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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교육, 날다] 그림책으로 만나는 인권교육

인권교육을 유혹하는 그림책, 기회를 엿보는 그림책들

시설에서 인권교육을 하고 계신 한 선생님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어린이들과 그림책으로 인권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라면을 먹을 때』라는 책을 알고 있냐고, 인권교육에 활용하면 어떠냐고 의견을 물으셨다.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하는 그램책이라 어떻게 활용할지 무척 궁금해졌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눠보니, 인권교육으로 적합해 보이는 책을 고르기는 했는데, 무엇을 주제로 이야기해야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직 정해져 있지 않았다. 좋은 책은 있는데, 질문도 남기고 싶은 이야기도 명확하지 않은 것.
음식 만들기에 비유를 한다면 카레를 만들지 김치를 담글지 정하지 않고, 싱싱해 보이는 재료를 준비한 셈이다. 좋은 책, 말하자면 인권적으로 뭔가 나눌법한 그림책을 발견해도 바로 인권교육이 되진 않는다. 이 지점이 좋은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누는 것과 인권교육으로 구성하는 것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렇게 멋진 그림책으로 인권을 이야기하면 얼마나 흥미롭고 재미있을까!’ 하고 홀릴 때가, 역시나 있다. 앞뒤 생각하지 않고 그림책의 유혹에 빠져 버린다고나 할까. 전화하신 선생님의 마음이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그림책, 인권교육으로 만들기

인권교육에는 ‘사례’가 많이 등장한다. 일상의 공간에서 발생하는 문제적 장면인 셈인데, 인권의 눈으로 볼 때 무엇이 문제인지 따져보고, 나아가 문제해결의 방향을 찾는다. ‘해결책’은 아니더라도 인권적인 해결의 과정은 어떠해야할지, 기준을 세워보는 토론 프로그램의 형태가 여러 가지 있다. 보통은 실제 있었던 일을 각색해서 있을법한 사례를 만드는데, 간혹 사례를 가지고 ‘이런 일이 진짜로 있냐, 없냐’로 방향이 어긋나거나, ‘나는 이랬는데’가 너무 강조돼 다른 생각의 틈이 없는 경우가 있다. 그림책을 활용하면 어떨까?

그림책 『생쥐와 산』

『생쥐와 산』 에서 어린 아이의 우유를 마셔버린 생쥐는 미안한 마음에 우유를 얻어다 주기 위해 염소를 찾아간다. 하지만 먹을 풀이 없어서 우유가 나오지 않는다는 염소의 이야기를 듣고 풀을 찾아 들판에 가지만 가뭄 때문에 풀도 구할 수 없었다. 전쟁으로 부서진 수돗가에서는 물이 새고 있었고, 수돗가를 고치기 위해서는 산의 돌들이 필요했지만 욕심 많은 사람들이 나무를 모두 베어가 산은 무너질 듯 벌거숭이가 된 채로 있었다.
이 총체적 난국을 어떻게 인권적으로 해결해 볼 수 있을까? 단, 아주 ‘동화적인’ 상상력은 잠시 쉬어달라는 당부가 있어야 한다. 그림책 새로 만들기가 아니라 문제해결이 목표라면.


이 활동은 그림책을 많이 읽어 온 주로 학부모 참여자들과 함께했던 프로그램이었는데, 신기하게도 결과가 약간의 순서만 다를 뿐 방향이 비슷비슷했다. 다양하지 않아서 아쉬움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오히려 반대였다. 애초 다양한 방법을 찾는 상상이 목표가 아니라 해결의 과정에서 무엇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지, 그 과정을 경험해보는 게 목표였으니까. 유사한 결말은 문제되지 않았다. ‘신뢰와 연대’의 키워드를 발견해가는 토론은 힘겨웠지만, 뿌듯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됐다.
물론, 가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니 진위를 따질 일도 없었고 결과적으로 개인의 경도된 경험보다는 ‘관점’과 ‘가치’가 좀 더 드러나는 토론이 됐다. 관점 역시 숱한 경험에서 묻어난 것이겠지만 사례와 조금은 거리두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이 그림책을 활용하는 인권교육의 특성이지 않을까.

그림책 『양들은 지금 파업중』

『양들은 지금 파업중』도 이런 방식의 토론이 가능하다. 농장에서 일어난 양들의 파업을 두고 저마다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는 동물들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면 좋을지, 인권적으로 따져보는 것이다. 각자의 이익 혹은 희생을 당연시하는 주장부터, 양들에 대한 복리후생 같은 ‘당근’정책까지. 이 그림책에 등장하는 동물들의 주장이 사회의 일면과 닮아 있기는 하지만, 그림책이라서 그런지 거리두기가 가능했다. 참여자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반/비인권적 관점을 꺼내놓기도 쉬웠고(?), 토론 중에 인권적 관점을 제시하기도 보다 수월한 면이 있었다.

인권교육이 분명한 관점과 방향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사회적 이슈를 다루기도 하지만 때론 자기 관점이 완고한 참여자가 있거나 혹은 첨예한 사안일 때 ‘감정의 대립’으로 흐르지 않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써야할 때가 있다. 안타깝게도 ‘파업’은 그 단어의 등장만으로 팔짱을 끼게 되는 참여자도 있다. 『양들은 지금 파업중』을 활용한 인권교육의 목표가 ‘파업’이란 무엇인가를 말하려했던 것은 아니지만 ‘파업’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덤’이 있기도 했다.
이처럼 그림책에 등장한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에는 참여자들의 인권감수성을 총동원해서 그 해결 과정을 이끈 주요한 가치를 묻는 식으로 전개된다.

그림책 『달라도 친구』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인권교육에서 활용할 수 있는 그림책은 『달라도 친구』 이다. 서로서로 친구들의 다른 점을 찾아 보여주는 그림책인데, 여기에는 종알종알 말이 많은 나와 조용한 은하, 이렇게나 키가 큰 나와 저렇게나 키가 작은 준이, 강아지 햄스터 공룡이 좋은 나와 거미를 좋아하는 슬기 등등이 나온다. 각각의 모습도 각각 좋아 하는 것도 다르다. 인권교육에 참여한 사람들도 서로서로 다른 점을 찾아본다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외모처럼 보이는 차이뿐 아니라 생각의 차이를 차근차근 적다보면 ‘입장의 차이’가 드러난다. 빨강과 파랑처럼 즉각적인 다른 차이만 찾았다면 덜 흥미로웠을 텐데, 부모로서, 여성으로서 맺는 사회관계 속에서 그 누군가와의 입장 차이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면서 흥미진진해졌다. 게다가 감정의 형태도 달라, 누군가에게는 못마땅하게 느끼는가 하면, 무시당했다고 느끼기도 하고, 화를 폭발하기도 하고 또 참기도 하고. 공감과 나름 이유 있는 ‘변명’의 시간을 지나고 나서, 참여자 스스로가 입장의 차이 속에 흐르는 힘의 관계를 발견하게 됐다.

기회를 엿보는 그림책들

인권교육 참여자들과 ‘즐겨 읽는 그림책 중에서 인권 이야기를 할 수 있는(어떤 주제라도 관계없이) 장면 뽑기’를 한 적이 있다. 재미있고 새로운 장면과 함께, 의아한 장면도 적지 않았다. “감명 깊고 좋았는데…… 인권의 이야기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좋은 그림책이라고 꼭 인권적인 해석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실 인권교육에 쓰이는 그림책 자체가 ‘완전히’ 인권적인 좋은(?!) 책일 필요도 없다. 그림책 전체가 아니라 인권교육의 주제와 목표에 맞게 읽어낼 장면(반/비인권적 장면도)을 건질 수 있다면 그림책을 이용한 인권 얘기는 또 무궁무진해지지 않을까. 어쩌면 ‘다 아는’ ‘쉬운’ ‘애들 얘기’라는 그림책에 대한 편견을 깨면, 기회를 엿보고 있던 다양한 그림책이 곧 보이기 시작할지도!
덧붙임

고은채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