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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인(in) 걸] 마냥 ‘시크한 차도녀’가 될 수 없는 ‘10대 여성’, 나의 담배 연기

1월 1일이 되었다. 집에서 나와 편의점에 들러 드디어 '합법적으로' 담배를 사고 한 대 피웠다. 새해 추운바람이 싫어 집에 들어갔다. 아, 니코틴이 부족해. 방에 들어가서 삐거덕 거리는 창문을 조심스레 두 손으로 열었다. 마침 서랍에 성냥이 있어서 불을 쉽게 붙였다. 천천히 담배를 음미할 새도 없이 누군가 화장실 가는 소리에 불을 끈다. 서둘러 페브리즈를 온몸에 뿌리고 부엌에서 태연히 물을 마시고 안방으로 향한다. '다행히도' 아빠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 들키지는 않았을 거다.

2년 전쯤이었나. 이사 오고 나서 드디어 내 방이 생겼다. 뻐끔뻐끔 흰 연기들로 내 방 인증을 하고 서랍 속 필통에는 꽁초가 쌓여갔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 엄마한테 꽁무니가 잡혔다. 하지만 엄마는 아빠한테 '고자질'하지도 않고 쉬쉬했다. 아빠한테 내 흉을 보는 것이 큰 즐거움 중 하나인 엄마일 텐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 유례없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엄마는 항상 '아빠랑 맞담배라도 피겠다는 거야?'라고 화냈다. 그전엔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지금은 해보고 싶기도 하다. 물론 그 후, 아빠한테도 걸렸다(나의 덜렁증;). 아쉽게도 맞담배는 아직 이다.

담배를 핀지 이제 6년쯤 되었나? 지금은 몇 살이냐고? 올해로 이제 20살이 되었다. 여태껏 담배에 대한 고민이라곤 ‘담배 뭐가 새로 나왔지?’, ‘돈 없어서 금연하게 생겼네…….’ 정도였는데 이제 고민해 보려고 한다. 내가 10대이자 여성으로 그 모진 시련들을 겪었지만, 여전히 담배에 불붙이고 있는 이유를.

안방에 있던 아빠 담배를 몰래 핀 것이 처음인지, 친구가 물려 준 말보루 레드의 숨 막히게 무겁던 연기가 처음이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어느 특별한 이유, 걱정이나 근심거리가 있어서 담배를 처음 물었던 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중독이라 말할 수는 없는 정도로 지금까지 펴오고 있다. 내가 겪은 '모진 시련'은 아마도 학교를 자퇴한 후부터였을 거다. 자퇴를 한 후,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는데 사람들이 내 흡연에 대해 걱정(?)해주기 시작했다. 길거리에서 나를 보고 머나먼, 아님 영원토록 없을 뱃속아이 걱정은 물론이고 심지어 우리 엄마아빠가 날 어떻게 키웠을지 까지 걱정해주신다. 참 감사하지만, 죄송하게도 난 싫다.

[설명: “너 화장실에서 쪼그리고 배웠니? 제대로 당당하게 피워라.”(영화 ‘여배우들’에서 윤여정이 김옥빈에게 던진 대사)]

▲ [설명: “너 화장실에서 쪼그리고 배웠니? 제대로 당당하게 피워라.”(영화 ‘여배우들’에서 윤여정이 김옥빈에게 던진 대사)]



내 주위 여자 친구들은 대부분 담배를 핀다. 그리고 그 중 나도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었다. 오히려 남자애들은 담배 피는 것이 허세였지만, 우리들은 그냥 자연스럽게 일상이 되었던 것 같다. 물론 그래서 좋다는 건 아니다. 그런데 왜 남자애들은 허세가 될 수 있고, 여자애들은 처음 소개팅 나갈 때는 '예의상' 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걸까? 좀 새어나가는 이야기이지만, '내 몸을 지키자'는 말이 왜 여자한테 더 잘 어울리는 말이 된 걸까? 학교를 다녔을 때에도 ‘폐 검사(X-ray)해서 담배 핀 거 걸리면 어쩌지’ 하며 소리 내서 걱정하는 애들은 전부 남자였다. 난 물론 '똑똑해서', 그 검사로 흡연여부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지만, 다른 여자애들도 나처럼 검사해도 걸리지 않는 걸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학교 안에서 여성흡연자는 볼 수가 없었다. 한 학년 중에 담배 펴서 걸린 애들이 줄서서 단체로 벌서고 있을 때도 여자는 없었다. 뭔가 투명 인간 기분이다.

한 번은 친한 비흡연자 남자애들이랑 만난 적이 있다. 그리고 난 언제나 그랬든 자연스럽게 담배를 피는데 다들 놀란 표정으로 '너 담배 피워?'라고 묻는다. 그 다음으로 '내 주변에서 담배 피는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라는 말이 이어졌다. 엉? 이상하다. 내 주변 여자들은 담배 피는 사람이 많은데, 이 친구들 주변에는 담배 피는 여자가 나 하나라니. 물론 남자애들과 있을 때만 이리 불편한 건 아니다. 얼마 전엔 나보다 2살 많은 언니무리들과 같이 술을 마시는데 어색하고 할 말도 없어서 담배를 폈다. 그 언니들이 다 담배를 물고 있기도 했고, 같이 피웠던 적도 있어서 아무런 긴장 없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한 언니가 정색하더니 진지하게 '너 담배 그만 펴.'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뭐지?’ 하고 그냥 무시하고 계속 피다가, 언니가 자기를 무시하는 거냐며 한 대 때릴 것 같아서 아까운 담배를 껐다. 같이 술 마시고 있는데 담배는 안 된다니, 아이러니하다. 내가 아직 성인이 되기에는 며칠이 남아서 그랬다고 하기에는, ‘담배가 뭐 길래?’ 라는 질문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난 그렇게 담배 불을 끄고 나서, 그 언니가 담배를 피라 말라할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이런 생각이 들고 나서는 담배를 다시 피고 싶어졌다. 그런 사람 앞이니까 더 담배가 당겼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일 때, 예를 들어 지하철 앞에서 남자들만 나란히 서서 담배 피고 있을 때, 담배가 간절히 생각난다. 내 몸에서 '니코틴이 필요해'라고 외쳐서 필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실제로 피고 싶은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담배에 불을 붙인다. 담배를 피우면 느껴진다. 10대 여성인 내가 담배를 핀다는 건, 원하든 원하지 않던,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받는 일이다. 그래서 가끔은 작은 반항 같다. 사람들의 달갑지 않은 시선이 본의 아니게 내가 담배를 질리지 않고 계속 피워나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성 친구 중에 같이 담배 핀지 오래된 친구가 한 명 있다. 걔랑 나랑 그리고 다른 흡연친구들 사이에서는 담배를 피울 때, 여자냐 남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들키지 않고 담배를 필 수 있는 장소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 친구네 집에 놀러간 적이 있다. 나처럼 그 친구도 덜렁거려서인지 부모님한테 담배 피운 것을 들켰다. 그리고 혼나기도 했다. 그러나 나와 그 친구의 상황이 다른 건 걔네 부모님은 그 친구 방에 재떨이를 놓아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 친구 말고도 다른 이성 친구 중에는 방에 재떨이가 있는 친구들이 꽤 있다.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다른 여자 친구네 집들은 재떨이는커녕 매일 혼나고 또 혼날 뿐이다. 남자 애들 부모님만 쿨 한 거라 보기에는 찜찜하고 억울하다.

다른 동네 친구들에 비해, 난 동네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길빵(길에서 담배 피우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나도 동네에서 필 때는 나도 모르게 조심하는 것들이 있다.

1. 욕하면서 피지 말기
2. 침 뱉으면서 피지 말기
3. 탈색한 머리 숨기기
4. 양아치로 보이지 말기

1.2.3.4.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이런 원칙을 세워 담배를 피우니 나 자신도 어이가 없다. '나는 착한아이니까 담배 펴도 되요'도 아니고 말이다. 나 말고도 '우리끼리'가 아닐 때 담배를 피우지 않는 여자 친구들은 꽤 많다. 그 친구들은 알고 있다. 그리고 나도 알고 있다. 지금 우리가 담배 피우면 마이너스+마이너스 요인이라는 사실을. 분명 20살 넘어서 담배 펴도, 우리한테 담배 피우는 것 가지고 왈가왈부할 사람들은 많다. 다만 우리가 10대일 때 좀 더 확실히 ‘욕할 거리’가 생긴다. 담배 피울 때 '나이도 어린것이'로 싸잡아 뭐라고 하시는 분들! 사람 골라가면서 뭐라 하지 말고, 할 거면 확실하게 하시죠. 물론 기왕이면 안 듣는 게 더 좋지만요.

담배가 몸에 좋은 게 아니라는 거 안다. 하도 많이 들어서 안다. 그리고 이 글을 다 읽은 사람이라면 내가 흡연예찬을 하기 위해 이 글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 챘으면 좋겠다. 난 지금도 담배를 피우고 있다. 그리고 끊더라도 내 의지대로 끊을 거다. 언제부턴가 담배를 피우고자 하는 게 내 몸인지, 내 마음인지, 아님 내 이성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담배 피는 여성으로 존재하며, 이렇게 외치고 싶다. 머나먼 멋진 외국 차도녀(차가운 도시 여자)만 담배 피는 건 아니라고. 내가 여기 있다고.
덧붙임

윤티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 팀 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