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30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상임활동가들의 고민이 깊었습니다. 30년 동안 해온 활동들을 늘어놓는다고 사람들이 찬찬히 살펴보며 기억해주기는 어려울 테니까요. 30주년을 앞둔 고민만은 아닙니다. 사랑방을 소개하는 일은 좀 어려운 데가 있습니다. 요즘 뭐하냐고 물으면 그때마다 할 말이 있는데, 뭐하는 단체냐고 물으면 말문이 막힌달까요.
“사랑방이 하는 운동을 제일 잘 설명할 말은 ‘엮다’ 아냐?” 회의 중 정록이 말을 꺼냈습니다. 최근 하는 활동들은 더욱 그랬습니다. 여러 단체들과 함께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기후정의동맹, 길내는모임 같은 활동들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사랑방은 파견 단체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연대체 활동에 집중하다 보니 정작 사랑방은 무엇을 하는지 말하기 어려웠는데 엮는 일이 그런 사랑방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인권운동사랑방을 만든 활동가들이 처음 모였을 때에는 따로 단체를 만들겠다는 뜻은 아니었다고 해요. 오히려 여러 운동이 제 길을 찾아가며 함께 풍성해질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일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인권’의 본뜻을 찾아가기 위한 공부와 토론, 여러 자료들을 언제든 찾아보며 역사를 이어갈 수 있는 자료실, 더욱 널리 인권에 대한 이해를 나누기 위한 교육실 등이 초기 주요 사업이었던 이유도 그렇다고 합니다. 여러 단체가 각각 자신의 활동을 벌이다 보면 함께 대응해야 할 일을 놓치게 될 수도 있는데 그런 자리에서 사무국 역할을 자처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지금 인권운동사랑방의 활동은 30년 전과 많이 달라졌지만, 지금의 모습도 그때 품었던 기운이 자라나 만들어진 것일 듯합니다.
30년 동안 무엇을 엮어왔는지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돌아보니 엮이는 일이 먼저였다는 게 보이더군요. 누군가 꺼내는 증언, 고통, 살아가는 이야기들에 붙들려 그걸 더 잘 전해보자고 이야기를 엮기 시작했고, 존엄을 훼손하는 세상에 누군가 질문을 던지고 요구를 내걸기 시작할 때 거기에 엮이며 권리의 언어를 엮어냈습니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다 쫓아다니지는 못하지만 삶을 건 투쟁들이 드러내는 시대의 조건을 살피며 해방의 조건을 엮어가자는 도전을 이어왔습니다. 그러니 ‘기꺼이’라는 수식어는 ‘엮이다’와 더 어울리는 듯도 합니다.
2월 4일, 이태원참사 100일 추모대회가 열렸습니다. 녹사평역에 있는 분향소에서 출발해 서울광장까지 행진을 했고, 서울광장에 합동분향소를 마련했습니다. 서울시 공무원과 경찰이 막으려 시도했고, 지금도 철거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히고 있습니다. 위태로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유가족들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세월호 참사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세월호 참사 100일이 되던 날, 유가족들은 안산에서 1박 2일을 걸어 서울광장으로 왔습니다. 서울광장에는 애도의 마음을 나누려는 시민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추모의 시 낭송과 음악회를 마치고 다시 광화문광장으로 행진하려던 유가족을 경찰의 차벽이 막아섰습니다. 경찰이 비키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겠다며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던 유가족은 새벽이 되어서야 광화문광장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10.29 이태원참사를 마주하며, 마치 9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괴로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달라졌다는 점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9년 전에는 ‘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라는 말조차 낯설었는데 지금은 더욱 많은 사람들이 권리를 말합니다. 세월호참사에서는 정부의 책임을 묻는 일을 머뭇거리는 시기도 있었는데 이제 재난참사를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감각은 더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졌습니다.
9년 전 무엇에 엮이는 것인 줄도 모른 채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 상황실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유가족들이 꺼내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재난참사가 인권의 문제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습니다. 인권활동가들이 함께 ‘존엄과 안전 위원회’를 만들어 여러 활동을 펼치고, 천 여 명의 시민들이 풀뿌리토론으로 모은 내용을 바탕으로 ‘4.16인권선언’을 함께 만들면서 손에 쥘 수 있는, 풀어 말할 수 있는 권리의 언어와 요구들이 생겼습니다. 인권운동사랑방에는 ‘노란리본인권모임’이 만들어졌고 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를 밝히는 자료집과 핸드북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서로 엮고 엮이며 무언가 꾸준히 만들어내는 시간이 이어져왔더라고요. 이 중 무언가를 인권운동사랑방이 했다고 말하기란 여전히 어렵습니다. 얼마전 총회에서 평가 의견을 나누던 중 돋움회원 한 분이 “여러 활동을 했는데 사랑방에 남은 건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질문을 했습니다. 상임활동가들 대부분 당황했는데요, 활동을 하면서 사랑방에 무언가 남긴다는 생각 자체를 별로 해본 적 없어서입니다. 그래서 ‘기꺼이’라는 수식어가 ‘엮다’와 만나도 어색하지는 않습니다만 서로 엮고 엮이는 시간 동안 사랑방에 쌓인 무언가를 밝히는 것은 사랑방의 숙제로 남는 듯합니다.
엮이는 일은 기꺼운 마음을 낼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엮는 일도 무엇이 만들어질지 모른 채로 시작되는, 조금은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엮고 엮이는 일이란 어쩌면 시대에 휘말리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휘말리는 일. 휘말린 자리에서만 볼 수 있는 세계의 모습에서 기어이 해방의 깃발을 세우는 일. 사랑방을 엮어준, 그리고 엮여준 수많은 이들 덕분에 휩쓸리지 않고 끊임없이 존엄의 자리를 넓힐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마운 마음으로 우리는 또 누군가를 기꺼이 엮으려고 합니다. 그게 엮이는 일인 줄 아니 더욱 기꺼운 마음으로.
<기꺼이 엮다 - 인권운동사랑방 30년>
지난 30년 사랑방이 엮어온 시간, 사랑방과 기꺼이 엮인 30명 동료/후원인의 이야기를 인권운동사랑방 30주년 기념 홈페이지로 엮었습니다. 홈페이지에 들러 살펴보시고 축하메세지도 남겨주세요.
https://www.30th-sarangbang.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