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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공룡트림] 존 버닝햄의 행복한 그림책 속으로

마음이 복닥거릴 때는 책을 들고 있기 보다는 잠을 자기 마련. 하지만 잠을 자도 쉽게 마음이 다독여지지 않을 때가 있다. 우연히 든 존 버닝햄의 동화책에서 사나워진 나의 마음을 다독거리는 따뜻함이 퍼진다.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그의 그림과 이야기 속에서. 친구를 찾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마음 한 자락을 꾸준히 내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이지만, 쉽지만도 않은 일인 것 같다.

착하다는 것은 어수룩한 것이고, 남에게 이용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치를 두지 않고 살아왔다. 이제 조심스레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잦은 분노와 눈물의 세월이 다 지나간 노년의 나를 상상하기도 했다. 그쯤 평화와 웃음이 많은 지혜로운 여성, 할머니가 되었을까? 되고 싶다. 존의 책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아름다운 노년의 뒷모습 ‘우리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손녀와 동무가 되어서 책도 보고, 소꿉놀이도 하고, 강에서 얼음지치기도 하고, 바닷가에 놀러가기도 한다. 그렇지만 서로 다른 것을 보고, 다른 말을 하고, 이해를 못하기도 한다. 그래서 말 한마디에 서럽기도 하다. 그런 할아버지가 아프더니, 덩그러니 할아버지가 앉아있던 의자만 남게 된다. 빈 의자는 낯설겠지만, 곧 아이는 익숙해질 것이다. 하지만 문득 할아버지의 빈자리를 떠올리게 되겠지. 그리고 그 아이도 어른/노인이 되면 그런 따뜻함으로 아이들/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우리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따뜻한 누군가의 모습으로.

현실에서 마주치는 노년의 모습은 불우하다. 자식을 대신해 손자를 양육해야만하고, 생존의 위협으로 온몸이 땀으로 젖을 만큼 뛰어다니며 파지를 줍는다. 은퇴의 나이에도 일을 놓지 못한다. 현실은 다른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 생존의 무게에서 조금 비껴선 여유를 가진 노년의 모습은 아름답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삶의 지혜로 손자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자식들 때보다는 사람에 대한 욕심도 적어지고 용인의 마음도 더 많이 생기지 않을까?

다정한 이웃, 검프 아저씨

강가에 살면서 배를 갖고 있는 마음씨 좋은 검프 아저씨. 아이들은 놀면서 싸우기 마련이고, 닭이 훼를 치고, 염소가 메에 거리는 것은 당연한 일. 장난을 치거나 때로는 서로 괴롭히게 될 것을 다 알면서, 한배에 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 모두의 특성을 알고 있지만, 기꺼이 배에 함께 탄다. 예상된 배위의 소동은 결국 배를 뒤집어엎지만, 모두들 햇볕에 옷을 말리고 차를 마시러 간다.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이 행복한 뱃놀이는 끝날 것 같지가 않다.

배가 뒤집어졌지만 누구도 쫄지 않고, 꾸짖음도 민망함도 없이 모두가 유쾌한 뱃놀이가 된다. 열두 폭 치마처럼 넓기 만한 검프 아저씨의 따뜻한 마음을 상상해본다. 이런 이웃, 친구, 선생님, 부모......... 이런 가슴 따뜻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따뜻한 사람을 그리워하는데 만족하는지 모르겠다.

버닝햄의 그림책에 소개된 한 가지 사건이 떠오른다. 그가 섬머힐 학교를 다닐 때, 학교창고 열쇠를 손에 넣게 된 후 창고에서 통조림이 바닥나도록 가져다 먹었다고 한다. 어느 날 교장선생님은 신문을 읽으면서 “통조림이 자꾸 없어지는데…….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지는 걸 원치 않는다.”며 조용히 손을 내밀었고, 그때서야 존은 교장선생님에게 열쇠를 돌려주었다고 한다. 뭐 다른 일은 없었다. 이런 경험과 삶이 그의 작품을 만드는데 큰 바탕이 되었을 것 같다.

못된 아이, 에두와르도가 사랑스러워진 비결?


이 대목에서 ‘세상에서 가장 못된 아이, 에두와르도’가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에두와르도는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꼬마다. 버릇없고, 시끄러운데다 지저분하고 심술궂은 녀석으로 악명이 자자하다. 어른들의 비난에 에두와르도는 점점 더 작아진다. 하지만 에두와르도가 우연히 던진 화분이 땅에 박혀서 잘 자라고, 동물에게 물을 뿌린 것이 목욕을 시켜주는 모습으로 보인다. 이런 오해는 이웃들의 칭찬을 불러일으키고, 에두와르도는 사랑스런 보통의 아이가 된다.

사람들의 평이란 것이 때로는 과장되고 오해인 경우도 많지만, 평에 따라 사람은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잘못된 칭찬의 위험도 있지만, 사람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으니 칭찬의 유혹은 크다.

현실과 공상의 세계 공존하는 ‘야, 우리기차에서 내려’


모두 배를 태우고 가는 검프 아저씨와 정반대의 느낌이 드는 제목. “야, 우리기차에서 내려!”, 지구환경의 악화로 생존에 위험을 느낀 동물들은 - 코끼리, 물개, 곰 등은 -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며, 기차에 타기를 원하고 주인공과 같이 신나게 논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꿈이었지만, 엄마는 “근데 집에 왠 동물들이 이렇게 많니?” 하고 묻는다. 이 책은 환경운동가에게 받친 것이라고 한다. 때때로 그의 이야기 속에서는 이렇게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며 유쾌한 반전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각대장 존의 유쾌한 반전


솔직히 상상력이 무척 부족한데다, 동물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지각대장 존’의 책장을 넘기면서 선생님과 같은 입장이었다. 책장을 다 넘기고 나서야, 킥킥 거릴 수 있었다. 존은 등굣길에 동물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호소하지만 선생님은 믿질 않고 존이 거짓말을 하며 지각한다고 몰아붙인다. 결국, 선생님 역시 동물들에게 위협을 당하고서야 존의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된다. 선생님은 존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존은 평소 선생님의 말처럼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것처럼 그냥 지나친다.

약자들의 모험과 연대, 보르카와 심프


버닝햄의 첫 작품인 기러기 보르카는 깃털 없이 태어나 하늘도 잘 날지 못하고, 추워서 헤엄도 치지 못한다. 엄마는 보르카를 위해 따뜻한 털스웨터를 떠주지만, 그걸 입고서도 여전히 날지도 헤엄도 치지 못한다. 겨울이 되어 따뜻한 곳을 찾아 나선 가족과도 헤어지게 된다. 슬픔에 빠져 강가에 이른 보르카는 우연히 배를 타게 된다. 배에서 다양한 잡일을 하며 뱃사람들과 같이 지낸다. 런던 큐가든에서 둥지를 틀게 된 보르카는 새로 친구도 사귀고 수영도 배우며 새로운 삶에 적응해간다.

작고 못생겨서 쓰레기더미에 버려진 개 심프는 개장수에게 잡혔다가 탈출한다. 떠돌다 우연히 어릿광대의 보살핌을 받게 된 심프는 그를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한다. 대포알을 대신해 발사된 심프의 재치로 가장 인기 없던 어릿광대는 서커스단에서 관객몰이에 성공한다.

부족하고 약하게 태어난 자들이 힘들게 세상을 헤쳐 나가고, 그들을 도와주는 친구와 동료를 만든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친구가 되고, 이것이 바로 약한 자들의 연대가 아닐까? 존 버닝햄의 단순한 그림과 짧은 이야기 속에서 훈훈한 감동은 당연한 것 같다.

버닝햄은 동화책에 그려진 검프 아저씨와 자꾸 닮아간다고 한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등이 모델이었던 우리 할아버지도 버닝햄의 모습과 많이 비슷할 것 같다. 그림을 좋아하는 엄마, 병역거부를 했던 아버지, 대안교육을 위해 여러 번 전학을 다니던 어린 시절, 대체복무를 하며 다른 세상을 많이 본 그의 경험이 상상력과 함께 책 곳곳에 녹아있다. 따뜻한 가슴과 손길로 작고 약한 사람들을 보듬으면서.

덧붙임

김보영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회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