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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책의 유혹

[책의 유혹] 끝나지 않을 소년들의 음란한 모험담

『플레이보이』체스터 브라운 지음, 김대중 옮김, 새만화책, 2008년

주변 사람들(특히 남자들)과 이런저런 옛날 얘기(30대 중후반인 내가 옛날이라고 하긴 우습지만, 여하튼 세상이 빨리 변해 가니 정말 옛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를 하다 보면 흥미 삼아서 어린 시절 어떻게 성을 알아가게 되었는가 하는 데까지 이야기가 흐를 때가 있다. 누구든 나름의 모험담이 있어서, 한 번 터진 이야기는 끝날 줄 모른다. 결국 나오는 얘기는 거기서 거기인데, 기껏해야 ≪선데이서울≫이나 ≪핫윈드≫ ≪건강 다이제스트≫ 아니면 주부·여성지의 성 칼럼 이야기가 나오고, 뭔가 의협심(?)을 과시하고 싶은 경우 그간의 쌓아올린 체면을 망가뜨리면서 결국 세운상가 이야기까지 나오고야 만다. 그것이 성이라고 하기에는 한심하고 초라하며 왜곡되어 있고, 요즘 같은 시대(인터넷을 통해 무한한 네트의 바다에서 욕망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된)와 비교하면 유치한 수준이겠지만, 책이나 비디오테이프 같은 묵직한 물성이 있는 것들을 다루어야 했던 만큼, 노고가 따르고 그래서 해프닝도 만만치 않았다. 인터넷으로 추상적인 돈이 오가는 시대에서 마치 그 옛날 황금을 찾아 바다를 항해하던 모험가 시절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어쩌면 우리는 성보다 그저 추억과 모험을 떠올리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캐나다의 만화가 체스터 브라운(Chester Brwon)의 만화 『플레이보이』를 읽다 보면 성을 둘러싼 이 한심한 모험담이 어쩌면 만국 소년들의 일반적인 성장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화 『플레이보이』는 성인지 ≪플레이보이≫를 둘러싼 작가 자신의 경험을 그리고 있다. 이야기는 처음 ≪플레이보이≫를 구입한 날의 기억을 시작으로 사고 버리기를 반복하며 스스로 관리·보관·처분의 과정을 익히고, 점점 과감해지고 익숙해지다가 욕망과 자기혐오의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끝내는 그간 모아 왔던 ≪플레이보이≫를 휴지통에 버리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여기에 새로운 성의 세계를 발견한다는 경이와 흥분은 없다. 대신 욕망과 자의식의 지루한 싸움이 이어진다. 이 싸움은 두려움과 죄책감들 속에서 진행되는데,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사고 숨기고 버리기를 반복하는 이런 구질구질한 욕망의 굴레는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만국 소년들이 경험하는 모험담의 실체이다.

≪플레이보이≫를 사는 것이 어떠한 잘못도 아님에도, 누가 구체적으로 그것을 금지하지 않음에도 들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어린 체스터는 이미 알고 있다. 성의 욕망이 드러나는 것을 감시하고 있는 것은 종교(기독교, 마을 주민 전체가 일요일에 교회에 가니 지역사회 전체라고 볼 수 있겠다.), 가족(어머니, 아버지, 동생), 이웃(이웃 어른들, 옆집 사는 여자애), 학교(선생님, 학교 친구들, 룸메이트), 가게 점원, 여자 친구 등의 시선이며, 그리고 이 시선은 동시에 그것이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체스터 자신의 내면에 또한 자리 잡고 있다. 내면의 파놉티콘. 보는 자가 없더라도 보여지는 상황은 자기 검열의 상황에 빠뜨린다. 또한 체스터가 옆방 남자의 ≪펜트하우스≫ 컬렉션을 발견하고 그를 놀리듯이 자신도 남을 향한 하나의 시선으로 존재하게 한다.

이 과정이 무시무시한 것은 누구도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데에 있다. 누구도 성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이 매우 중요한 것임을 말하고 있으며, 동시에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 그래서 모두 내가 떠안을 짐이 된다.

홀로 짐을 떠안은 체스터의 고군분투를 보고 있노라면 오랫동안 의식에 떠오르지 않던 개인적 기억이 되살아난다. 체스터처럼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나는 중학생 시절부터 수 년 간 결벽증으로 남몰래 고통스러워했던 경험이 있다. 신체의 성징이 나타나면서 내 몸의 정자가 여자들(특히 함께 살던 어머니와 이모)을 임신시킬지도 모른다는 공포스러운 생각을 하게 되었고, 생각은 망상으로 그리고 분열증 초기로 발전하였다. 수은, 에프킬러와 같이 기화성 액체에 대해 특별히 혐오증을 갖게 되었고, 도저히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워 더 이상 못 살겠다는 절망에까지 이르렀다. 문제는 누구에게도 이런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고립된 상태에서 시름이 깊어가다 세상을 받아들이기로 타협을 보았던 것 같다. 살기 위해서.

애초에 성이란 합리성만 가지고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성은 가족과 사회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시스템이며, 그 안에 의식에 떠오르지 않는(드러나서는 안 되는) 심리적 부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에 대한 터부는 일정부분 어쩔 수 없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개방과 억압의 문제는 결국 정도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우리 사회는 그 정도에 있어서 매우 보수적이다.(최소한 캐나다보다는 더.) 편집자로서 이 책을 만들면서 우려했던 대로, 출간하자 역시나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경고장이 날아왔다. 세상이 얼마나 변했는데 아직도 간행물윤리위원회가 있나 싶겠지만, 요즘에 방통위에서 하는 일을 생각하면 그런 힘들은 여전히 사회에 건재하며 오히려 강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에 아주 넓고 깊게 뿌리내리고 있어서 때로 진보적 정치성 속에도 그런 기운을 느낀다. 그 진지함과 엄숙함과 정의로움 속에서.

이 힘들이 사회의 건전성을 얼마나 회복할지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건전성이 향상될수록 욕망은 어쩔 수 없이 왜곡되는, 이중적이고 정신분열증적인 상황 또한 그만큼 확대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짐짓 점잖은 척 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가장 음란한 나라가 탄생하는 것이다.

『플레이보이』의 마지막 장면은 성인이 된 체스터가 예전에 여자 친구였던 크리스에게, 둘이 사귀던 시절 언젠가 자기가 없는 틈에 그녀가 자기 방에서 혹시 『플레이보이』를 발견하지 않았을까 하고 속이 메슥거릴 만큼 고민했었다고 진지하게 고백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그 얘길 들은 크리스는 그저 한심하다는 듯 웃는다.

체스터: ···어쨌든, 그래서 난 제정신이 아니었지.
크리스: 그래, 너 확실히 제정신 아니거든.


연초에 방영되었던 <아마존의 눈물>을 통해 아마존 밀림에 살고 있는 조예족의 생활을 보면서 저 정도도 괜찮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13세 소녀의 성생활을 대하는 가족과 사회의 시선이 아주 자연스럽고 거리낌이 없다.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적이다. 어째서 체스터나 나 그리고 나의 세대는 이런 시선 속에서 성을 알지 못했을까.

아이는 성에서 자유로워짐으로써 훈육의 대상에서 성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반면 성이 부자유한 사회에서는 그 훈육 체계 안에서 아이로 머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소년들의 음란한 모험담도 여전히 끝나지 않는 것이다.


덧붙임

김대중 님은 만화가이며 새만화책 발행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