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권선언 제 7조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고, 어떠한 차별도 없이 법의 평등한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모든 사람은 이 선언을 위반하는 어떠한 차별에 대하여도, 또한 어떠한 차별의 선동에 대하여도 평등한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모호한 기초과정
차별을 금지하는 일반조항은 2조이다.(아래 관련기사 참고) 7조는 ‘법 앞에 평등’, ‘법의 평등한 보호’, ‘차별로부터의 보호’를 특화해 다루고 있다. 그런데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는 이들 원칙들이 뭘 의미하는가는 결코 만만치 않은 문제이다. 7조를 기초할 당시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선언을 만들던 사람들도 갸우뚱거렸던 문제는 ‘법 앞에 평등’이 선언에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도대체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법률 조항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아야 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법률의 적용이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해야 한다는 것일까? 법의 내용과 상관없이 적용만 평등하면 된다는 뜻일까? 법의 내용 자체가 평등해야 한다는 것일까? 가령 남성이든 여성이든 군복무를 해야 한다는 식으로 법 조항이 ‘똑같아야’ 한다는 건가, ‘모성급여’를 남성에게도 똑같이 주어야 한다고 규정해야 한다는 건가, 법이 인종차별을 조장한다면 그 법대로 해야 한다는 건가, 법의 내용 자체가 인종차별을 금지해야 한다는 건가?
이런 혼란 속에서 선언의 기초자들은 7조의 문장을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다가 지금의 문장을 남겨 놓았다. 7조는 ‘개인들 사이 그리고 집단 사이의 정당한 구분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법적 처우의 평등을 보장할 의도를 갖는다’는 게 대체적 합의였다. 선언 7조와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유엔 시민‧정치적 권리규약 26조를 만들면서도 비슷한 논란과 고민이 있었다. 우리는 26조에 대한 유엔자유권위원회의 논평(일반논평 18)을 통해 앞의 질문들에 대한 몇 가지 답을 구해볼 수 있다.
△ ‘법 앞에 평등’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의 동일한 취급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18세 미만자에 대한 사형선고 금지, 미성년 범죄자의 성인과의 격리 등을 떠올리면 된다.
△ 실질적인 차별을 바로 잡기 위해 특정 인구에 대한 구체적 사안에 있어 그 외의 나머지 인구와 비교하여 특정 기간 동안 우대조치를 부여하는 것 등은 정당한 차등조치에 해당한다. 차등조치에 대한 기준이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며 그 목적이 본 조약에 따라 정당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면, 모든 차등조치가 차별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 인종‧성 등 관련한 차별에 대하여 동등하고 효과적인 보호를 보장한다. 재판에 있어서 평등하고, 모든 시민이 공직생활에 평등하게 참여할 권리를 보장한다.
△ 법률을 채택할 때, 그 법률의 내용이 차별적이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차별을 선동하는 것이 될 수 있는 민족적‧인종적 또는 종교적 증오의 고취를 법률로서 금지할 의무가 있다.
마지막 부분의 ‘차별의 선동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에 대해서는 논란이 큰데 일부 국가들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이유로 차별선동금지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법 앞에 평등’의 접근법
유엔 등이 금지하는 대표적인 차별유형에는 ‘직접차별’, ‘간접차별’, ‘폭력’이 있다. 직접차별은 말 그대로 ‘직접적이고 가시적이고 의도적으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불리하게 대우하는 경우다. 그런데 법률이 직접차별을 규제하는 것만으로는 사회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에 대한 편견, 통념, 관습 등의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이를 수정할 수 있는 새로운 차별개념과 판단기준이 요구되기에 간접차별의 개념이 등장한다.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혹은 ‘중립적’인 기준을 적용하였으나 특정 소수자 집단에게 불이익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간접차별이다. 개인의 의사에 반하여 정신적‧신체적 폭력(harassment)을 가하는 것도 차별이다. 여기에는 조롱, 비웃음, 경멸, 농담 등을 포함한 언어적‧시각적인 행위를 통한 괴롭힘이 포함된다. 행위자의 의도성 여부와 관계없이 그러한 행위로 인해 피해자가 공포나 모멸감, 모욕, 불쾌감, 수치심을 경험하였다면 폭력으로 간주한다.
그럼 이들 차별유형에 대해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법 앞에 평등을 추구하는 접근법은 다양하다. 법적 차별의 개념은 불확정적이고, 해석과 판례에 따라 구체적 의미가 규정된다.
제일 간단해 보이는 접근법은 ‘아주 똑같이 대하는 것’이다. 개인의 장점이나 결점을 보면 되는 것이지, 성‧인종‧종교 등의 특성과 개인을 결부시키는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본다. 법률은 그런 특성들을 보지 않고 모든 개인을 똑같이 대하면 된다는 주장이다.
이런 식의 접근은 간단하고 효과적으로 보이지만 단점이 있다. ‘똑같이 대한다’고 했는데 누구랑 똑같이 대한다는 것일까? 사실상 그것은 사회의 지배적인 집단을 기준점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가령 임신하지 않는 남성, 정규직 노동자, 비장애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똑같이 대한다’고 했을 때 문제가 없을까? 이것은 차별을 불러일으킨 지배집단의 기준을 그냥 받아들이라는 것이고, 사회경제적으로 지배적인 집단 속에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는 제쳐놓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접근법에 따르면 국가는 외관적인 법률로 명백한 차별을 삼가기만 할 뿐 차별시정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
‘아주 똑같이’가 너무하다고 여긴다면, 약간의 수정을 가할 수 있다. ‘아주 똑같이’를 대원칙으로 삼은 가운데 몇 가지 차이에 대해서는 특별한 고려를 가미하는 것이다. 가령 ‘의지로 어쩔 수 없는 불변의 차이’ 몇 가지만 선택해서 예외로 다루는 것이다. 이런 예외에 속할 수 있는 차이에는 임신‧출산, 장애, 교육에서의 소수자 언어 등이 있다.
문제는 특별한 처우를 정당화할 수 있는 차이를 어떻게 고르느냐에 있다. 생물학적 차이만 다룰 것인가, 어떤 차이든지 다룰 수 있는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또한 선택된 차이에 대한 특별한 처우가 ‘누구랑 같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앞서 지적한 문제가 반복된다. 즉, 지배적인 집단의 기준에 맞추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차이’로 선택된 특성을 가진 사람들에 대하여 고정되고 진부한 시각을 유발하고 계속되게 할 우려가 있다.
앞의 두 가지 접근법에 대해 ‘문제는 차이가 아니야’, ‘문제는 차이를 바라보는 시각과 구조야’라고 찌르는 접근법이 있다. 개인의 존재나 특성의 차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회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다. X라는 존재나 특성은 그 본질에 의해 결정된 것도 불가피한 것도 아니다. X는 사회적 사건, 세력, 역사 때문에 존재하거나 형성된 것이고, 이 모든 것들은 달라질 수 있다. 차별의 근거가 되는 어떤 특질은 ‘자연적’이거나 ‘불변’인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사회적 구조’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배적인 집단의 기준에 근거해 키 맞추기를 하지 말고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구조적으로 왜 불리한지를 따져서 처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접근법은 골치 아픈 문제들을 남긴다. 이런 주장을 들고 법원에서 ‘법 앞에 평등’을 추구했을 때 과연 얻을 게 있을 것인가라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거니와 ‘구조적 불리함을 따져서 처우한다’는 것이 참 많이 모호하다.
현실에서는 이런 접근법이 무 자르듯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고 섞여있기 마련이다. 어찌됐든 법적 평등의 추구는 ‘강제적’ 영역에서 이뤄지는 접근법이다. 법제도 영역에 들어설 만큼 드러난 차별의 문제(가령 인종차별, 성차별)만 건드릴 수 있고, 드러나지 않은 문제들, 가령 고통스러운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그걸 묘사하는 언어조차 없어서 차별로 여겨지지 않는 문제들(가령 ‘성희롱’ 개념이 등장하기 이전의 일들)은 건드리기 어렵다. 따라서 ‘법 앞에 평등’을 열심히 추구하는 동시에 우리는 사회적으로 불리하고 취약한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무지를 고치는 노력에도 힘써야 할 것이다.
‘법 앞에 평등’의 한계와 의미
‘법 앞에 평등’은 다른 말로 하면 출발에서의 기회균등, 자유경쟁의 원리다. 기회의 균등이 법률의 얼굴을 가지게 된 것은 근대시민혁명에 연유한다. 혈통과 신분의 특권을 뻐겨대고 버티는 귀족 계급에 대항하여 타고난 혈통과 신분이 아닌 자기 노력과 능력에 따른 평등을 내세운 것은 혁명을 정당화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논리였다.
근대시민혁명은 잘 알다시피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주창했다. 그런데 부르주아계급이 불평등이라 여긴 것은 능력이 있음에도 자신이 속하는 신분 때문에 능력 없는 자보다 열악하게 취급되는 것이고, 부자유란 능력이 있음에도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즉, 능력이 있는 자를 능력 있는 자로, 무능한 자를 무능한 자로 취급하는 것이 평등이며 자유였다.
이 원칙이 방해받지 않고 현실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꿈꾸면서 작성한 권리 구조는 이러했다. 사람들이 평등한 것은 ‘자연적’ 권리에서이고 국가는 이 자연적 권리에 근거해 모든 국민을 국민주권에 대한 평등한 참가자라고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개인의 재능과 장점, 특질 등에 따른 현실에서의 불평등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건 내버려둬야 하는 문제이다. 자유로운 경쟁이란 게 재능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향연이 되고, 경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가치마저도 경쟁으로 몰아붙이며, 아무리 사회적 불평등의 골을 깊게 판다해도 평등원칙에 위반되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
이처럼 능력 본위의 평등논리를 법으로 못 박은 것이 근대시민혁명이다. 따라서 근대시민혁명이 내세운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은 물질적 평등의 의미가 아니라 ‘모든 시민의 법률에 대한 평등’, ‘시민의 법에 의한 지배’를 의미했다. 자유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적 소유 및 자본주의적 경제활동에서의 자유인 반면 평등은 국가에 대한 참여의 평등한 권리, 곧 법 앞의 평등을 의미했다. 이로 인한 폐해에 대해 어떤 이는 “법은 정의롭다. 그것은 빵을 훔친 죄로 부자와 가난뱅이를 평등하게 처벌한다”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럼 법 앞의 평등은 부인돼야 하는가? 그냥 조소의 대상인가? 그건 아니라는 걸 인권의 역사는 보여준다. 예를 들어 신분차별의 폐지는 재산가와 재산 없는 사람들을 더 확연하게 갈랐다 할지라도 분명 평등의 역사에 새 장을 열었다. 인종차별의 법적 폐지는 분명 개인들이 가진 인종적 증오와 편견을 해소하지 않았고 그에 기인하는 사실상의 차별을 중단시킨 것도 아니었지만, 인종적으로 차별받고 있는 피억압자가 그 차별의 철폐를 스스로 주체적으로 쟁취해 나가기 위한 중요한 전제와 수단을 제공했다. 종교에 따른 차별, 여성에 대한 법적 차별의 폐지도 마찬가지다. 법적으로 차별받고 자유를 빼앗기고 무권리 상태로 짓눌려 있는 상황과 부족하나마 법적으로 자유(특히 정치적 자유)와 평등을 부여받고 있는 상황은 보다 완전한 자유·평등의 획득을 위한 투쟁의 조건이라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한 철학자의 말을 빌려 달리 표현하자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법 앞에 평등’은 과거 정치적 주체들의 투쟁의 산물이며, 그러한 투쟁을 자기 내부에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이전에 일어났던 정치적 투쟁의 사건, 민주주의의 사건은 언제나 다시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우리는 인권의 역사에서 평등의 맛을 기억하며 더 깊은 맛을 추구할 것이며 맛보지 못한 사람들을 계속 초대할 것이다.
덧붙임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http://khrrc.org) 연구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