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중을 떠올리면 청탁과 비리 등 권력형 범죄로 실형을 받은 사건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직업을 가지기보다는 현모양처가 되기를 바란다”, “충실한 어머니와 선량한 부인만 되어도 사회에 기여하는 것” 등 2010년 여기자 포럼에서의 소위 ‘현모양처’ 발언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그는 발언 직후 ‘여성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이라는 전제로 사과했지만, 이만한 자기착각도 없다. ‘오해’, ‘개인 의견’, ‘정서 차이’ 등 상황파악조차 안 된 것 같은 사과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여성들에게 쓰나미급 상처를 줄 수 있는 대단한 인물이라는 자아도취쯤이지, 여성의 평등권과 노동권 등 온갖(?) 인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이자 위협이었다는 자각은 아니다. (정말이지 착각도 유분수지만 여성들은 분노한 것이지 상처받은 것이 아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 시대’를 목전에 두고 이명박 정권 말의 특별사면 명단에 이름을 올린 그의 과거 발언이 새삼스럽게 떠오른 것은 최근에 들춰보게 된 한 권의 책 때문이다.
‘‘여성의 지배’라는 담론
‘여성의 지배가 시작된다’는 부제가 붙은『남성의 종말』((The) end of men : and the rise of women)은 표지 이미지부터 그 의도가 의심쩍다. 쓰레기통에 처박힌 남성의 구두와 그 쓰레기통의 뚜껑 위에 서 있는 강렬한 핫핑크 하이힐이라니. “기본적으로 세상에서 여성의 임무는 가정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라던 최시중 전 위원장이나, “여성 대통령은 시기상조”라던 이재오 의원, “여성권익 신장도 좋고 다 좋지만 지금 남성이 오히려 더 처져있는 거다, (양성평등)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던 홍광식 전 서울시의원과 같은 사람들이 보면 뒤로 넘어갈 만하다.
한국 사회에 대한 분석과 여성들의 사례에 상당 부분을 할애하는 이 책에서 ‘골드미스’, ‘아시아 여성들이 세계를 장악’하는 사례들은 ‘사실’이 아니라기보다는, 일부 여성들이 경험할 수 있는 파편적인 사실이거나 미국 출신의 저자 위치에서 포착할 수 있었던 상대적인 사실일 뿐이다. 위 책의 제목과 이미지가 문제적인 이유는 일부 여성의 사례만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특정한 여성 집단이나 사회 변화에 주목하고, 대표화하고, 과잉재현할 때 ‘여성 지배 담론’이 어떻게 실재처럼 각인되고 어떤 효과(여성 전체 집단에 대한 반감과 혐오, 백래시)를 가능하게 하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라는 여성 대통령 후보의 등장이 여성리더십에 대한 신뢰가 전무한 한국 사회에서 ‘모성적인 구조대원으로서 여성지도자의 가치를 인식’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저자의 전제처럼 ‘행운’의 영역에 가깝다. 이는 인과관계가 아니라 환상 혹은 자기최면이다. ‘행운이 따라 준다면’이라니, ‘비서구’인 다른 국가의 사회정치 구조에 대해 분석하는 서구 도서들에서 종종 순진하다고 할 만큼 무책임한, 그래서 오만한 태도를 볼 때마다 솟구치는 화를 참기 힘들다. 이 책의 의도와 관계없이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기반한 여성 지배 담론이 너무나 쉽게 여성주의 정치학의 지향과 가치로 등치되기 때문에 이 시대에 페미니스트들이 과중 업무를 떠안고 괴로워진다는 것이 내가 가진 울분이다. 이 책이 2030 여성들을 위한 자기계발서로 얼마나 각광받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지 구매와 일독을 권장할 만한 책은 아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그 아시아 여성의 입장에서, ‘착각도 유분수’라고 쉽게 치부하며 실소를 보내기에 이 책에서 세계적인 성별 관계의 큰 흐름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 어떤 부분은 날카로우면서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논쟁적이다.
유연한 여자의 취향은 ‘나폴레옹적’이다. 새 영토를 빠르게 점령하면서도 옛 영토를 놓치지 않기 때문에 실존적 딜레마(너무 많은 노동, 너무 많은 집안일, 너무 많은 권력, 너무 많은 약점, 너무 과한 친절, 그러나 불충분한 행복)가 발생한다. … 유연한 여자는 우리 사회가 지금 가장 큰 보상을 안겨 주어야 할 돌연변이 인간이다. … 반면 뻣뻣한 남자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18)
박근혜 당선자뿐만 아니라 이전 정권들조차도 대표적인 여성정책으로 ‘일・가정양립’을 주요하게 내세우며 여성이 전담해온 사회적 부담을 국가가 나누어 가지겠다는 약속을 남발하는 것은 적어도 여성들이 놓인 이중적인 현실과 딜레마를 사회적 문제로 인지는 하고 있기 때문일 테다. 최시중 전 위원장의 문제라면 자신이 사회구조적인 문제나 정치적인 입장을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포장할 수 있는 자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또 하나 큰 논란은 가정대로 진학시키고 졸업 이후에 시집을 보내고 아이도 둘씩 낳은 현모양처의 사례로 본인이 소개한 최시중 전 위원장의 딸이 6.2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의원으로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했고, 이에 대해 ‘잘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격려했다는 뉴스였다. 당시 ‘한 입으로 두 말한다’며 사퇴하라고 한 민주당의 치사하고 신경질적인 공격에는 동의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양성평등의 가치를 누구보다도 지지한다면서 보여준 최시중의 변화한 관점은 사회 진출과 현모양처라는 이중과업이다.)
한국 사회에서 고위 공직자들의 현실 진단이 너무나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즉 국가가 부담을 나누어 가지면 여성들의 일・가정양립 문제, 이중 메시지로 인한 저출산, 임신중절, 비혼, 만혼 선택 등 사회적 문제가 해소될 것이라는 착각이 강력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 책에서 ‘뻣뻣한 남성’의 변화에 주목하는 저자의 입장조차도 급진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문화적 진퇴양난에 빠진 것은 여성들이 아니라 남성들이라는 것, 그래서 기존의 사회를 지배하던 남성성에 대한 인식의 전환(‘남성의 종말’) 없이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내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유연한’ 여자 되기, 누구에게 행복일까?
빠르게 변화하는 경제적인 시대상황에 맞추어 여성들이 자신을 바꾸는데 유연하고 능숙하고 민첩하다는 점, 그리고 이것이 현재 시점에서는 그 ‘유연한’ 여자가 ‘뻣뻣한’ 남자보다 나은 자질로 평가할 수 있다는 점이 저자가 남성의 종말을 선언하고 여성의 지배를 예측하게 하는 요인인 듯하다.
하지만 남성들이 새로운 유연성을 터득하게 될 것이라는 부분적 낙관은 나에게는 전혀 ‘짜릿한’ 미래가 아니다. 저자가 희망적이라고 이야기하는 미래가 ‘여성은 도움이 필요할 때 알아달라고 서서히 남성을 가르치고 남성은 그것을 알아주기 시작하는’ 상황에 대한 기대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모든 영토를 놓칠 수 없기 때문에 여성들이 ‘유연한’ 여자의 딜레마를 지속적으로 감수해야 하는 상황을 전제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여성들이 ‘유연한’ 여자에 대한 남성사회의 혹은 자기 스스로의 기대와 환상을 ‘다르게’ 인식할 수 있지 않은 이상, 여성 지배라는 언설은 남성 중심적이고 신자유주의적 사회에서 여성의 이중, 삼중의 역할과 과업, 그에 따른 스트레스를 지칭하는 다른 말이다. 남성과의 역전의 시대, 평등(경쟁해야 하는)의 시대에 대한 별다른 기대 없는 여성들, 또 다른 신자유주의 버전의 슈퍼우먼에 대해 포기 혹은 지연, 파업하는 여성들, 그래서 자신의 삶을 정치화하고 싶은 여성들에게 이것이 행복일까?
이 책의 서문에 등장하는 ‘제이콥에게, 제목에 대해 사과하며’라는 문구를 맨 마지막에 발견하고 나서야 나는 미처 다 읽지 못한 이 책을 별다른 미련 없이 덮을 수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의 능력이 남성의 그것을 뛰어넘고 있다는 주장을 설파하는 저명한 칼럼니스트이자 강연자인 저자조차도 『남성의 종말』이라는 책 제목을 붙이는 자신의 통찰에 죄책감 혹은 불안을 느낀다. 루이스 와이스의 말처럼 “남성들에게는 그들의 약점에 대해 사과하기를 가르치지만, 여성들에게는 우리 자신의 능력을 사과하도록 가르친다.”(*) 저자가, ‘우리 여성들’이 직면해야 하는 현실은 바로 이것이 아닌가?
(*) 루이스 와이스의 문장은 여성주의자 최이슬기의 번역 도움을 받았습니다.
덧붙임
몽님은 언니네트워크(www.unninetwork.net) 활동가입니다. * 이 글은 여성주의 커뮤니티 사이트 ‘언니네’(http://www.unninet.net/)의 채널[넷]에 동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