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에 막 관심을 가질 때, 인권교육이야말로 사람들의 생각의 변화, 인식의 변화, 나아가 삶의 변화를 일구는 일이라고 조금 확신(?)했더랬습니다.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이들의 삶의 이야기 속에서 좀 더 빨리 우리 사회가 변하기를 갈급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참~ 안 변하는 것들도 있구나’ 맥이 빠지기도 했습니다. 인권교육이 진행되는 동안 잘 소통이 되었다고 느꼈건만 마지막 한마디 ‘그래도 현실이 어디 그래?’로 다시 되돌이표를 찍기도 합니다. 내가 정의롭고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와 상관없이 현실을 지배하는 논리와 규칙에 조금씩 우리 자신을 맞춰갑니다.
이런 우리들의 모습은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한 혁신학교 인권교육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학생인권과 교권의 부침이 여전한 학교도 많은 만큼 나름 참가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준비를 하고 임했습니다. 그런데 시작부터 삐걱거렸어요. “교복이 없어졌다가 90년대 들어 다시 생긴 거 아닙니까? 다시 생긴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건데 인제 와서 또 인권이니 뭐니 하면서 없애자고 하고.”, “핀란드 교육 얘기하는데, 정확하지는 않지만, 거기는 학생들한테 생활태도 점수를 매기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대학 갈 때 점수 반영하고요. 그런데 우리는 체벌만 문제 삼아요.”, “애들 때린다고 뭐라고만 하지 말고 그럼 대책을 내놓으세요.”, “교사들 입장에서는 어떤 논의과정도 없이 위에서 시키는 건데, 교사들 동의를 거쳐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학교 안으로 인권이 들어서면서 불편해진 마음을 마구 쏟아냈다. 인권은 ‘누구의 입장에서 볼 것인가’의 문제를 살펴야 함을 나누기 위해 준비해 간 사진자료(단체복을 입은 저학년 학생들이 줄을 맞추어 앉아있는 사진)는 사회질서와 인내를 가르치는 학교의 교육을 부정하는 장면으로 둔갑했다. “저런 게 질서가 아니라면 인권적 질서가 무엇인지 정의를 알려주세요.”, “인권에서 말하는 개인의 자유의지가 뭡니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함께 풀어야 할지 당황스러웠습니다. 참여자들이 생각하는 교육, 학교의 풍경은 무엇인지부터 그려보면 사실 학생인권조례가 그리는 그림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교육이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지부터 출발해보려 했는데 참여자들의 답은 교육학에서 말하는 교육의 정의였습니다. 교육학에서 그렇게 배웠다는 말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교사들의 어떤 행위에 대해서는 교육부에서 그렇게 공문이 와서 그런 것이라며, 현실적인 체계, 지시와 성실한 이행이 강조되었습니다. 문득 용산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을 보고 난 후 한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아이히만이 다른 게 아니라니까.” 용산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법정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사람들이 내뱉은 말은 하나같이 ‘위의 지시에 따랐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권연구소 창에서 진행된 <문학과 인권> 강의에서 아이히만의 세 가지 불능-생각할 줄 모르고, 말할 줄 모르고, 공감할 줄 모른다-이 반인륜적인 결과를 초래했음을 들으면서 혼자 부끄러웠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동하기보다는 규범대로 모나지 않게 행동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규범이, 규칙이 옳은지에 대한 질문이나 판단은 늘 생략한 채 말입니다. 아이히만 역시 자신은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을 뿐 어떤 범죄를 행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의 여주인공 한나 역시 그랬습니다. 수용자들을 몰아넣은 교회에 불이 나서 수용자들이 죽게 된 상황에서 왜 문을 열어주지 않았냐는 질문에 다른 간수들이 여러 가지 변명으로 상황을 부인한 데 반하여 한나는 놀랄 만큼 당당했습니다. 왜냐하면 한나에게 ‘간수의 역할은 수용자들을 감시하는 것’이었고 이에 충실히 행동했던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을 죽도록 방치한 게 아니란 말이죠.
교육 참여자들의 한마디로 너무 비약이 심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일상에서도 반복되고 있지 않나요? 국민적 정서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전히 차별받고 있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 사회적 질서라는 미명하에 가해지는 기본권 침해 상황들, 규칙 혹은 법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크고 작은 폭력을 묵인하고 있지는 않나요?
인권의 관점에서,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지 못할 때, 내 생각과 양심의 틀을 ‘현실’ 안에서만 작동시킬 때, 우리는 ‘작은 아이히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드러난 상태에만 집중하기보다는 이리저리 들춰보고 뒤집어서 생각해보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내면화하기 보다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죠.^^
덧붙임
묘랑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