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몸과 쇠사슬. 고통이 날 것 그대로 전시된 사진을 굳이 보지 않아도 내가 만났던, 내가 읽었던 그녀들의 몸이 눈앞에 그려진다. 서울에서 대여섯 번, 밀양에서 한 번 뵀을 뿐이지만 할매들이 전하는 이야기와 함께 내 안에 깊이 각인된 건 그녀들의 몸이었다. 몸은 그 자체로 시간이고, 장소이며, 이야기다.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담긴 주름살, 느리고 소박하며 결기 있는 움직임, 오랜 고생으로 굽고 휜 몸을 단단히 지탱하는 지팡이까지. 밀양을 살아낸 하루, 9년, 혹은 평생이 그 곳에 배어있다. 그래서였을까. 더 이상 밀려날 곳 없는 순간, 그녀들에게 남은 것 역시 그저 몸이었을 것이다. ‘내 말 좀 들어라’가 ‘내 몸을 봐라’로 전환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누구인가. 경찰과 한전, 정부는 그녀들의 몸을 똑똑히 봐야했다. 자신들이 쓸어낸 것이 지난한 투쟁의 거점만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그리고 그녀들의 삶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마음의 자유, 몸의 저항, 사회경제적 존엄, 평화적 생존 그 모든 것을 휘저어놓았음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자신들의 본질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는 속내는 어쩌면 단순하다. 사람의 마음을 읽지도, 헤아리지도, 고려하지도 않는 정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실력’ 행사는 힘의 과시니까. 누구에게 힘을 부릴 수 있는지 역시 단순하다. 오랜 세월 주변부로 밀려나 고립된 사람들을 향해 걸어오는 패배 없는 싸움. 두려움과 공포, 절망을 안겨주는 것이 싸움의 목표이자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사람이 있는데도 움막을 부수며 진압하고, 철거를 마치자마자 보란 듯이 공사를 시작했다. 과도한 힘의 행사는 정권이 가진 두려움을 거꾸로 증명하기도 한다.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싸우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권력자들은 두려워 할 수밖에 없다. 그녀들의 몸이, 그녀들의 몸이 담고 있는 역사가, 이에 이끌려 함께 손을 잡는 사람들이 스스로 싸움의 룰을 빗겨가기 때문이다. 한판승 따위는 꿈도 꾸지 않는, 지금 여기에서 존엄한 삶을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이길 수 있는’ 권력이란 없다.
지금도 전쟁은 진행 중이고, 시간은 무심히 흐르고 있다. 한없이 주저앉았을 마음을 보듬을 겨를도 없이 공사가 진행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는 밀양발 소식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무엇이라도 해야겠다, 그/녀들의 주름살에 연대하기 위하여.
덧붙임
한낱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