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집에 갔다가 투표권이 있는 아버지를 따라 투표 장소인 동네 학교에 가봤어.
기다리다가 학생지도실에 붙은 포스터를 보게 되었는데, 포스터의 내용은...
구속? NO! 학생다움만 보여줘
(학생다움만 보이라는 것이 구속 아니냐구요?)
넥타이 착용은 필수! 교내에서 귀걸이 착용 미워요.
(그래,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봐줄만 했어.)
교복변형 No No No!
교복을 줄인 것을 보여주는 듯한 그림 옆에 '알'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오는데, 확 꽂히더라.
(뭐야! 거기에 알이 왜 들어가?)
학생답게
그렇다. ‘학생답게’ 라는 말. 학창시절을 살아왔던 어른들, 또는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아닐까? 그런데 이 ‘학생답게’라는 말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다.
학교에서 또는 가정에서, 그도 아니면 각종매체에서 학생다움을 이야기 한다. 그러한 이야기들 안에서는 여러 가지 학생다운 청소년의 이미지를 제시하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준들에 들지 못하면 불량/비행 청소년으로까지 그려지곤 한다. 많은 경우 실제로 청소년들 스스로가 주체가 되는 경우는 찾아볼 수가 없다. 결국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외모를 꾸미고 결정하는데 있어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알이라구..??
왜 굳이 그림 옆에 "알"이라는 단어를 써야 했을까? 왜 여학생의 종아리 근육이 이 포스터에 등장해야 했을까?
절대 다수 학교에서 치마를 입어야 하는 여학생들의 경우 긴바지를 입는 남학생들과 달리 다리 부분이 밖으로 드러나 보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원치 않는 학생들이라도 자신의 신체 일부분을 드러내고 다닐 수밖에 없게 된다. 치마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청소녀의 다리는 곧바로 신체적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이어진다.
포스터에 등장한 그림과 알은 청소녀들에게 남성/여성으로 규정된 이상적인 신체상, 성별화된 외모상을 강요한다. 근육은 남성성의 상징이 되곤 하지만 여성에겐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S라인과 매끈한 각선미를 가진 여성들이 호감을 얻으니 여기에 맞추라는 뜻이기도 하다.
단속과 통제가 아닌 자유로운 청소년 인권을 꿈꾸며..
2008년은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이었다. 그에 맞춰 청소년들 역시 자신들의 삶을 바탕으로 한 ‘청소년인권선언’을 발표하였다. 선언에는 청소년들 스스로의 외모를 꾸미고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선언문 9조에 청소년에게는 자기 머리카락이나 복장 등을 마음대로 하고 꾸밀 권리가 있으며, 학교에 소속된 것을 이유로 교복과 이름표 착용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또 '학생다움' 혹은 '청소년다움'을 정의하는 것은 결국 청소년 자신이라는 것도 분명히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청소년은 이러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편견과 고정관념에 따른 단속과 통제가 아니다. 이미 청소년들은 그런 단속과 통제의 대상이 되길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편견과 고정관념 속에 살고 있는 어른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청소년들 스스로의 결정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이 땅에 함께 살기 위한 노력의 시작이지 않을까.
덧붙임
홍이님과 민선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