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부양의무자의 과거 회상록
스무 살 되고 얼마쯤 지나서 동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다. 내가 성인이 되면서 부양의무자가 됐고, 특정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지금 우리 집에 나오는 생계비 지원이 끊길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그게 아니면 동사무소에서 소개시켜주는 일을 하면 된다고 했는데, 그 때만 해도 ‘활기(청소년활동기반조성모임)’ 반상근 중이었던 나로서는 할 수도 없었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정해주는 일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기초생활수급’이라는 단어를 그 때 처음으로 인터넷 검색창에 올렸다. 학교 다닐 땐 대충 모르는 척 하고 지냈는데, 상황이 이쯤 되고 보니 그냥 눈 감고 있을 수가 없었다. 보건복지부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글들을 몇 번씩 읽고, 한동안 아예 기초생활보장법 전문을 프린트해서 들고 다녔다. 복지사가 전화로 떠들던 내용이 거기에 있었다. 지금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제도는 ‘공돈’을 받고 놀고 먹는 등 서구 복지국가에서 나타난 ‘복지병’ 전철을 밟지 않도록 일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일자리를 제공하고 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겐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생산적 복지’ 철학을 기초로 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전 내용 중 일부
한 마디로 이해했다. 일 하지 않는 자 돈 받을 생각 말라. 복지가 뭔지는 몰라도, 이 법은 사장님들이 만들었나보다 싶었다. ‘생산’에 목숨 거는 게 딱 사용자스러웠다. 부양의무자니 뭐니 실질적인 책임은 가족 단위로 떠밀고, 국가의 몫은 최소화하려는 속셈이 빤히 보였다. 동사무소에서 소개시켜준다던 그 일, 아마도 복지 관련 근로였던 것 같다. 희망근로라나 뭐라나. 저임금 착취해서 딸리는 인력도 보강하고, 일자리 창출이랍시고 생색도 내고, 그쪽에선 일석 삼조였겠지만, 이쪽에선 아무래도 억울한 게 많았다. 기초생활수급가정에서 성인이 된 자녀들은 다 비슷한 심정 아니었을까. 하나, 똑같이 성인이 되도 대학생이라면 생계비가 그대로 나온다. 근데 내가 비(非)대학을 쉽게 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학비 댈 형편이 안 된다는 걸 너무도 잘 알아서였다. 둘, 어렵사리 간다 치더라도 휴학을 하면 안 된다니, 하늘을 찌른다는 등록금은 누가 꼬박꼬박 대고? 셋, 희망근로를 한다고 생계비가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일한 급여를 생계비 대신으로 생각하고 가족을 부양하란다. 결론은 갓 성인이 된 쥐뿔도 없는 나 같은 애들더러 알아서 식구들 먹여 살리라는 소리다. 복지가 뭔지는 몰라도, 이거 하는 사람들한테 내 인생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이러고 있지만, 나도 신파가 싫다
쓰다 보니 내 얘기만 잔뜩 늘어놓았지만, 사실 이 얘길 쓰려고 맘 먹게 된 건 엄마를 보면서였다. 애들은 자존심 챙기느라 모르는 척 하고, 아빠도 마찬가지로 외면하는 걸 엄마 혼자 감당했다. 동사무소랑 엮이고부터 생긴 자질구레한 에피소드 대부분은 엄마한테 들었다. 영양 플러스라는 교육에 참가하면 집에 애들 먹이기 좋은 먹거리들을 보내준다. 근데 교육 시간에 지각하면 벌점이 있어서 벌점이 쌓이면 우유가 더 안 오게 된다 따위의 얘기들. 가난한 엄마들이 지각했다고 혼나는 장면을 그려보는데, 학생들이랑 처지가 비슷했다. 나이 깨나 먹은 사람들이 ‘애처럼’ 취급당한다는 것이 뭘 뜻하는지를 생각했다. 엄마한테 그냥 그거 가지 말라고 했다.
좀 용서가 안 된다, 작년에 내가 겪은 그 사회는. 가장 현실적이어야 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제도가 그 모양이라니, 그건 순진함이라기보다는 잔인함이지 않나. 작년에 그 일 겪으면서, 아무리 아닌 척 해도 내 일인 걸 알게 됐다. 국가에서 시키는 대로 부양의무자 같은 건 되고 싶지도 않고, 사실 될 자신도 없다. 근데 엄마도 그렇고 점점 더 보이는 게 많아지는 걸 보면, 앞으로 어찌될 지 잘 모르겠다. 나도 신파가 싫다. 신파 가족극 안 찍고, 사회저항극이나 좀 끈질기게 찍으면서 살았으면 싶다. 반 신파를 위하여, 아자아자 파이팅이다.
덧붙임
엠건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