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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리] 기댈 곳 없어 조용히 사라지는 조선소 하청노동자

위기가 과장됐다고요?

5월 17일 울산시청 프레스센터. 현대중공업 정규직, 사무직, 사내하청 노조 대표들이 한 자리에 섰다. 울산 방어진 꽃바위에 휘몰아치는 대량해고의 광풍을 막아내기 위해 원․하청 노동자가 뭉쳐 싸우겠다는 다짐이었다.

2015년 1월부터 올 4월까지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8500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지난해 1월 과장급 이상 사무직 1263명이 희망퇴직으로 잘렸다. 현대중공업은 희망퇴직으로 정규직 3천명 이상을 쫓아낼 계획이다. 지난 10년, 울산 꽃바위에 ‘역대급’ 호황의 순풍이 불 때, 현대중공업의 대주주는 주식배당금만으로 2795억 원을 챙겼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하창민 지회장은 “대주주의 사재를 출연해 원․하청 6만 노동자들을 위한 고용안정자금을 조성하라”고 촉구했다.

한 자리에 선 정규직 사무직 비정규직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의 <2015 조선자료집>에 따르면 2014년 조선 및 해양 관련 인력은 20만4636명에 달했으나, 2015년에는 19만 5000여명으로 1만 명가량 줄었다. 더욱 심각한 상황은 올해 벌어지고 있다. 대우조선해양 사내하청업체의 경우 지난해 말에서 올 3월 말까지 16개 업체가 폐업해 3400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올 연말까지 단계적으로 해양플랜트 수주가 끝나면 3만 명 이상이 공장에서 쫓겨난다. 울산과 거제만이 아니다.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는 23척의 선박수주 잔고 중 올해 13척 내년에 10척을 인도하면 도크 가동이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이미 사내하청 노동자 1500명이 사라졌고, 내년 말이면 남은 3000명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현대삼호중공업과 중소 조선소들이 몰려있는 전남 영암과 대불국가산업단지도 대규모 해고 사태에 직면해 있다. 올해에만 5만 명 이상의 조선소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는다는 전망이다. 해양 4대 도시(울산, 거제, 군산, 목포)에서 대규모 정리해고의 피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조선 3사의 지난해 적자 8조 원 중 7조원이 해양플랜트였다. 그동안 고유가가 지속되면서 바다 위에서 석유를 탐사하고 원유를 뽑아내는 석유시추선 주문이 쇄도했다. 돈방석에 앉은 대기업들은 연구개발에 투자하고 기술을 축적하지 않았다. 값싼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대거 해양플랜트 생산현장에 투입했다. 해양플랜트에서 일하는 생산직 노동자 중 90%를 사내하청으로 채웠다. 사내하청업체는 절반 이상을 ‘물량팀’이라고 부르는 일용직을 사용했다. 퇴직금도, 4대 보험도 없는 일당직 노동자들이 세계 최첨단 설비를 만들었다. 정부와 지자체는 아무런 규제도 하지 않았다.

유럽 경제위기로 선박의 수주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유가가 급락하면서 석유시추선 주문이 끊어졌다. 중국과 일본이 정부 주도로 조선산업을 육성해 경쟁력을 높이고 있을 때 한국 경영진과 정부가 예상된 조선산업 위기를 무능력하게 대응했다. 정몽준을 비롯해 대주주들은 제 주머니를 챙기기 바빴다. 무능한 정부와 경영진이 조선강국을 조선망국으로 만들었다.

조선강국을 조선망국으로 만든 자들

정부와 사용자들이 ‘수주 절벽’이라며 조선산업의 위기를 부풀리는 측면도 있다. 올 1분기 수주가 없는 이유는 선주사들이 국제기구의 친환경 규제에 대비해 지난해 말 수주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한국 조선업의 기술 수준이 높아 앞으로 선박 수주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한국경제>는 “최악 ‘수주절벽’ 와중에…상경투쟁 하겠다는 현대중공업노조”라는 기사를, 동아일보는 “노조, 적자에도 ‘임금 올려달라’…회사 문닫기 직전까지 ‘투쟁’”이라는 기사를 쏟아내며 조선 위기의 책임을 정규직노조에 떠넘긴다. “정규직도 잘리고 싶지 않으면 입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될까? 1997년 IMF 외환위기 구조조정과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 구조조정을 돌아보면 된다. 1998년 국민들은 장롱에서 금반지를 꺼내 국가에 갖다 바쳤다. 막대한 국가재정이 기업으로 들어갔다. 공기업은 민간 대기업에 싼 값에 팔아넘겼다. 2009년에는 새 차를 구입하면 200만 원이 넘는 세금을 깎아줘 국민세금으로 자동차회사를 살렸다. 그 많은 세금은 재벌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노동자들은 길거리로 쫓겨났다. 2009년에도 현대자동차, 한국지엠에서 각각 천 명이 넘는 비정규직이 잘렸다. 정부는 막대한 혈세를 투여해 재벌의 경제력만 강화시켰다. 2016년 구조조정의 목표도 마찬가지다. 거제에선 삼성중공업이 대우조선해양을 잡아먹을 것이라는 소문이 횡행하고 있다.


조선소 노동자들의 역할

정부와 대기업, 언론까지 조선산업의 위기를 외면하고 있을 때 노동자들이 먼저 나섰다.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한진중공업 등 주요 조선소 노조들은 지난해 ‘조선업종연대회의’를 꾸려 조선소 위기에 정부가 적극 나설 것을 촉구했다. 지난 4월 27일 금속노조와 조선업종노조연대는 서울 금융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노동자에게 책임 전가하는 구조조정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5월 13일 조선업종노조연대는 워크숍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일방적 구조조정 즉시 중단과 부실경영 책임자 처벌 △조선산업 발전을 위해 정부 정책 전환 △조선소 노동자 총고용 보장 및 사회 안정망 구축 △중형조선소 살리기 위한 정책 실시 △현대중공업 대주주 사재 환원 △조선소 인위적 매각 합병 중단 △정부는 금속노조-조선노연과 즉각 업종별 협의체 구성 등의 요구사항을 결정했다. 조선업종노조연대는 19일 국회에서 여야 정당들과 간담회를 갖는다. 6월에는 1박2일 상경투쟁을 벌인다.

그런데 문제는 13만 명이 넘는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기구와 공간이 없다는 점이다. 전체 조선소에서 비정규직이 노조로 결성된 곳은 현대중공업이 유일하다. 조선업종노조연대에도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조선업종노조연대는 워크숍에서 총고용보장 대상에 ‘물량팀’이라고 부른 하청노동자들을 제외시켰다. 해양플랜트 사내하청의 절반이 넘는 물량팀 노동자들은 ‘조선산업 교육기관’을 설립해 최저임금을 지급하라는 요구로 낮췄다.

지난 5월 11일 세 아이의 아빠인 삼성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가 목숨을 끊었다. ‘조선소 비정규직 대학살’이 시작됐는데 하청노동자들은 ‘끽’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조용히 짐을 싸서 해양 도시를 떠나고 있다. 비상대책기구가 절실한 상황인데, 일부에서는 위기가 과장됐다며 쫓겨나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외면한다. 하청노동자들이 기댈 곳이 없다. 그나마 ‘거제통영고성 조선소하청노동자살리기 대책위원회’가 구성돼 활동하고 있는 것이 다행이다. 노동 인권 시민 종교단체들이 머리를 맞대고 무엇을 할 것인지 논의해야 할 때다.


덧붙임

박점규 님은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