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게 두려워진 사람들이 있다. 아이는 없는데 꽃이 피는 게 싫어서 자꾸 꽃을 꺾게 된다고 말하는 엄마가 있다. 그러나 봄을 피해 숨을 수가 없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아홉 명의 실종자가 차가운 바다 속에 기약 없이 갇혀 있기 때문이다. 작년 한 해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세월호 특별법도 법전 안에 기약 없이 갇혀 있기 때문이다.
법전 안에 갇혀 있는 4.16 특별법
2014년 11월 대한민국 국회는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아래 4.16특별법)'을 제정했다. 희생자 가족들의 행진과 단식과 농성으로, 공감과 연대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국민의 힘으로 이룬 일이었지만 기쁠 수만은 없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갖는 특별법에 대한 요구는 박근혜 대통령이 언급한 가이드라인을 넘지 못하고 좌절됐다. 수개월에 걸친 투쟁의 결과라기에는 미흡하고 부족한 특별법이었다. 가족과 국민이 원하고 바라는 모든 걸 4.16특별법에 기댈 수 없다는 점은 이미 분명했다. 그러나 법이 법인 이상 법 노릇은 해야 한다.
4.16특별법은 참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다. 여전히 우리는 4월 16일 아침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사실 외에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사건의 구체적 상황, 사건의 발생 원인과 조건, 사건이 벌어진 배경, 그리고 이 사건에 누가 어떻게 연루되어있는지 아무것도 분명하지 않다. 작년에 진행된 검찰과 경찰의 합동수사, 감사원의 감사, 국회의 국정조사 등으로 확인된 사실들도 있다. 그러나 진실에 대한 권리는 주어진 사실에 접근할 권리 이상이다. 진실은 인권이다.
'불처벌 방지 행동을 통한 인권의 보호와 증진 원칙'은 "모든 사람은 극악한 범죄의 자행에 관하여, 과거의 사건에 대한 진실을 알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갖는다"고 선언한다. 피해자의 가족에게는 피해자가 처한 운명에 대해 알 권리이며, 우리 모두에게는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약속받을 권리다. 사건에 대한 조사가 독립적이며 효과적으로 수행되어 신뢰할 수 있는 역사적 기록을 남기는 것은 우리 모두의 운명에 대한 권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4.16특별법은 하루빨리 법전 밖으로 나와 움직여야 한다.
특별법이 갇혀 있는 이유
며칠 전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아래 특위) 이석태 위원장의 기자회견을 통해 드러난 사실은 충격적이다. 특별조사위원회 실무지원단에 파견된 공무원이 특위의 주간 활동 내역과 다음 주 활동 계획이 담긴 문서를 "청와대, 새누리당, 해양수산부, 경찰" 등에 이메일로 유출해온 것이다. 법이 법전에 갇혀 특별조사위원회를 출범시키지도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이 보장받아야 할 독립성이 체계적으로 훼손되고 있는 것이다.
특별조사위원회의 위원이 추천될 때부터 우려는 있었다. 17명의 위원은 여야 추천 각 5인, 대법원과 대한변협 추천 각 2인, 피해자단체 추천 3인으로 구성된다. 문제는 새누리당이 추천한 5인의 면면이었다. 상임위원인 조대환은 박근혜 대통령의 싱크탱크 역할을 한 '국가미래연구원'의 발기인과 이사를 지냈던 인물로 현재 특위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 "정부를 왜 끌고 들어가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바 있는 고영주 위원, 세월호 특별법에 대한 유가족들의 요구를 '억지'라고 말한 바 있는 차기환 위원 등도 특위의 앞날을 걱정스럽게 했다.
우려는 곧 현실로 드러났다. 문건 유출도 처음이 아니다. 지난 1월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였던 김재원 의원이 특위를 향해 '세금 도둑'이라는 발언을 했을 때도 파견 공무원이 김재원에게 내부 문건을 짜깁기해 전달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김재원의 막말 직후 황전원 위원이 특위 예산안을 "황당하고 터무니없다"며 기자회견을 열었고 조대환 위원은 설립 준비단의 파견 공무원들을 철수시켰다. 2월 초 조대환 위원은, 120명 정원을 둘 수 있게 되어있는 법의 취지가 무색하게 60명의 직원으로 특위를 구성하겠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직제 예산안을 제출했다.
특위와 함께 갇혀 있는 우리의 권리
상황을 지켜볼 수만은 없는 가족들이 특별조사위원회를 방문했고 이후 직제예산을 규정한 시행령안이 그나마 현실적인 수준으로 마련되었다. 특위는 지난달 17일 정부에 시행령안을 보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부는 공포하지 않았고 답변조차 없다. 세월호 인양 계획 검토를 마쳐놓고도 인양 계획을 내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을 뚜렷한 이유도 없이 방치하고 있다. 정부여당은 여전히 특위의 정원을 줄이고 예산을 줄이고 직제를 무력화시키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직무유기를 넘어 의도된 방해다.
특위는 진상규명, 안전사회, 지원을 각각 다루는 세 개의 소위원회로 구성된다. 진상규명 소위원회는 참사의 정황과 직간접적 원인 등을 조사하여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업무를 맡는다. 수사와 기소의 권한은 특별법에 담지 못했지만 자료제출명령, 임의동행, 청문회 등의 권한을 사용해 조사를 진행할 수 있다. 안전사회 소위원회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종합대책을 마련하는 업무를 맡는다. 지원 소위원회는 참사의 피해자들이 일상으로 회복할 수 있도록 필요한 사회적 지원을 점검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 모든 것은 4월 16일을 기억하는 우리의 약속이기도 하다. 진실을 밝히겠다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마지막 한 사람의 고통까지도 함께 하겠다고 했던 약속들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권리이기도 하다. 돈보다 생명이 우선이며, 위험에 처한 사람은 누구든 구조될 권리가 있다. 누군가 목숨을 잃더라도 가족을 만날 권리가 있다. 어떤 참사의 고통도 모욕되어서는 안 되며 어떤 보상도 진실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이는 정부여당의 모습은 방향이 다르다. 참사의 진실이 밝혀지기보다는 가려지길, 안전한 사회를 위한 대책이 근본적이기보다는 겉치레에 그치길, 피해자에 대한 지원이 충분하기보다는 생색내기에 그치길, 정부여당은 바라고 있는 듯하다. 정부가 방해하는 것은 그저 특위의 출범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인권을 지속적으로 가두고 있다. 가족도, 국민도 이러자고 특별법을 요구한 것이 아니다.
특위의 독립성은 형식의 문제가 아니다
특위가 독립성을 가진다는 것은 독립적으로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국가기구라는 뜻이다. 특위의 독립성은 형식의 문제가 아니다. 특별법 제정을 위해 힘을 모아온 가족과 국민의 의지가 계승되느냐 내팽개쳐지느냐의 문제다. 무엇보다도 특위 스스로 독립성을 지켜내야 한다. 특히 특위 내부의 일부 위원이 독립성을 스스로 해치는 발언을 일삼는다거나 직제와 예산을 스스로 깎아내리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어떤 기관의 추천을 받았든 어떤 내력을 가졌든 특위 위원으로 임명된 이상 특위 위원으로서 국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또한 특위 출범을 가로막으며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도를 버리지 않는 정부여당은 당장 방해공작을 중단해야 한다.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부터 정부여당은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진실과 안전에 대한 요구를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 왔다. 책임져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책임은 회피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당장의 문책이 두려워 진실과 안전을 가로막는다면 국민의 힘은 참사의 책임을 묻는 데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책임을 기꺼이 지려는 자세로 성역 없는 조사, 엄중한 문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가족과 국민은 기회를 줄 것이다.
미흡한 특별법 제정이 남긴 절망 때문에 어쩌면 우리 역시도 특위를 방치해왔다. 그러나 수사권과 기소권은 독립성으로부터 발현되는 권한이지 독립성을 보장하는 전제가 아니었다. 지켜보고 감시하고 채근하는 국민의 힘이 독립성의 조건이다. 법이 멈춘 자리에서 다시 움직이게 하는 힘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법을 세운 열망과 의지를 상기해야 할 때다. 진실과 안전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법이 다 담을 수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특별법은 우리가 손에 쥔 여러 연장 중 하나다. 손에 쥔 연장을 내려놓아야 할 이유가 우리에게는 없다. 가족들에게 희생자의 임종을 그려줄 붓이고, 우리 모두가 닿아야 할 진실의 시간을 채울 물감이라면, 더욱더 단단히 쥐어야 한다. 연장은 쓸 궁리를 하는 만큼 쓰임새가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