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기>(갈무리, 2014년 11월 펴냄)의 출간을 전후하여 박원순 서울시장은 서울인권 헌장 선언을 유보하고, 어느 보수 단체에 가서는 ‘자신은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이 모습을 보면 한국 사회는 여전히 관습에 대한 도전을 성공적으로 억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공적인 억압에도 불구하고, ‘정상적’ 혹은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도전’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고, 그 도전은 느리고 약한 듯 보이지만 ‘벽돌을 깨고’ 나오게 될 것이라는 것은 아래의 글을 보면 분명해 보인다.
“동성애 혐오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1960년대의 시민권 운동의 승리들은 미국에서 인종차별주의를 없애지 못했다. 흑인들은 여전히 차별에 직면해 있지만, 1960년 이전에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권리들을 갖고 있다.”(276쪽)
“이인종 커플은 동성 결혼 커플보다 여전히 부모의 반대에 직면해 있지만, 부모의 반대는 예전에 가졌던 만큼의 영향력을 갖고 있지 않다. 21세기 중반까지 동성애는 여전히 논란 가운데 있겠지만, 동성 결혼은 언젠가 합법이 될 것이다.” (276쪽)
인구사회통계학자인 마이클 로젠펠드의 <자립기>는 미국의 가족 제도의 변화에서 ‘자립기’에 주목한 책이다. ‘자립기’란 여러 가지 이유로 결혼할 때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지 않으며 자신의 가정을 꾸리기 전부터 자립해 살기 시작하는 인생단계를 말한다. 이 시기에 젊은이들은 대학도 가고, 여행도 다니며, 직업도 갖는다.
전통적인 가족 제도에서는 결혼 전까지 부모와 함께 살면서 부모의 영향 속에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미국의 젊은이들은 ‘자립기’ 동안 부모와 떨어져 살면서 부모의 간섭이나 영향력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 결과 미국 사회는 ‘이인종 결합’과 ‘동성 결합’이 증가했다. 로젠펠드는 다양한 인구통계를 인용하며 말한다.
“이런 비전통적 결합이 가시적으로 증가하면서 동성애와 이인종성향처럼 사회에서 금기시했던 것들을 서서히 깨고 있다. 부모는 자녀의 짝을 반대해봐야 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다지 반대하지 않게 된다. 마침내 이인종 결합과 동성 결합이 확산되고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거의 사라지면서 이전에 금기시했던 가족 형태들도 사회 주류로 통합되기 시작한다”고(20쪽).
‘비정상적’이라고 여겨졌던 것들에 반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반대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반대하지 않는/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회는 변하고 있다. 가끔 그 변화의 속도는 너무 느려서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진 이가 지도자가 될 것이다. 박원순은 눈에 보이는 것을 선택했다. ‘안정적’인 선택이다. 그러나 “안정적”인 선택이 그의 정치적 ‘안정’까지 담보해줄 지는 알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안정’은 이미 다른 누군가의 것이다. ‘변화’를 선택해야 하는 이가 ‘안정적’인 것을 선택했다. 마침, 그 발언 이후 그의 지지도는 떨어지고 있다. 그 경향은 오래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사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의 수는 거의 언제나 실제보다 적게 측정된다. 사회적 낙인에 대한 본능적 공포로 인해 보고를 회피하게 되는.”(115쪽) 는 경향을 읽어내는 안목이었는지도 모른다.
<자립기>에서 다뤄지는 미국 사회의 변화를 가능하게 했던 배경에는 ‘관용’이 있다. 그 관용은 젊은 세대, 즉 자녀 세대의 경제적 자립에 크게 의존한다. 자녀는 부모의 사랑과 경제적 지원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으므로 부모에게 의지해 같이 살면서 부모 세대의 사회에 길들여진다. 그러나 자립기는 이런 전통적인 규범을 뒤집었다.
젊은이들의 부모로부터 자립은 가족 삶의 본성에 조용한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에서 스스로 정체성을 규정한 동성 커플의 수가 증가한 것은 동성애의 욕구가 갑자기 증가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동성 커플의 수의 증가는 과거에 젊은이들의 동성 결합을 막았고 이전 세대의 동성 커플이 시야에서 가려지게 했던, 즉 완곡하게 표현해서 동성 커플이 “벽장 안에” 있도록 유지했던 부모의 사회적 통제의 영향력이 감소한 결과이다. (270쪽)
그렇다면 문제는 ‘자립’이다. 자립기의 경제적 자유와 지리적 이동성은 젊은이가 형성하는 결합의 종류에 명백히 강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좀 더 많은 이들을“벽장 안에”서 “벽장 밖으로” 나오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외부인들에게도 그들의 가시성을 증가시키고, 증가된 가시성은 더 많은 노출을 만들며, 이는 대안 결합이 더욱 인정받을 수 있도록 이끌 수 있다. 하지만 외부인들에게 대안 결합의 가시성은 반동과 괴롭힘, 그리고 증오 범죄를 끌어낼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번 서울시의 ‘인권헌장 선언’을 둘러싼 논란은 양면성과 그 양면성의 위태로움을 잘 드러냈다.
그런 위태로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변화의 방향에 대해서 낙관적이다. 그에 따르면 갈등은 문제가 아니라, 갈등이 드러남으로써 비로소 문제 해결의 길이 열린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오래된 갈등들이 분출하고 있다. 갈등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고, 그 갈등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는 또 수많은 반동이나 괴롭힘이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청년실업 문제 , 양극화의 심화 등 사람들을 반동으로 내몰 수 있는 사회적 조건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낙관할 수 있는 것은 사회 구조 변화의 패턴 때문일 것이다. 도시화의 진전, 독신 세대의 증가, 시간이 흐르면서 전통적 규범세대에서 관용적 교육을 받은 세대로의 인구의 변화 등. 문제는 갈등이 반복적이며 퇴행적이 되는 거다. 갈등을 극복해 가는 사회와 갈등을 반복해가는 사회의 차이는 크다.
덧붙임
김연숙 님은 산같고 땅같은 사람이고자 하나, 늘 쉽게 피고 퍼뜩 지는 꽃같이, 이리저리 기울어지는 저울같은 단계에서 헤메이는 사람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