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어떤 모임에서 이른바 ‘공정무역’으로 수입한 커피를 맛 볼 기회가 있었다. 설탕도 커피용 크림도 공정무역과 관계없기에 뜨거운 물에 커피만 넣어 마셨는데, 잘 태운 누룽지를 끓여낸 맛이었다. 다른 이도 맛에 큰 점수를 주지 않는 눈치다. 공정무역 제품은 질이 낮을까.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본이 만들어 낸 맛에 우리가 이미 길들여졌다는 점이다. 공정무역은 커피에 머물지 않는다. 아직 많지 않은 농산물과 수공예품에 제한되지만 독점 자본의 횡포에 맞서려는 이들은 착취되는 생산지를 기꺼이 찾아갈 것이다. 제 값 치룬 제품을 소비자에게 바로 가져가려고.
국내 교역의 과정에서 자본의 착취와 폭리는 없던가. 이자 수익을 노리고 빛보다 빠르게 이동하는 자본에 의해 속절없이 희생되는 먹잇감 인생은 국경 이내에도 얼마든지 널렸다. 그 인생들은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에서 제 땀 흘리며 가족 부양하는 순박한 장삼이사다. 시방 시중 배추가 한 포기에 7000원이란다. 그 이익은 누가 챙길까. 김치가 금치인 마당에 소비자는 아닐 터. 이 땅의 농부들이 챙길까. 밀가루가 금가루란다. 미국 땅의 농부들이 이익을 챙길까. 터무니없다. 유기질 씻겨나가 땅에 온갖 화학비료와 농약을 치고 트랙터로 땅을 가는 농부는 빚에 치일 따름이다.
국내 굴지의 자본이 주인인 대형 양판점은 인구 많은 주거지마다 터를 잡았다. 그 양판점 안에는 ‘고객님’이 붐비고 밖에는 승용차가 붐빈다. 승용차가 필요 없을 정도로 가까워도 들고 나오는 물건의 양을 감안할 때 다른 수단도 없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반갑게 맞는 종업원 안내에 쉽게 이끌리고, 시중보다 저렴해 하나 둘 올리다보면 카트에 쌓인 물건은 어느새 지갑의 허용범위를 넘어선다. 커다란 냉장고에 쟁여두고 베란다 창고에 쌓아놓은 물건은 낭비를 부른다. 쓰레기와 카드대금도 전 같지 않다.
레이저프린트 용지를 사러 양판점에 갔다. 한 박스만 살 요량으로 걸어가 낯모르는 종업원의 과장된 인사를 뒤로, 사방에서 감시카메라가 번뜩이는 매장으로 들어섰다. 한데 전에 봐두었던 상표가 얼른 눈에 띄지 않는다. 산더미 같았는데 다 팔렸나. 대신 다른 상표가 선반을 독점하고 있다. 양판점에서 만든 상표다. 상자를 들여다보니 전에 봐둔 상표와 같은 용지라고 밝혀놓았다. 그런데 값은 구석으로 밀려난 상표의 용지보다 10퍼센트 이상 싸다. 같은 품질인데 누가 비싼 상표의 용지를 선택할까. 두 박스를 사려다 차가 없어 참았다. 나오는 길에 예정에 없던 문구들을 이것저것 챙겼고, 낑낑대며 계산해야 했다.
용지가 떨어져갈 때 미뤄 놓았던 인쇄를 서두르면서 생각해본다. 단지 표장만 바꿨을 뿐인데 양판점 상표의 용지가 훨씬 싸다니. 수상하다. 원 상표의 가격에 거품이 있었던 걸까. 그럴 수 있지만 가끔 납품업체 사장의 하소연이 언론에 보도되는 걸 보아 아닐 가능성이 높다. 종이가 확보되자 인쇄에 거리낌이 없는 소비자를 위해 나무는 얼마나 베어지고 제지공장 종업원은 얼마나 혹사당할까. 10퍼센트 낮게 납품하고도 적정 이윤을 보장받으려면 제지공장의 주인은 지출을 줄여야 한다. 걸핏하면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조합에서 자유롭고 싶어질 수 있다. 공장 자동화와 비정규직을 선호하다 아예 해외에서 몰려오는 값싼 이주노동자를 찾으려 들지 모른다.
주말이면 인근 공단의 이주노동자들이 양판점을 찾는다. 값이 싸니 저마다 한 보따리씩 들쳐매고 계산대를 빠져나가는데, 계산대에 앉은 종업원은 대개 비정규직이다. 매장에 서성이는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종업원도 비정규직이다. 그들은 시간급이고, 급여도 대단히 박하다. 낯모르는 ‘고객님’들에게 반가운 듯 인사를 건네야 할 의무가 있고 이 물건 저 물건을 펼치며 소비자의 눈길을 유혹해야 할 책임을 진다.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지 살피는 눈길이 매장에 감도는데, 양판점 자본은 비정규직 종업원의 행동을 감시하는 직원도 비정규직으로 교체한다. 고분고분한 비정규직을 발탁해 종업원 사이에 갈등과 질시를 유발시키며 수익을 더 짜내려는 것이다.
생산직 노동자와 판매직 종업원의 고혈을 빨고 생태계와 자원의 고갈을 부추기는 양판점이 들어서자 아파트 주민들은 집값이 오를 것이라며 반색했다. 대신 이웃의 얼굴과 취향을 기억하던 구멍가게는 모조리 문을 닫았다. 파리채 휘두르다 떠난 가게주인은 어디로 간 것일까. 문 닫은 구멍가게는 ‘명퇴’한 사람이 잠시 차지한다. 말이 좋아 명예퇴직이지 이른 나이에 직장에서 내쫓긴 신세인데, 그이도 어느 틈에 사라진다. 간판업자를 먹여 살리던 구멍가게 주인들은 양판점 종업원을 자원했을지 모른다.
굴지의 양판점 자본은 승승장구한다. 지역의 문화요 역사인 산의 허리를 파헤쳐 골프장을 짓거나 여기저기 초고층 빌딩을 지어 찬란하게 분양한다. 덕분에 고용이 늘었다며 통계자료를 들먹이는 해당 지방자치단체는 희색이 만연한데, 고혈이 빠져나간 비정규직 피고용자는 오늘도 고단하다. 가난한 소비자로 전락한 노동자도 찾아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양판점은 그렇게 가난한 노동자와 소비자를 양산한다. 가난한 노동자와 소비자가 늘어날수록 수익이 늘어나는 자본은 누구의 몸에 빨대를 꽂는 것인가.
최근 유기농산물 직거래운동이 활발하다. 누군가 웰빙 풍조라고 힐난하지만 혼자만의 웰빙은 불가능하다. 내 웰빙을 보장하는 이의 웰빙을 배려하지 않으면 웰빙은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다. 유기농산물의 생산이 지속가능하도록 땅과 농부의 내일을 배려하는 웰빙이어야 한다. 신뢰를 바탕으로 생산자와 소비자를 바로 이어주는 공정한 거래다. 공정한 거래는 오늘의 달콤함보다 내일의 지속가능성을 먼저 생각한다.
공정하게 거래할 품목을 유기농산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믿을 수 있는 구멍가게를 마을에 되살리는 것도 훌륭한 대안이다. 좀 비싸고 질이 떨어지더라도 국산을 구입하려는 물산장려운동이 일제 강점기에 왜 필요했는지 새삼 상기해보자. 신기루 같은 돈을 남보다 더 벌거나 못 번 이웃이 수시로 드나드는 마을에서 문화와 정주의식은 생겨날 수 없다.
덧붙임
◎ 박병상 님은 인천 도시생태ㆍ환경연구소 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