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방침을 읽다보니, <사회사목> 항목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이라는 내용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 사회 안에서 차별받는 비정규직, 이주노동자와 임대아파트 및 비닐하우스, 쪽방의 도시빈민들, 구치소와 교도소의 수감자들에 대한 사목적 관심을 통해 교구의 사회사목과 연대”해 달라는 요청이다. 문득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인 뉴코아노조 위원장 박양수 씨와 순천지부장 윤성술 씨가 떠올랐다. 이들은 열흘 넘게 바람과 눈, 비를 견디며 침낭 하나로 명동성당에서 노숙농성을 해왔다. 다행히 성당 측은 13일째 되는 날 천막을 허용했다고 한다. 노동자들이 보름 가까이 명동성당 사목위원들과 입씨름을 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너희 문제는 너희 문제다. 매장으로 가라. 아무 상관없는 성당에 와서 왜 이러냐. 너희가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고 한다. 교회를 마지막 안식처로 믿고 찾아온 사람의 천막을 부수고 경찰까지 대동해 멱살잡이를 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이 앞선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하고 묶인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했다는 이유로 죽어간 예수의 처지와,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온갖 실정법에 손발이 묶인 비정규직 노동자의 상황이 너무나 비슷하다. 세상의 법으로부터 억압받기는 2천년이라는 시간과 갈릴래아와 서울이라는 공간을 훌쩍 넘어버린다. 그래서일까? 수십억대의 가압류와 손해배상에 경제활동이 묶이고 주거침입, 업무방해, 특수공무집행방해 등 무시무시한 죄목으로 쫓기는 신세가 된 노동자들은 직감에 따라 예수의 집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이곳은 너희가 올 곳이 아니니 나가’라고 했다. 아직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연대를 강조한 사목교서가 나오기 전이었기 때문일까? 교회가 세상의 질서에서 조금도 자유롭지 못한 채 또 다른 왕국이 되어 예수를 죽이듯 노동자를 내치는 똑같은 죄를 다시금 되풀이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이 사회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의 백성’으로서의 교회가 아닌 교회는 결국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할 것이다.
박양수 씨는 “아직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이 끝나지 않았다. 민주화의 성지인 명동성당에서 계속 농성을 하겠다”고 말한다. 수배 중인 위원장의 농성은 조합원에게는 다시금 투쟁을 이어나갈 버팀목이 되고, 사회단체 활동가들과 시민들에게는 연대의 밑불이 되고 있다. 매일 저녁 7시 명동성당에서 문화제와 촛불집회를 통해 다시금 비정규직 노동자가 처한 고통을 함께 해결하자고 시민들에게 호소할 예정이다.
노무현 정권에서 구속된 노동자는 1037명으로 노태우 정권 이후 가장 많다. 노동자들이 일터가 아닌 감옥과 거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은 우리에게 이들과 어떻게 연대하고 싸울 것인가를 되묻게 한다. 빚을 내고 적금과 보험을 깨서 생존과 투쟁을 이어가는 노동자들에게, 불법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쫒기는 노동자들에게, 감옥에서 단식농성으로 양심수 석방을 외치는 노동자들에게 교회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명동성당 예수상의 그림자가 참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덧붙임
◎ 최은아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