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학교에 다닐 때 남자면서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는 사실에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3년 전의 어느 날 나는 나를 긍정하기로 했다. 내가 게이라는 것도, 이런 것들이 이상한 게 아니란 것도 깨달았다. 난 특별하다면 특별하다고도 할 수 있는 나의 사랑을 공감해줄 친구를 찾기 위해 청소년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들어갔다. 그 곳은 무척 즐거웠다. 나의 사랑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같은 아픔을 공유할 수 있으며 심지어 연애도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그때 첫 연애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두꺼운 이불 가져와서 구멍 날 때까지 뻥뻥 차버리고 싶은 기억이지만 첫 연애는 생각보다 행복했고 첫 키스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첫 섹스는 그렇지 못했다.
현실은 시궁창?
어찌어찌 첫 삽입섹스를 마치고 애인과 모텔에서 나왔을 때 나는 벙찐 상태였다. 친구들에게 들었던 것보다, 책에서 묘사된 것보다, 포르노 배우가 소리를 지르는 것만큼이나, 무엇이 되었든 나의 판타지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성적인 쾌감은 어느 순간에서도 얻을 수 없었고 그냥 굉장히 ‘쓰라릴’뿐이었다. 그래도 만족스러워하는 애인의 얼굴을 보니 차마 별로였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첫 삽입섹스를 한 그 날, 난 처음으로 섹스를 즐긴 척을 했다. 그리고 혼자 위안 삼았다. “내가 아직 많이 못 해봐서 그래”
그래서 많이 해봤습니다
시간은 흘러서 그 당시 애인과는 사소한 문제로 헤어졌다. 그리고 여러 사람을 만났다. 전부-까지는 아니지만 적지 않는 수의 남성들과 섹스를 해보았다. 사람마다, 개인의 테크닉의 차이에 따라 아픈 정도와 힘든 정도는 차이가 났지만 결과적으로 삽입섹스로 내가 성적인 만족을 얻은 적은 없었다. 난 이러한 사실이 두려웠다, 내가 불감증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동성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것을 처음 인지했을 때보다 더 덜덜 떨렸었다. 난 이러한 ‘장애‘를 들키지 않으려고 섹스를 점점 기피할 수밖에 없었고, 어쩌다가 이러한 사실을 털어놓게 되면 돌아오는 말을 항상 같았다. “네가 아직 많이 못 해봐서 그래” 솔직하게 털어놓은 나만 바보가 되었다.
내가 많은 남성들과 섹스를 해보았고 이것은 ’아직 모르는 것’이 아닌 내가 ‘그렇지 않은 것’이라고 말을 해도 돌아오는 건 그런 말들이었다. 아마도 내가 더 어리기 때문에 더 쉽게 나의 고민의 과정들이 무시당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주장의 주 논리는 내가 “어려서(=많이 못 해봐서)”가 설명할 것도 없이 당연한 명제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청소년과 비청소년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또 반드시 섹스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두 사람의 관계에서 나이가 더 어린 사람은 그 관계에서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간단한 예시로 나이가 적은 사람을 사귀고 있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 도둑놈/년 취급받을 때, 나이가 많은 사람은 ‘도둑질하는’ 행위의 주체이지만 나이가 적은 사람은 상대로부터 훔쳐지는 대상으로 전락할 뿐이다. 이 때 나이가 어린 사람은 관계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셈이다.
여러 경험을 거치면서 내가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삽입섹스보다 서로를 안고 있거나 짧은 거리에서 눈을 마주보고 있는 것이 나에게 더 큰 성적 만족을 준다는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이것 또한 내가 만났던 많은 사람들에겐 삽입섹스의 이전 단계로 치부될 뿐이었다. 시간은 흘러 어느 순간부터는 점차 섹스를 요구받았을 때 기피하는 것도, 이유를 추궁받는 것도, 비웃음 당하는 것도 굉장히 피곤하고 지쳐버렸다. 그래서 나는 섹스를 요구받았을 때 ‘삽입섹스를 즐기는 척‘을 하게 되었다, 마치 억지로 위장용 이성애인을 만드는 것처럼.
섹스의 권력화
애석하게도 이러한 현기증나는 상황은 비단 연인사이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내가 있었던 청소년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도 (삽입)섹스를 즐길 줄 아는 것이 당연시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서로 자신이 얼마나 섹스를 오래/자주/잘하는지에 대한 경쟁이 많이 일어났다. 그리고 거기서 승리한 사람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난 이러한 현상이 청소년이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침묵을 강요받는 사회적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해석한 어느 문화비평가는 ‘둘의 사랑은 금지되었기에 그만큼 불타오를 수 있었다’라고 이야기했다. 마찬가지로 청소년에게 섹스는 공식적으론 금지되어있는 행위이다. 그렇기에 그 금기가 강할수록 금기를 깨고 싶다는 욕망은 강해지고 결국 금기를 깬 사람은 주변의 부러움을 받으며 커뮤니티 안에서 권력자가 되는 것이다. ‘어른이 아니기 때문에’ 수많은 것들을 금지당하는 청소년들은 ‘어른의 표식’ 혹은 ‘어른이 되는 통과의례’로 여겨지는 것들에 대한 박탈감과 갈망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러한 권력이 작동되고 있는 상태에서 ‘삽입섹스를 즐기지 못하는‘ 나는 솔직하게 그것을 털어놓기 힘들다. 나는 그들 앞에서 그들과 같이 섹스를 즐기는 척을 하곤 했다.
사실은 의외로 흔할지도 몰라
사실 나와 같은 고민은 의외로 흔할지도 모른다. 지금도 섹스를 즐기는 척 하며, 섹스의 유무와 횟수에 압박을 받고 있는, 다양한 관계에 놓인 사람들이 많을 거다. 그런 사람들에게 <에비츄>라는 만화 일부를 소개해주고 싶다. 그 만화의 한 에피소드에서 에비츄가 섹스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해결책을 주는 정의의 사도(?)로 나오는데 에비츄는 일반적인 삽입섹스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좀 더 다른 방식의 섹스와 욕망에 자유로워지라고 가르쳐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절정인 척 하고 헐떡이는 소리, 느끼는 척 하며 환희의 소리, 그런 당신에게 도움의 손길! 절정을 느끼게 해주리라! 오늘밤이야 말로!”
덧붙임
매미 님은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