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오름 > 책의 유혹

[책의 유혹] 또 하나의 민주주의

『과학, 기술, 민주주의』, 네바 해서네인 외, 갈무리, 2012

신화는 끝났다. 산산이. 낱낱이. 신화 속 거인들은 그 최후까지도 쓰러졌다. 이제 우리끼리의 대화를 할 시간이다.

이 책은 과학기술이라는 전문영역에서의 신화가 어떻게 무너져가는지에 대한 여러 편의 서사이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정책의 결정들은 과학기술인이라는 전문가들만의 영역이고 일반인들은 들어올 수 없는 영역이라는 신화는 여지없이 깨진다. 전문성이라는 영역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장벽은 일반인들이 스스로의 필요에 대한 충족을 전문인들에게만 맡기지 않고, 스스로의 언어를 만들고 전문성을 획득해가면서,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신화 깨기 #1 : 에이즈 치료운동은 생의학과 보건의료라는 전문성의 영역이 의사와 연구자들만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모범으로 소개된다. 에이즈 환자들은 무력감을 느끼는 환자로서의 희생자라는 지위를 거부하며 스스로를 대변하기 위해 <ACT UP>이라는 풀뿌리 활동가들의 실천 조직을 결성하고, <에이즈 치료 연구>이라는 간행물을 만들어 스스로의 언어를 만들어 냈다. 결국 그들은 의사들과의 협력을 이끌어내고,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국립보건원의 에이즈 임상시험그룹 위원회의 의결권을 획득했다.

신화 깨기 #2 : 농부가 만들어낸 지식보다 과학지식이 더 우월한가? 이 책에서 소개한 순환방목농의 네트워크는 때로는 농부들 자신의 경험적 지식이 과학지식보다 더 큰 타당성과 당장의 유용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아가 농업과학 지식으로 구축된 관행 농업의 비민주성과 지속불가능성이 폭로된다. 미국의 낙농업은 감금 사육과 집약적 사료작물 생산을 통한 생산의 극대화를 추구하면서 거대 자본에 의한 농부들의 예속화와 환경문제를 야기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농부들은 순환방목에 눈을 떴는데, 기존의 관행농업 패러다임 하의 농업과학자들로부터 유용한 정보를 거의 얻지 못했다. 농부들은 스스로에게 눈을 돌렸고, 자신들의 경험과 아이디어를 공유해가면서, 경험적이고 국지적이지만 전일적이고 생태적인 지식을 만들어나갔다.

신화 깨기 #3 : 연방 핵시설인 핸퍼드 공장은 1943년 맨허튼 프로젝트의 일부로 핵폭탄용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위해 구축되었다. 핸퍼드 주민들은 미국의 진보와 군사력의 상징으로서 핸퍼드 공장을 지지하고 많은 경제적 이득을 누렸다. 그러나 핵시설 공장 운영의 안정성과 방사선 노출의 인체에의 악영향에 대한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실제로 방사능이 노출된 기록문서가 폭로되면서, 시민들은 전문 지식을 획득하고 스스로를 교육하고 조직하고, 시민 발의를 투표에 부치고, 공청회에서 증언하고 법적 소송을 제기했다. 이 과정에서 중립적 전문가로서의 과학자라는 관념은 깨졌고, 그들의 일련의 편향이 지적되었으며, 일반인들이 고도로 기술적인 사안에 관해 논의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대중들의 과학기술 영역으로의 참여를 민주주의의 발전과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는 경제민주주의와 더불어 이러한 또 하나의 민주주의는 한국 사회 곳곳에 긴급하게 요구된다. 이러한 측면은 특히 한국에서 지난 광우병 사태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아쉽게도 이 책에서 다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대중들의 과학기술 영역으로의 참여에 대해 다른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자본가들이 공장 내 노동 통제의 수단으로 구상과 실행의 분리라는 전략을 사용한다. 즉 전체 노동과정에서 수행되는 작업 계획, 분석, 설계 등은 자본가나 그 수하가 수행하고, 노동자는 단지 그 작업을 실행하게만 함으로써 노동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가는 것이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전문성 대 민주주의라는 구도는 자본주의 체제의 구상과 실행의 분리 전략이 공장 밖 사회 전체 차원에서 수행된 것이라는, 네그리의 제국적 관점에서 해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 네그리는 "비물질적 노동의 각 형태 속에는 협동이 노동 자체 속에 완전히 내재하고 있다"고 하였다.

수십 년간 컴퓨터 프로그래머로서의 내 경험은 이 책에서 나타난 맥락들과 일통하고 있다. 전산직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애자일 운동과 장인정신 운동이 그것이다. 이 경험과 이 책의 내용이 만나서 어떤 상상이 가능하게 될지 자못 흥미진진해진다.
덧붙임

박상규 님은 컴퓨터 프로그래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