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이 표준, 기준, 정상 등등의 개념들과 친하진 않은 것 같다. 인권교육은 으레 표준으로, 기준으로, 정상으로 당연히 여겨지던 것들을 뒤집어 보는 작업을 주로 하니까. 다만 인권교육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인권교육가들이 사용하는 언어 자체는 자칫 표준어로 굳어지기 쉽다. 한번 쯤, “강사님, 말이 너무 어려워요. 뭔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라든가, “예 좀 들어주실래요?” 라든가, “좀 천천히 말하시면 안 될까요.” 등 참여자들의 용감한 지적을 받아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 일이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표준으로 굳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전문성이라는 이름으로 생기를 잃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교육자-피교육자의 권력을 고려할 때, 참여자들은 ‘텅 빈 시선’ 전략으로 강사에게 말보다 더 큰 말을 건네기도 한다. 서로의 언어 코드를 맞춰가는 과정이 없다면 인권교육은 그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서설이 길어졌는데, 초등학생 분들과의 교육은 그래서 도전이다. 누구나 어린이 시절을 겪지만, 그때의 언어를 기억해내질 못한다. 권력이 만든 수많은 표준 체계가 ‘철든 어른’들의 몸에 알알이 박혀 있으니 서로가 답답할 노릇이다. 아주 단순하게는 서로 알고 있는 단어 개수부터가 다르고, 좀 더 복잡하게는 어떤 현상을 이해하고 반응하는 방식도 참 다르다. ‘쉽고, 재밌게’의 미덕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고, 이들이 생활에서 겪었을 법한 고민들로 예화를 채워나가는 것도 필요하다. 인권교육을 준비하는 과정은 곧 자신이 만날 존재들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학생인권조례 시행이나 혁신학교 정책으로 말미암아 초등학생 분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작년부터 조금씩 늘고 있는데, 교육을 준비하면서 오히려 내가 성장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어지는 내용은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비슷한 프로그램으로 진행한 3차례 정도의 초등학교 인권교육을 정리한 것이다. 규모가 크지 않은 초등학교에서, 5학년 혹은 6학년 친구들을 반별로 만난 경우들이다. 한 반에는 평균 25명 정도의 친구들이 있었고, 3-4교시 혹은 5-6교시를 묶어서 진행했다.
날개 달기- 첫인상의 충격을 이용하여
초등학교 건물에 들어서면 참 묘한 인상을 받는다. 학교는 알록달록 예쁘게 꾸며져 있는데, 전체적인 풍경은 색감이 다 빠져나가 그림자만 남은 느낌이랄까. 학교마다 교실마다 차이는 있지만, 교사가 칠판 앞에 서면 일사분란하게 정돈되는 그 질서가 참 갑갑하게 느껴진다. 학교의 반복적인 일상에 슬며시 끼어들어간 인권교육이 학교의 톱니바퀴에 기름칠을 해주기보다는 하나의 이물질로 기능하길 바라는 게 솔직한 나의 마음. 인권교육의 ‘날개 달기’는 참여자와 강사가 처음 만나 마음의 빗장을 열고 섞여 들어가는 과정인데, 이 섞임은 재밌는 질문으로부터 출발할 수도 있다. 우연적인 요소가 많아 일반화하긴 쉽지 않은데, 나 같은 경우는 첫인상을 활용해 교육의 문을 여는 경우가 많다. 내 모습을 본 친구들이 키득키득 거리며 “남자에요? 여자에요?”, “머리는 왜 그렇게 염색했어요?”, “축구선수세요?” 등의 질문을 속공으로 던지면, 그걸 다시 질문으로 맞받는다. “저의 어떤 점을 보고 남자(여자)라고 생각했어요?”, “머리를 샛노랗게 염색한 저는 날라리일까요?” 등의 질문과 함께 자연스레 인권과 호기심 혹은 인권과 질문 던지기의 연관성을 나눈다. “그렇다면 인권은 뭘까요?”라고 묻자 여러 가지 대답들 속에 “기차표”라는 대답이 귀에 들어온다. 기차를 타는데 기차표가 꼭 필요한 것처럼, 사람 사는데 인권이 꼭 필요하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그럼 그 기차표는 얼마인가요?” 라고 되묻자 제각각의 대답이 쏟아진다. 0원부터 1억까지...무수한 액수들 중에 가장 적은 액수인 0원과 가장 큰 액수인 1억을 부른 학생들의 설명을 들어보았다. “누구나 가질 수 있어야 해요.”, “그만큼 인권은 값어치가 엄청 큰 거니까요.”라는 친구들의 대답 속에서 인권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누가 더 정답인지 알려달라는 듯한 학생들의 시선에 “저와 함께 하는 시간에 정해진 정답은 없어요. 저의 질문은 시험문제가 아니니까요.” 라고 말하자 과열된 경쟁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는다. 학교의 코드를 빗겨가는 하나의 장치로 호칭을 활용할 수도 있다. “선생님”보다는 “한낱(이름)”이라고 불리는 걸 좋아한다고 말한 후,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넘기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더불어 날갯짓1- 속마음을 열어봐
어떤 참여자를 만나든 교육 안에서 참여자들의 삶의 이야기를 엮어가는 과정이 있게 마련이다. 초등학생 분들은 어떤 장(場)이 펼쳐져야 이야기를 풀어 놓을까. 고민 끝에 ‘속마음’과 ‘거짓말’을 키워드로 몇 가지 예시 상황들을 나눴다.
이것(왼쪽 그림)이 정말 ‘함께 신나는’ 상황인가? 그림 속에 앉아 있는 유치원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속마음과 달리 가만히 앉아있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등을 묻자 “정말 짜증날 것 같다.”, “막 뛰어놀고 싶을 것 같다.”, “엄마가 그냥 보낸 게 틀림없다.”, “싫어도 혼날까봐 앉아 있는 거다.”, “집에 전화할게 무서워서 앉아있게 된다.” 등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하소연이 터져 나온다. 이밖에도 ‘썩소(썩은 미소)’를 짓게 되는 상황은 언제인지, 속마음과 달리 ‘거짓말’을 하게 될 때는 언제인지, 또는 어른들의 ‘거짓말’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묻고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어서 ‘이건 쫌 아닌 것 같다!’, ‘이랬을 때 완전 짜증, 화남, 억울함’을 주제로 자신의 인권 이야기를 찾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주로 생활하는 공간이 어디냐고 질문했더니 학교, 집, 학원 정도가 나왔다. 칠판에 간단히 공간별로 구획을 지어놓고, 각 공간별로 포스트잇에 익명으로 자신의 사연을 간단히 적어 붙이는 활동을 했다. 10분 남짓 시간동안 포스트잇을 더 달라는 주문이 이어지고, 어느새 칠판은 ‘신문고’마냥 빼곡하게 참여자들의 사연으로 가득 찼다.
“이유를 듣지 않고 무작정 화만 낼 때. 그러는 게 엄마야?”, “학원에 가라고 할 때 좀만 쉴래라고 말하고 싶었다.”, “혼날 때, 제발 그만 좀 해 라고 말하고 싶었다.”, “빨리 자라고 재촉할 때”, “친구에게... 욕은 좀 필요할 때만 하면 안 되냐고 말하고 싶었다.”, “왜 때려요”, “내가 그렇게 만만해?”, “체육 선생님이 체육관에 못 들어가게 할 때”, “학교에서 숙제를 안 가져왔는데 ‘내일 가지고 올게요. 왜 이렇게 화내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혼날 때 대답을 안 해도 뭐라고 하고, 대답해도 말대꾸라고 뭐라고 한다.
토크쇼처럼 참여자들이 붙여준 사연을 읽으며 교육을 진행하는데, 차마 지면에 싣기 애매한 수많은 욕설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연을 쓰는 와중에도 “욕 써도 되요?” 라고 묻는 친구들이 많았다. 일단은 하고 싶은 말을 다 쓰라고 하자, 욕만 적혀있는 종이들도 꽤 많이 나왔다. ‘애들이 벌써부터 욕을 이렇게 쓰다니... 바른 말을 써야지.’ 라고 단순 판단할 수 없는 상황들. 이 친구들의 마음에서는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가슴이 저미는 순간이기도 했다. ‘저희 반에서는 욕 쓰면 안 돼요. 체크하는 애가 있고, 선생님한테 알리면, 모둠 점수가 깎여요.’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 없애면, 그것이 평화로운 상황이라고 착각하는 이 미성숙한 어른들의 양육 혹은 교육 방식이 이 친구들에게 무엇을 남길까를 고민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언제나 그렇듯 학교 안에서 인권교육을 할 때 알게 되는 이 수많은 인권침해 상황들에 대해 공감하고, 위로하는 것 이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내내 생각하게 된다. 일단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일들이 나이 어린 존재들을 향한 ‘걱정, 보호’라는 탈을 쓴 ‘간섭, 무시, 폭력’일 수 있음을 조금이나마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길 바랄 뿐이다. 쏟아지는 문제 상황들에 대해 강사가 모두 ‘정리’해야 한다는 강박을 느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속 풀이 시간을 가진 것,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를 공론화 해보는 경험을 해보는 것이 이 시간의 최소 목표이지 않을까.
더불어 날갯짓2- 어린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뒤집어봐
쉬는 시간을 조금 가진 후, 인권의 옹호자가 되어 어린이 인권을 지킬 수 있는 근거를 스스로 찾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일전에 ‘인권교육, 날다’에 소개한 바 있는 문제적 인간소환하기 기법을 사용해 교육을 진행했다. 강제 급식이 이루어지는 어린이 집에 다니는 상현이가 SOS 편지를 보낸 것. 옆 그림과 같이 동화책의 한 장면을 활용해 사연을 좀 더 시각적으로 재밌게 구성해가는 것도 도움이 된다. 진행자가 이 어린이 집의 교사로 역할극을 수행하면, 자연스럽게 참여자들은 상현이를 돕는 인권 전문가가 되어 교사에게 여러 질문을 던진다. “억지로 먹이면 오히려 안 좋잖아요.”, “선생님은 편식한 적 없어요?”, “왜 상현이의 의견을 무시해요?” 등등의 질문을 던지는데, 어린이집 교사의 논리도 만만치 않다. 어린이집에 상현이만 있는 것도 아닌데 일일이 어떻게 다 챙기나, 나도 편식한 적 있지만 훌륭한 선생님을 어렸을 때 만나 고친 거다, 상현이는 원래 불만이 많은 아이다, 나쁜 아이들에게 나쁜 어린이 표를 주는 게 뭐가 문제인가 등 이 사회의 지배적 논리를 연기하면 몇몇 참여자들은 난감해하기도 하고, 몇몇 참여자들은 ‘꺼지세요’ 라며 감정적 대응을 하기도 한다. 상황극을 멈추고, 우리가 넘어서기 어려웠던 지배적 논리들을 일상의 예를 통해 짚으며 마무리했다. 누가 착한 어린이고, 나쁜 어린이로 여겨지나?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닌데, 사랑한다는 이유로 매를 드는 것이 정말 사랑일까? 어린이들의 힘으로 세상을 바꾼 역사는 없을까? 방학생활 계획표에 적힌 계획 중에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은 얼마나 되나? 개념 없는 사람을 ‘초딩’에 빗대는데 이건 우리에 대한 모욕 아닐까? 등을 슬라이드 장면을 보며 이야기 나누었다.
머리를 맞대어
훌쩍 80분의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노래가사 마냥 다음에 또 만나요~ 쿨 하게 인사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항상 아쉽다는 느낌이 훨씬 크게 남는다. 학생 수가 그나마 적은 초등학교였고, 요청하신 교사 분이 집체식(대규모로 모아놓고 하는 방식) 교육의 불가능성을 인정하셨기 때문에 반별 교육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학생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교육을 진행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아쉬움. 학교 안 교사 분들이 인권적인 교육 혹은 인권교육 혹은 새로운 교육의 문을 열 수 있도록 인권 감수성 향상과 인권교육 역량 강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동시에 당사자인 어린이 분들이 읽을 수 있는 또는 접할 수 있는, 이 분들의 코드에 적합한 자료나 교육의 개발도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끼리만 머리를 맞대지 말고 어린이도 함께 참여해서 만드는, 오래 걸리겠지만 진정 훈훈한 시도들이 이어질 수 있기를.
덧붙임
한낱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