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오빠는 필요 없다’ 였다. 이 책은 90년대부터(물론 그 전에 짤막하게나마 일제침략시기 독립운동 때부터 1980년대까지의 여성운동에 대해 언급하고 있긴 한다.) 2000년대로 들어와 거의 최근까지의 여성운동의 흐름과 함께 살아 숨 쉬며 활동을 해온 여성활동가들의 인터뷰와 후에 객관적인 자료로 나온 것과 함께 정리 ․ 구성한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 스스로 현재 하고 있는 고민에 풍덩풍덩 생각의 돌을 던져 한동안 정체되어있던 생각에 숨통이 트였다. 내가 오래 가지고 있었으며 여전히 진행형인 고민은... 지금 하고 있는 운동의 지나온 길, 현재 있는 지점과 앞으로 나아가고 싶고 나아가야 할 길을 분절된 것이 아닌 좀 더 우리가 만들어낸 그 길 모습 그대로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이다. 그리고 이 고민에 대한 우답조차도 찾지 못한 채 연이어 든 고민. 우리 운동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였다.
언어든 영상이든, 그림이든, 액션이든... 그 표현방법을 망라하고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의 어떤 모습을 발현할 것인가는 정말 고민된다. 이러한 정신없이 얽히고설킨 고민을 한 차례 정리해준 나름 시원한 책이기도 하다.
그럼 책 이야기 좀 풀어볼까. 책에는 크게 두 흐름을 보여준다. 운동판 내의 여성과 여성운동. 학생운동조직 내에서의 여성조직 또는 여성운동과 사회에 나와 학생운동조직으로 시작하여 그 운동의 기반으로 생긴 사회운동조직 내에서의 그것을 그려냈다.
사소한 ‘컵’ 이야기
실제 그 속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여성활동가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운동판의 모습들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가장 공감이 갔던 이야기는 ‘컵’이야기이다. 활동공간에서의 개수대는 설거지거리로 가득하다. 특히 사람이 많이 오고가는 곳에서는 차를 마신다는 것은 흔한 행위이고 쌓이기 십상인 것은 ‘컵’이다. 그런 ‘컵’을 닦는 것은 주로 여성들이 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이의제기를 하면 대부분의 활동가 특히 남성활동가들의 반응은 ‘사소한 일에’ 뭘 그렇게까지 말하느냔 것이다. 아무나 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아무나’에 해당하는 사람이 항상 거의 ‘여성’이라는 현실이 문제의 출발점이다.
매 순간 이러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대의와 개인의 사정, 사소한 일과 중대한 일의 구분은 과연 누가 짓고, 판단하는 것인지... 그런 것들을 함께 소통하고 동의를 구하는 과정은 없는 채로 말이다. 그러나 몇 사람이 공언하듯 말하는 것은 대의가 되고, 중대한 것으로 ‘되어버리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의 한 사례였던 한 노조의 기혼여성의 이야기가 눈에 띈다. 양육해야 할 자녀가 있는 위원은 늦은 밤에 자주 회의하는 것에 대해 되도록 늦게 회의하지 말자는 의견을 냈다가 가차 없는 비판을 받았다. 거의 비난이라고 할 수 있었던 대목은 우리가 생각해 볼만하다.
물론 내가 지금은 그러하진 않지만, 나중에 이 기혼여성노조위원 같은 경우가 되었을 때에 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 대의라 인식되는 ‘운동’과 개인적이라 불리는 ‘일’을 구분하진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운동이 내 삶이고, ‘개인적’이라 불리는 일이나 관계 역시 내 삶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양분한다거나 어떤 것을 더 중요시 하여 어떤 것을 희생한다거나 무시하는 상황은 없도록 해야 하는 이유도 그러할 것이다. 운동과 ‘개인적인 일’은 별개가 아니며 지금 내 삶에 존재하는 것들이며, 그 일에 대한 중요도나 필요성에 대한 판단은 나 자신이 해야 할 것이지, 누군가에게 의해 결정되고 판단되어질 문제는 아니라 생각한다. 하지만 운동을 할 때,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면 그 내용에 대해 열어놓고 소통하고 공유하고 공감하는 일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내가 중요하고 필요하다 생각하는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함께 운동하는 이와 나눠야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부장사회에 길들여진 일상
책을 읽는 내내 답답하기도 하고 화도 나서 눈물이 찔끔찔끔.... 그러나 무엇보다도 언니들의 용기가 나에게 힘을 주었다. 대표적으로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 뽑기 100인 위원회 등 각자의 자리에서 권위적이며 폭력적으로 획일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가부장제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모든 행위로 인해 시작된 물꼬들이 나를 힘찬 숨을 쉬게 하고 앞으로의 희망을 말함에 있어서 자신감도 주었다.
마지막으로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책을 읽으며 뜨끔할 때도 있었다. 나 역시 가부장제 사회에서 획일성이 주는 편리함에, 또는 폭력이 가진 효율성에 현혹되어 부응하고 합리화하진 않았나 싶을 때가 종종 있다. 나 스스로 가부장성에 부응하며 안일함을 느끼지 않도록, 경계하고 ‘늘 깨어 있어야지’라는 작심을 하게 만들었다.
덧붙임
아르망드 님은 장애여성 공감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