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초청한 ‘핀란드 병역거부자연합(The Finnish Union of Conscientious Objectors, 이하 AKL)’이 자리한 사무실 건물의 이력이 흥미로웠다. 아직 러시아 제정의 지배 아래 있던 1907년에 창립된 ‘핀란드 평화연대(Peace Union of Finland)'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이 함께 사용하고 있는 이 건물의 이름은 ’Peace Station'. 근처에 있는 빠실라(Pasila) 기차역의 건물이 80년대에 새로 지어지면서 기존 역사가 통째로 옮겨진 뒤 평화단체들의 사무실로 이용되고 있다고 했다.
‘Peace Station' 건물 뒤로는 병역거부자의 이름을 딴 공원이 있었다. 공원 이름의 주인인 안트 페쿠리넨(Arndt Pekurinen)은 핀란드 평화연대에서 활동하던 반군사주의자였고, 1929년에 병역거부로 수감되었다. 당시 핀란드에서 대체복무는 군대 내 비전투분야 복무로 한정되어 있었다. 페쿠리넨이 수감되자 그의 석방을 촉구하는 국제적인 캠페인이 시작되었는데, 탄원서에 이름을 올린 이들 중에는 아인슈타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국제적 관심과 압력에 결국 핀란드 정부는 1931년 비종교적 사유의 병역거부를 인정하는 것과 동시에 민간 분야에서의 대체복무를 허용하는 법 개정을 하면서 페쿠리넨을 석방했다. 그런데 이 개정된 법은 병역거부권을 평시에만 인정한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었고, 소련과의 ‘겨울전쟁’이 발발한 1939년, 참전 명령을 다시 거부하고 수감된 페쿠리넨은 소련과의 두 번째 전쟁(‘계속전쟁’)이 진행되던 1941년 결국 부대 안에서 총살을 당했다.
대체복무자들이 파업한 이유
핀란드의 군 복무 기간은 복무 성격에 따라 165일에서 347일이고, 대체복무 기간은 347일이다. 연간 27,000명가량이 징집되고 있고 그중 2,500명 정도가 대체복무를 선택하는 숫자라고 AKL은 추산하고 있다.
1974년에 창립한 AKL은 대체복무자의 복무 환경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파업을 조직한 바 있다. 그중 큰 파업이 90년 봄에 있었던 파업이었는데, 당시 대체복무자들에게 제공되는 숙소의 열악한 조건 개선과 대체복무 기간의 축소를 주장하며 대체복무자 수백 명이 한 달 가까이 파업을 진행했다. 이들의 파업은 92년 핀란드 정부가 대체복무 기간을 480일에서 395일로 줄이는 결정을 발표하는데 일정 부분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대체복무 기간이 줄어들면서 80년대까지 연간 600-800명 정도이던 병역거부자 숫자는 2,500명 수준으로 급증했다. 물론 여기에는 냉전 종식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 당시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서도 대체복무자 수가 늘어나던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
98년에 벌인 파업은 그해 핀란드 정부가 군 복무 기간을 240일에서 180일로 줄이면서 대체복무 기간은 395일 그대로 유지하는 것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국제앰네스티가 1999년 군 복무와 대체복무를 모두 거부한 뒤 수감된 이들을 양심수로 지정한 데에는 핀란드의 대체복무 기간이 군 복무 기간의 2배 이상이라는 점에서 형벌적 성격을 띤다고 판단한 배경이 있었다. 복지 수준이나 여성인권, 언론의 자유 등 여타 인권지표에서 세계 상위권에 자리한 핀란드가 유럽연합 회원국 중 유일하게 앰네스티가 지정한 양심수가 존재하는 국가라는 오명을 얻게 된 맥락이다.
‘병역거부권=대체복무’가 아니다
현재 핀란드에서 군 복무와 대체복무를 모두 거부하는 완전거부자의 숫자는 매년 50명가량이다. 완전거부의 배경에는 개인의 자유, 지나치게 긴 대체복무 기간과 열악한 대체복무 환경, 군대와 징병제에 반대하는 반군사주의 신념까지 다양한 이유가 있다. 이들에게는 징역 173일이 선고되며, 한국과는 달리 전과기록이 남지 않는다. 2011년부터는 전자발찌가 결합된 가택연금 방식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감시와 통제의 수준 때문에 차라리 감옥에 가겠다는 이들도 있다고 했다.
핀란드 상황을 다루는 유엔기구나 국제앰네스티의 문서에는 ‘병역거부자(conscientious objector)’라는 단어가 대체복무를 선택하는 이를 지칭할 때도 있고, 대체복무도 거부한 완전거부자를 지칭할 때도 있다. 대체복무조차 존재하지 않는 한국 상황에선 대체복무를 주장하는 이들이 곧 병역거부자라고 여겨지지만, 대체복무가 존재하는 곳에선 대체복무를 거부하는 이들이 병역거부자임을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대체복무가 도입되거나 혹은 징병제 대신 모병제가 도입된다고 해서 병역거부자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짚어야겠다. ‘완전거부’라는 표현은 병역거부권이 대체복무라는 법적 형태로 보장된 곳에서의 병역거부를 지칭하기 위한 편의상 구분일 뿐, 군대 및 군사주의에 대한 저항이란 측면에서 ‘병역거부’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완전거부를 병역거부와 동일한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해질 때 비로소 ‘어떤 의무도 지지 않고 무임승차하려는 완전거부자’라는 비난에 맞서 ‘반군사주의 운동으로서의 병역거부’란 프레임으로 완전거부를 정당화할 수 있다.
대체복무조차 도입되지 않은 한국에서 ‘완전거부’ 개념은 언제쯤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병역거부권이 이미 50년대부터 보장된 독일 사회에서도 1974년에 처음 등장한 완전거부자들이 ‘독일 전쟁저항자-평화연대(DFG-VK)’의 공식적인 지지를 받기까지는 꼬박 20년의 세월이 걸렸다.(Andreas, "Conscientious objection in Germany") “죄지은 것도 아닌데 옥살이하는 불쌍한 병역거부자를 구제하자”는 차원에서 병역거부권이 논의된다면 핀란드에서처럼 파업하는 대체복무자는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불쌍한 존재란 이미지 속에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은 곧바로 “은혜를 배신한 괘씸한 존재”로 찍힐 것이기 때문이다. 병역거부권을 반군사주의 운동의 맥락에 위치시키는 것이 더욱더 요청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다음 글에서는 독일에서 징병제가 폐지된 맥락과 폐지 이후 운동의 과제를 살피면서 4월 한 달간 다녀온 병역거부 스피킹 투어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해볼까 한다.
덧붙임
날맹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이며, '전쟁없는세상' 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