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막히는 죽음 앞에서 그/녀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을 떠올렸을까. 아니면 밀입국 자금 5천 바트(우리 돈 16만 원)를 만들기까지 겪었던 수많은 어려움을 떠올리면서 허무에 빠졌을까. 분명 그들을 질식하게 한 건 밀입국 조직의 비인간성만은 아닐 것이다. 이주노동자를 합법과 불법으로 나누는 기준이 그들을 질식하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기준 때문에 밀입국 이주노동자의 생명을 구제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밀입국에 성공하더라도 ‘불법’
태국 정부는 2005년 이주노동자 합법화 조치를 했다 하지만 미흡함이 많아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는 게 한국 이주노조의 분석이다. 밀입국과정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는 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2006년도에 나온 ‘패스트푸드국가’라는 영화에는, 미국으로 밀입국하는 멕시코 계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차별, 사기, 성폭행이 묘사된다. 영화에서 이주노동자는 밀입국에 성공하더라도 ‘불법’이기 때문에 관리들의 부당한 대우나 산업재해를 고스란히 감당한다.
이주노동자의 자유로운 이동과 노동선택권이 보장되지 않는 한 합법과 불법을 가르는 가운데 많은 ‘불법’ 이주노동자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여기서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이주민은 ‘영원한 타자,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국내자와 국외자, 주권자와 비주권자를 나누는 순간, 인간 사이의 동등성은 사라지고 ‘나와 타자간의 차이’는 차별이 된다. 타자성을 강조하면서 우리가 아닌 이들에게는 ‘다른 대우를 해도 된다’는 차별 논리는 차이를 근거로 한 억압기제이다.
“조선족들이 사라져야 일자리를 얻기 쉽다”
인권이 ‘국민국가’의 벽 속에 갇힌다면 이주노동자의 인권은 ‘모든 인간의 권리’로서의 성격, 즉 보편성을 잃어버린다.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이주노동자들의 권리 제약은 한 나라의 노동자를 위계화하고 서열화를 더욱 공고히 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주노동자들에게 함부로 하거나 저임금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저 이주노동자 때문에 나의 권리가 박탈되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작년 서울시 노숙인 단속정책의 반인권성을 알리기 위해 서울역에서 열었던 문화제에서 어느 노숙인이 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조선족들이 사라지면 내가, 우리가 일자리를 얻기 쉬우니 내보내야 합니다”라는 말. 그는 아마 새벽 인력시장에서 일을 구하지 못하고 돌아설 때마다 성실한 조선족 이주노동자에게 번번이 자리를 빼앗겼다고 느꼈을 지도 모른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혐오와 적대의식은 빈곤층에게 더욱 뚜렷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건 이주노동자가 노동인구의 하위 층을 형성하고 있어서 항상 노동시장에서 경쟁자로 마주하게 되기 때문일 거다.
인권의 햇살을 가려 이득을 보는 것은 누구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는 국적을 취득했을 때만 참정권을 보장받으며 재판권, 이동권, 신체의 자유와 같은 시민적·정치적 권리는 아주 제한적으로만 허용된다. 구로처럼 조선족 노동자가 많이 사는 곳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총선과정에서 드러나지 않았다. ‘합법’ 이주노동자도 의료, 노동, 주거, 교육, 문화 등 사회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고용보험은 임의 가입이며 건강보험 가입은 의무이지만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게다가 이주아동의 교육권은 미등록노동자에게도 보장되는 권리라고 하지만 학교장의 재량에 맡겨 법적 권리일 뿐 실제적 권리는 아니다. 인권이 한 국가에 한정되는 지금의 규범과 한국의 상황에서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이주민의 인권은 보장되지 않는다. 한국에서 인권의 햇살은 ‘국민국가’의 구름에 가려 이주노동자를 비추지 못한다.
왜 이주노동자의 완전한 ‘합법화’는 이루어지지 않는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허용하지만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져올 위험 때문에 허용하지 않는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그 위험이란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이 노동조건이나 임금을 통제하기 어렵게 하는 것, 즉 자본의 어려움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정부는 미등록 노동자와 등록 노동자로 나누고 불법과 합법의 기준을 들이밀며 인권보장을 제한적으로 한다. ‘합법’ 이주노동자가 되기 위해 이주노동자들 사이에 경쟁이 생기며, ‘불법’ 이주노동자라는 신분 때문에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인권침해 상황을 감수해야 한다. 이로 인해 자본은 엄청난 초과이윤을 얻고, 한 사회의 임금을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는 이익을 얻는다.
권리의 보편성을 밀어붙여
소설 ‘동물농장’에서 농장주를 쫓아낸 동물 권력층이 변질되자 ‘동물은 평등하다‘라는 구호가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로 바뀐다. 동물 일반의 평등이 아니라 ‘어떤 동물’들의 평등만을 더 강조하는 게 허위이듯이 ‘어떤 인간’의 권리만을 인정하는 것은 인권의 보편성에 어긋난다.
이제 보편성을 추구했던 세계인권운동사를 보면서 우리의 상상력과 지향을 넓혀야 하지 않을까. 국민국가의 틀에서만 인권을 허용하고 보장하려는 한계를 폭로하고 깨야 하지 않을까. 인권의 주체는 탈-국(國)적인 개인이어야 한다. 인권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주체에 대한 제한을 ‘모두’ 풀어야 한다. 이주노동자도 모든 시민적 권리나 사회적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불법과 합법을 가르는 현재의 이주노동정책이 ‘모든’ 이주노동자들을 합법화할 때, 권리의 벽과 주체의 경계가 사라지지 않을까. 그래야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지배의 논리에 따라 특정 집단이 이익을 얻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인권의 권리 목록은 사회가 발전하면서, 인권주체의 실천 속에서 하나둘 늘어났다. 늘어난 권리목록은 구체적인 필요성에 의한 것이며 고도 산업사회에서 인간을 보호하는 외투였다. 물론 합법/ 불법을 가르지 않고 허용하더라도 이주노동자 인권이 완전히 보장되지는 않을 것이다. 공적 영역에서는 보편 권리 보장을 말하지만 사적 영역에서는 실질적인 배제와 차별을 하며, 법적 권리를 누릴 수 없게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여성, 장애인, ‘합법’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이주민의 법적 권리가 보장되도록 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권리의 보편성을 최대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닐까.
덧붙임
명숙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