 실질적으로 전쟁 방지와 평화 유지를 위한 조치가 수반됨으로써 군사적 긴장이 해소되는 과정이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초기조치가 순조롭게 이행된다고 해도 여전히 남는 문제가 있다.
첫째, 평화협정이 맺어지더라도 남측에 미군이 계속 주둔할 가능성이 크다. 1953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 제4조는 “상호적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주변에 배비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고 규정해 주한미군 주둔의 근거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주한미군 주둔 문제를 남북 또는 북미 간 협의 의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별도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북이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에서 주한미군 문제를 의제에 올리지 않았음을 감안할 때, 북도 북미관계 정상화가 병행된다면 주한미군의 존재를 묵인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등 평화체제의 법적 형태가 완성되더라도 주한미군은 여전히 남측에 주둔하게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게다가 지난해 초 미국과 남측이 합의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따라 주한미군의 성격이 ‘붙박이군’에서 ‘신속기동군’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더라도 한국 내 주둔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그 적나라한 증거가 평택 미군기지의 이전·확장이다. 지난 3월 28일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주최로 열린 통일전략포럼에서 경남대 정치외교학 김근식 조교수는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북한과 미국의 이해관계 일치 지점을 명확히 읽어내야” 한다며 “주한미군의 동북아 신속기동군화 및 전략적 유연성 확보를 위해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것은 미국에게 득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평화체제 아래서도 주한미군이 동북아에서 영향력을 가진다는 점은 평화체제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한미군사동맹의 지속·강화를 통한 ‘국가안보’의 추구가 평화체제 이후에도 계속된다면 한반도 평화체제란 ‘한국전쟁의 형식적 종결’을 의미할 뿐 끝없는 군비경쟁으로 인한 ‘공포의 균형’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둘째, 북 핵시설의 ‘불능화’만으로는 한반도 비핵화를 이룰 수 없다. 주한미군의 핵무기가 있고, 핵우산이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이남에서는 1991년 공군용을 제외한 모든 전술핵이 폐기 되었고, 이전에 배치되었던 핵무기를 전면 철수했으며, 당시 부시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이 이를 공식확인한 바 있다. 하지만 한미합동군사훈련을 통해 핵항공모함이 출입하고 있고, 일정 경로를 통해 남측 내에 핵무기가 반입될 수 있지만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북도 4차 6자회담 기조연설에서 핵무기를 장착한 미국 원자력잠수함의 한국 기항을 금지하고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 철거를 요구하는 ‘한반도비핵지대화’를 주장한 바 있다.
조성렬 실장에 따르면 북은 지난해 8월초 미국과 가진 비공식 접촉에서 ‘상호주의 원칙’에 입각해 핵의혹 시설에 대한 사찰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주한미군 기지에 대한 강제사찰을 요구하기도 했다. 즉 과거 있었던 남측 내 미군 핵무기의 배치와 보관, 철거에 관한 모든 기록을 열람하고, 핵무기 철거작업에 관여한 사람들과의 면담을 주장한 것이다.
민중의 입장에서 평화체제 상상하기
이와 같이 2.13 합의에 따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 논의되고 있고, 위와 같은 전망과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면, 국가들 간의 협상을 넘어 한반도 민중의 입장은 무엇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정한 의미의 ‘평화’체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반드시 진행되어야 한다.
첫째, 침략적 한미동맹을 폐기하고, 주한미군은 궁극적으로 철수해야 한다. 주한미군의 존재는 평화체제와 양립할 수 없다. ‘전략적 유연성’을 통해 전세계적 차원의 분쟁에 개입하게 될 주한미군의 철수를 분명하게 제기해야 한다. 침략적 전쟁연습인 한미 간의 군사훈련이나 역외에서 이루어지는 합동군사훈련은 중단되어야 하며, 평택과 군산의 미군기지와 무건리 훈련장 확장사업은 중단되어야 한다. 주한미군 주둔 비용도 문제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비롯한 각종 군사협정을 폐기해야 한다. 아울러 미국의 군사적 필요에 순응하여 이라크로 파견한 자이툰 부대는 즉각 철군해야 하고 레바논 파병 계획은 철회해야 한다.
둘째, 침략적 한미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한국군의 전력증강 계획을 철회하고, 군축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가 추진하는 국방개혁 2020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져야 하고, 자주국방이란 미명 하에 이루어지는 첨단공격무기의 증강과 같은 계획은 전면적으로 폐기되어야 한다. 또한 고위 군사관료들에 독점되어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는 국방정책에 대한 정보는 반드시 개방되어야 한다. 이런 안보독점주의를 깨고 민중적인 통제가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만들어내야 한다.
셋째, 평화체제 논의는 동북아시아로 확장되어야 한다. 평화체제는 현실적으로 남북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북아의 국제 문제이다. 북핵 문제가 6자회담의 틀에서 논의되는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북미수교, 북일수교를 통해 동북아 냉전구조가 해체되더라도 이것은 기존질서의 해체를 의미할 뿐 새로운 질서의 형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평화체제가 한반도에서 이뤄지더라도 동북아 차원의 평화체제와 함께 가지 않는다면 한반도에서는 ‘불안정한 평화’가 지속될 뿐이다.
넷째, 북을 적대시하는 냉전적 법제를 평화 지향의 법제로 바꾸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헌법 개정 시에 반드시 평화주의 원리를 보다 명료하게 제시해야 하고, 평화적 생존권은 구체적인 기본권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헌법에서 영토조항을 현실적으로 수정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이와 함께 헌법 위의 법으로 기능해온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예비군이나 민방위 훈련과 같은 국민동원적인 군사훈련도 폐지해야 한다. 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인정도 필요하다.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논의가 급진전될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당국 간의 논의와 상층 세력들 사이의 논의만 무성하다. 이남 사회의 진보운동세력은 이런 논의들을 따라잡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민중적인 관점으로 우리가 바라는 평화체제는 어떤 것인가를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논의하고, 합의해 가는 역동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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