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참으로 영화가 넘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멀티플렉스화 된 극장들은 수십 편의 영화들을 동시에 쏟아내고 ‘출발 비디오여행’이 영화 소개의 고작이었던 시대와는 비교 될 수 없을 만큼 많은 정보들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첫 영화 <기차의 도착> 시사회를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가졌으니 우리가 영화라는 매체를 접하게 된 건 100년이 조금 더 지났을 뿐인데 말이다.
영화(映畵)는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다. 물론 같은 의미이지만 조금씩 다른 느낌의 이름들이다. 그리고 그 이름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영화잡지들에서 확인 된다. 이제는 영화잡지의 고전이 된 '스크린'에서 부터 씨네21, 필름2.0, 무비위크 그리고 *키노에 이르기까지 (*1995년 5월 창간되었다가 2003년 3월 폐간된 영화 월간지)
이중 '키노'는 러시아어, 독일어로 영화를 뜻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 소개할 책 『키노아이』는 ‘영화의 눈’, '카메라의 눈‘ 쯤으로는 해석이 될 것 같다. 『키노아이』는 바로 영화감독 지가 베르토프와 그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얼핏 영화전공서적처럼 보이기도 한다. 쉽게 읽히지 않을 수도 있는 책이기도 하다. 감독의 이름 또한 낯설게 느껴진다. 지가 베르토프……. 하지만 키노아이는 낯선 이름의 감독 한 명을 알기 위해 읽어야 할 책은 아니다. 한 명의 영화감독을 통해 영화를 사유하는 새로운 방식에 접근해 가다보면 ‘영화의 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소비에트 혁명 이후 레닌과 스탈린 시대의 영화 이야기를 볼 수 있는 보너스도 있다.
카메라를 든 사나이
먼저 책의 주인공을 잠깐 소개하면, 그의 본명은 데니스 아프카디에비치 카우프만이다. 여러 활동가들이 ‘활동명’을 쓰는 것처럼 그도 지가 베르토프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당시 영화 카메라가 돌아갈 때 지가지가지가하는 소리가 났는데 바로 반복적인 카메라의 소리를 듣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베르토프는 소비에트 혁명 직후 인 1918년부터 뉴스릴을 편집 하는 것으로 영화에 입문한다. 그리고 1922년, “모든 예술 가운데 우리에겐 영화가 가장 중요하다”는 레닌의 선언 이후, 영화를 강력한 교육수단으로 보기 시작한 정부의 지원을 받아 ‘키노 프라우다(Kinoprovda 진실영화)’와 같은 뉴스릴과 그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카메라를 든 사나이’등의 작품을 만들었다.
베르토프는 ‘키노 프라우다’ 이후 아내 엘리자베타 스빌노바와 동생 미하일 카우프만과 함께 ‘영화인(Kinoki)’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키노아이 운동을 전개한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 운동을 통해 베르토프는 당시의 신경제정책인 네프(NEP)의 타협을 거부하고 내러티브를 근간으로 하는 전통적인 영화 연출법을 제거할 것을 주장하면서 소비에트 혁명의 진행과정을 민중에게 알리고 새로운 사회주의 건설에 힘을 보탠다.
마술사로서의 감독과 마법에 빠진 대중
책은 지가 베르토프가 썼던 노트와 일기 그리고 그가 기획했던 영화 프로젝트는 물론이고 신문기사와 연설내용을 망라하고 있다. 특히, 키노아이가 만들어 지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대중을 설득하는 그의 연설 등이 흥미롭다. 그 중 ‘영화인’ 선언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우리는 마술사로서의 감독과 마법에 빠진 대중의 공모에 반대 한다.
오직 의식만이 모든 형태의 마법의 지배력과 싸울 수 있다.
오직 의식만이 굳은 신념과 견해를 가진 인간을 만들 수 있다.
우리에겐 스쳐지나가는 아무 제안에도 순종하는 의식 없는 대중이 아닌,
의식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의식 혹은 잠재의식 (‘영화인’ 선언에서)-
‘마술사로서의 감독과 마법에 빠진 대중의 공모’는 오히려 2010년 우리의 자화상일지도 모르겠다. 온갖 마술을 부리는 영화들의 마법에 빠져 진실을 보지 못하는 현실. 베르토프가 일찍이 예기했던 그 공모에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영화의 진정한 기능이 부르조아의 감성적인 소비가 아니라 건강한 프롤레타리아가 서로를 보고 이해하면서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 것으로 보았던 베르토프가 종로에서 명동에서 멀티플렉스 극장에 걸린 수많은 영화와 관객들을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관객이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영화를 소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연설 할 수 있을까?
카메라의 눈으로 혁명을 꿈꾸다
베르토프는 영화를 통해 혁명을 꿈꾸었다. 특히, 영화의 메커니즘에 주목하고 이러한 영화의 기계적 특성과 예술의 결합을 통해 세계 변혁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뉴스릴류의 다큐멘터리뿐만 아니라 공상과학영화 프로젝트까지 영화의 폭을 넓히며 소비에트 혁명의 전선에서 활동했다. 베르토프는 그의 영화적 이론을 현장에 고스란히 반영하며 현실의 실제 이미지가 가진 힘을 이끌어 내어 진실을 이야기했던 감독이며 소비에트 혁명보다 더욱 혁명적인 사상을 실천해 낸 혁명가였다.
그러나 지가 베르토프는 왕성한 활동만큼이나 많은 비판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 내용의 핵심은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닌 형식을 중요시 하는 예술영화를 만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어렵다는 것. 때로는 그의 혁명에 대한 강한 의식이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특히, 혁명의 후반기에 들어선 스탈린 치하 대규모 관료화 기간 동안, 소비에트 영화산업에 강제와 모순이 증대 되면서 가져온 혹독한 작업현실 속에서 작품을 만들다가 1954년 모스크바에서 숨을 거두었다.
누가 진실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영화를 필요로 할 것인가?
만일 당신이 진실을 담고 있는 영화를 만들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만들지 말라.
그런 영화들은 필요 없다. 모든 수단들은 진실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베르토프의 이러한 생각은 장 뤽 고다르 등 프랑스의 누벨바그 감독들을 비롯해 후대 영화감독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카메라의 눈(Kino-Eye)으로 혁명을 꿈꾸었던 베르토프의 주요 작품들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The Man with the Movie Camera (카메라를 든 사나이), Kino Eye (키노아이), Enthusiasm (열정), Soviet Propaganda Animation (소비에트 프로파간다 에니메이션), Kino Pravda (키노 프라우다)
덧붙임
호야 님은 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