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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죽음을 기억하라

‘사람’의 죽음에 관대한 사회

[기획] 죽음을 기억하라 (6) 거리에서 죽어간 노숙인

[편집인주] 모든 죽음은 산 자들에게 안타까움을 남기지만 어떤 죽음은 산 자들을 부끄럽게 한다. 이런 죽음은 죽은 자가 의도했든 아니든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남긴다. 생물학적 죽음을 수반하지는 않더라도 사회로부터 배제되어 사실상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사회적 죽음도 있다. 죽음마다 다양한 사연이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죽음을 부르는 한국사회의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런 죽음이 계속되리라는 점이다. <인권오름>은 노무현 정권 시기인 2003년부터 최근까지의 죽음 가운데 점점 잊히고 있지만 산 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죽음을 기록함으로써 한국사회 인권의 현실을 점검한다.


2005년 1월. 서울역 대합실에서 노숙인 이 아무개 씨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씨는 평소 폐결핵을 앓아왔고, 이 날도 폐결핵으로 생명이 위독한 상태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이 씨는 ‘들 것’이 아닌 짐수레에 실려 졌고, 장시간의 방치로 끝내 숨을 거뒀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이를 지켜보던 노숙 동료들이 “사람이 죽었는데 짐수레에 실어 나를 수 있느냐?”, “노숙인이 아닌 일반시민이었다면 그럴 수 있었겠느냐?”라며 저항했지만, 그들의 정당한 저항은 ‘공공역사에서의 노숙인 난동’으로 언론에 보도되었다.

올 겨울에도 적지 않은 지자체에서 노숙인을 위한 동절기 대책을 연이어 발표했다. 심지어 국무총리까지 나서 “겨울철 노숙인 지원대책을 마련하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겨울철만 되면 쏟아져 나오는 노숙인 대책을 보면 반가움은커녕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동절기라는 계절적 요인으로 인해 위험이 가중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 위험은 동절기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한해 평균 400명 이상의 노숙인이 거리, 시설, 쪽방 등에서 죽음을 맞는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의 죽음까지 파악할 수 있다면, 외롭고 비참한 죽음의 수는 더욱 증가할 것이다.

우리는 매체를 통해 노숙인의 죽음을 자주 접한다. 어떠한 의견이나 생각도 적혀있지 않은 단신기사로 말이다. 노숙이라는 고통의 상황에 처해 상당수의 ‘사람’이 죽어가고 있지만, 그저 대수롭지 않은 ‘노숙인’의 죽음에 불과하다. 사회는 지나치게 노숙인의 죽음에 관대하다.

연중 밤이 가장 긴 ‘동지’ 때면 거리에서 죽어간 노숙인을 애도하는 추모제가 열린다. 사진은 2005년 열린 추모제.

▲ 연중 밤이 가장 긴 ‘동지’ 때면 거리에서 죽어간 노숙인을 애도하는 추모제가 열린다. 사진은 2005년 열린 추모제.



없어져야 할 것은 노숙‘상태’ 이지 노숙‘인’이 아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노숙’이라는 ‘상태’가 인간에게 끼치는 폐해이다. 노숙인의 사망률은 일반인의 3배에 달하며, 노숙생활로 인한 우울증, 대인예민성과 같은 심리적인 이상은 노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 보다 높다. 노숙생활이 길어질수록 질환에 시달릴 확률과 사망률이 높아지게 된다. 얼마 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실태조사에서 노숙인의 질병양상과 사망원인이 점차 ‘만성질환’화 되고 있음이 밝혀졌다. 무주거, 빈곤, 불건강, 관계망 단절, 열악한 지원대책 등 복합적인 박탈상태인 ‘노숙’은 사람들을 점점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사람들은 노숙이라는 ‘상태’보다는 이미 드러난 문제에 주목한다. 문제를 발생시킨 근본 원인에 대한 이해 없이 가시적인 결과에만 집착한다. 노숙인에 대한 인식은 개인적인 접촉과 관찰에 의해 만들어지며, 이러한 인식은 막연하고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노숙이라는 극단의 상태에 놓이게 된 이유, 과정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결여되어 있다. 문제는 주관적인 인식의 지나친 확대와 이것이 노숙인의 삶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이다.

막연함에 기댄 인식은 최저의 지원만을 허용한다. ‘열등 처우’ 또한 정당하게 만든다. 얼마 전 동료로부터 서울시 노숙인 정책 담당자가 ‘열등처우의 원칙’을 운운했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19세기에나 가능했던 것이 현시대의 정책 잣대로 활용될 수 있음에는 노숙인을 둘러싼 편견과 낙인의 영향이 크다. ‘노숙’이라는 극빈의 상태, 진정한 의미의 탈노숙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최저의 지원, 최소한의 지원만을 허용하는 사회적인 인식이 노숙인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도록 한다. 노숙인은 인간답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노숙인 추모제’는 죽음을 위로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숨죽여 살고 있는 노숙당사자의 권리를 실현시키기 위한 장이기도 하다.

▲ ‘노숙인 추모제’는 죽음을 위로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숨죽여 살고 있는 노숙당사자의 권리를 실현시키기 위한 장이기도 하다.



“노숙인을 가까이 살펴보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보일 것이다”

예방체계 부실, 사회 안전망의 부재, 공공성 약화 등으로 취약계층의 노숙상태로의 유입은 가속되나, 노숙상태에서 벗어나는 건 쉽지 않다. 또한 ‘노숙인’이라 불리는 범주 안에는 ‘극단적인 빈곤’의 상황으로 내몰린 여성, 노인, 장애 등 다양한 인구가 혼재되어있다. 하지만 여성빈곤, 노인빈곤, 장애빈곤의 문제로 바라보질 않는다. 그저 노숙인의 문제로 분리된다.

노숙은 사람들이 넘겨짚는 것처럼 알콜중독자, 정신이상자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의 요구대로 대형시설로 수용해 격리시켜 버리면 될 사안이 아니다. 주거, 경제, 건강, 관계망 등 다차원적인 박탈이 문제의 원인이다. 노숙문제의 해결은 수용, 격리가 아닌 박탈의 상태를 벗어날 수 있도록 총체적으로 지원하는 것에 맞춰져야 한다. 이를 통해 노숙상태를 종결시키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거리에서 죽어간 노숙인 추모제”

2001년부터 시작되어 연중 밤이 제일 길다는 동짓날에 해마다 열리는 '거리에서 죽어간 노숙인 추모제'(Homeless Memorial Day)가 올해로 일곱 번째를 맞이한다. 올해는 12월 21일 서울역에서 진행된다. 추모제는 오랜 빈곤화의 과정에서 종국에는 노숙인으로 한 생을 마감한 노숙인을 추모하고 넋을 위로하는 장이다. 또한, 이미 우리사회의 실체로 존재하고 있으며 시대의 빈민인 노숙인의 문제를 알리고, 노숙인의 인간다운 삶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운동을 결의하는 장이기도 하다.
덧붙임

◎ 최은숙 님은 ‘노숙인복지와인권을실천하는사람들’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