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리본인권모임’의 마지막 오프라인 모임을 3월 중순에 가졌습니다. 최근 <재난인식론과 재난조사의 정치>라는 논문을 쓴 상은 님을 모시고 진행한 간담회였어요. 아마 이 글이 <사람사랑> 지면에 노란리본인권모임에 대해 쓰게 되는 마지막 글이 될 것 같은데요. (노란리본인권모임을 마무리하면서 새로운 자원활동가모임 기후위기와 인권 ‘노발대발’이 3월 말에 첫 발자국을 내딛었습니다.) 저는 간담회에서 인상 깊게 들은 몇 가지 이야기를 써보겠습니다.
재난인식론
상은 님은 먼저 재난인식론에 대해 설명해주셨는데요, 재난인식론이란 재난을 인식하고 그 원인을 파악하는 관점인데, 여기에는 사법적 관점, 기술적 관점, 구조적 관점이 있다고 합니다. 사법적 관점이란 법적 규정을 지키지 않은 개인에 의해서 재난이 발생한다는 관점이고, 법적 책임을 규명하는 것을 재난조사의 중심에 놓게 되다보니 법적 전문성과 친화적이라고 합니다. 기술적 관점은 재난이 기술 또는 기술의 운영에서 발생하는 실패 때문에 발생한다는 관점이고, 과학적 지식에 의해 재난의 원인을 규명할 수 있다는 과학전문가주의와 친화적이라고 해요. 구조적 관점은 재난의 원인에 대해 기술적 관점과 사법적 관점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면서 등장했다고 하는데요, 기술적·인적 실패뿐만 아니라 사회구조 전반으로 시야를 넓혀 다층적으로 재난의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는 관점이라고 합니다.
사법적 접근과 구조적 접근의 경합
사법적 접근과 구조적 접근의 경합이라는 관점을 제시하면서 상은 님은 지난 7년간 진행된 세월호 진상규명활동의 모든 과정을 조목조목 복기해주셨습니다.(정말 밀도 있게 설명을 해주셔서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었어요!!!)
사실 평범한 사회인의 상식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재난에 대한 사법적 접근과 구조적 접근이 균형감 있게 추구되어야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될 것 같은데요. 지난 7년간 세월호 특조위, 선체 조사위, 사회적 참사 조사위를 거치며 구조적 접근은 약화되고 사법적 접근은 강화되면서 결국 두 가지 과제가 불균등해진 것(또한 두 가지 과제 모두 제대로 달성되지 못한 점)이 현재 세월호 진상규명운동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재난에 대한 사법적 접근방식이 세월호 특조위 활동에서 많이 나타났었다는 이야기는 몇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법률가 중심의 위원구성, 과거사위원회의 모델을 기초로 법안을 만들다보니 사법적 진상조사모델을 가지게 되었다는 지적, 피해자의 신청사건을 처리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면서 자체조사계획을 갖지 못했던 한계 등 이런저런 이야기였습니다. 이와 관련해 이번 강의에서는 세월호 특조위의 안전사회분과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 깊게 들렸어요.
검경합동수사본부를 중심으로 사법적 대응으로 일관했던 이전의 재난조사와 다르게 세월호 참사는 재난의 원인에 대한 구조적 접근의 중요성을 사회적으로 환기시켰고, 이에 따라 세월호 특조위에 진상규명분과 이외에도 안전사회분과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안전사회분과가 구성되어 안전사회를 위한 정책제안을 시도할 수 있게 된 것은 당시 진상규명운동을 벌였던 사회운동의 큰 성과로 평가됐다고 해요. 명실상부 세월호 특조위는 책임자 처벌을 위한 사법적 접근뿐만 아니라 재난 예방을 위한 사회구조적 전환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추구하는 조사위원회가 된 것이지요.
그런데 실제로 활동을 해보니 진상규명분과는 사법적 처벌을 목적으로 책임규명에만 집중하고, 안전사회분과는 정책제안에만 집중하게 되면서 실제로는 구조적 관점의 재난조사가 실종되어 버렸다고 합니다. 진상규명분과와 안전사회분과의 분리되면서, 사건에 대한 책임규명과 구조적 원인규명을 이어주는 중간 범위 수준의 조사활동이 누락되었다는 것인데, 이런 한계를 극복하는 것도 재난조사의 큰 과제인 것 같습니다.
정치과정으로서 재난조사
3년 전 노란리본인권모임에서 올바른 국가재난조사기구의 설립에 대해 워크샵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즈음 정부가 국가재난조사기구를 설립하겠다는 발표를 하고, 국회에서도 몇몇 의원들이 국가재난조사기구에 대한 법률안을 발의했던 상황이어서 노란리본인권모임도 이 문제에 대해 워크샵을 진행했던 것이죠. 그래서 해외의 여러 사례를 검토하면서 국가재난조사기구는 독립적이며 상설적인 기구여야 하며 피해자의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정치권, 정부기구, 사법기관으로부터 독립적이어야 재난에 대한 객관적인 조사를 할 수 있고, 조사활동의 전문성을 쌓아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설기구여야 한다고 토론했던 것이죠.
당시 워크샵을 하면서 저는 재난조사기구에 대한 현실 정치의 영향력을 어떻게 하면 차단할 수 있을까? 그래야만 제대로 된 재난조사가 가능하지 않을까? 이러기 위한 법적인 조건 등은 무엇일까 고민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이번에 강의를 들으면서 다시 생각해보니 정치과정과 무관한 재난조사기구의 구성이라는 저의 사고방식은 그야말로 관념론 중의 관념론이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현실 정치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인 재난조사기구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죠. 강의를 들으면서 오히려 재난조사를 정치과정이라고 직시하는 게 훨씬 현실적인 관점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의 어떤 재난 대응사례를 보더라도 정치적 영향에서 자유로운 재난조사활동은 없었다고 해요. 정부의 조사방해도 비일비재하고, 조사기구의 구성을 둘러싸고, 혹은 조사의 범위와 대상을 어디까지 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갈등적인 입장이 항상 충돌해왔다는 것이죠. 결국 재난조사는 어떤 객관적인 과정이라기보다는 여러 정치적인 갈등이 응축되고 투쟁하는 매우 정치적인 과정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건데, 이를 재난조사기구의 구성과 활동 전 과정에 걸쳐있는 가장 근본적인 조건으로 여기고 재난조사기구의 전략을 구상하는 것이 훨씬 더 의미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재난조사와 사회적 진실
재난조사를 통해 밝힌 진실의 대중적 수용이라는 문제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2년 전 노란리본인권모임에서 <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 자료집을 만들면서 ‘진실에 대한 권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대로 요약하자면 대략 이런 이야기인데요.
‘재난조사가 단지 객관적으로 입증된 사실들을 수집하고 확인하는 것에 멈춰서는 안된다. 객관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라 하더라도 공동체의 시민들 중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은 사실에 불과할 뿐 진실일 수 없다. 재난조사를 통해 밝히게 된 진실이 사회적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진상규명의 내용이 시민들과 사회에 충분히 수용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진상규명의 전 과정에 피해자를 포함한 시민들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등등’
이번 간담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도 다시 상기할 수 있었습니다. 선체조사위는 침몰의 기술적 원인 규명을 목표로 활동했는데, 내인설과 외인설로 갈라지면서 대단히 복잡한 과학적인 기술논쟁을 반복했고, 결국 침몰원인에 대한 합의된 결론을 내리지 못하게 되었지요. 선체 조사위 활동을 평가하면서 상은 님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실제로는 모르는 것이 더 많아졌다”고 하셨는데, 이 말이 정말 굉장히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기술논쟁을 통해 우리는 더 많은 기술적 사실들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정작 세월호 참사의 진상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더 많아졌다는 뜻이겠지요. 뭔가 생각할 거리를 듬뿍 던져 주는 느낌이었어요.
재난조사기구의 진상규명활동이 성공하려면, 사법기구의 법적 판결 못지않은 자체적인 권위와 영향력을 가지는 것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요? 철저한 진상조사는 당연히 추구해야 하는 것일 테고, 나아가 재난조사기구가 밝힌 사실들이 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의 시민들에게 얼마만큼 대중적으로 수용되고 있는가, 재난조사의 결과를 얼마만큼 공동체가 합의하는 사회적 진실로 만들고 있는가, 오히려 이런 문제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닐까요? 재난조사를 통해 밝힌 진실을 사회적 진실로 만들기 위해 재난조사기구가 여러 층위의 실천을 구상하고 기획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면 너무 할 일이 많아지는 것일까요???)
중구난방 지난 강의 이야기를 써봤는데요. 그날 1시간 30분 동안 쉬지 않고 꼼꼼하게 이야기를 해주신 상은 님께 지면을 빌어 다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상은 님은 논문에 썼던 내용을 보완해서 올해 가을에 책으로 출판할 계획이 있다고 합니다. 한국의 재난조사에 대한 연구로는 처음으로 나오는 책이라고 하던데, 그만큼 의미 있는 출판이 될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도 꼭 사서 볼께요~~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