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이러한 정책과 관행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외국인은 많았으나 문제 제기의 결심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잠시 머물다가는 곳인데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용기를 내어 이러한 부당함을 언론에 알리기도 하였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약 50여건의 진정을 제출하기도 했다. 특히 이 사건 당사자 L씨는 이러한 근거 없는 낙인에 기반한 정책이 개인에 대한 침해일 뿐만 아니라 한국의 공중보건에도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L씨와 대리인 벤 와그너 변호사는 국내에서부터 시작한 7년간의 긴 여정 끝에 인종차별철폐위원회의 결정을 얻어냈다. 하지만 반가운 마음도 잠시였다. 결정 1년이 지금, 한국 정부가 국제인권법의 목소리마저 외면하고 있지 않은지 의문을 표하고 있다.
7년간의 긴 여정
뉴질랜드 출신 L씨는 2008년 원어민 영어 보조교사로 채용되어 한국에 입국하여 울산에 거주하게 되었다. 입국 후 몇 달 뒤에 울산교육청에서는 회화지도 비자 소지자에게 HIV 검사와 약물 검사를 요구하였다. 당시 한국은 일종의 지침으로 E2(회화지도), E6(예술흥행), E9(비전문취업), H2(방문취업) 비자 소지자에게 외국인 등록을 위한 요건으로 위의 검사를 요구하였으나, 대부분의 지역교육청에서는 재계약 조건으로 매번 이와 같은 검사를 요구했다. 이상한 것은 외국 국적이라도 한국계 원어민 교사(F4비자)에게는 이러한 검사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근거 없는 낙인으로 차별을 선동하여 한국 정부 특히 교육부를 움직인 민원들이 있었다. 이 무렵 언론에는 ‘홍대에서 한국 여자들을 사냥하는 원어민 교사’ 같은 선정적인 보도들이 있기도 했다. 조직적으로 차별선동을 조장한 집단의 대표는 교육부 정책 간담회 때 일종의 이해관계자인 ‘학부모 그룹’으로 초대되기도 했다.
L씨는 한국에서 더 일하고 싶었으며 업무 평가 성적도 좋았다. 눈을 딱 감고 검사에 응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L씨에게는 80년대에 에이즈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한 동성애자 삼촌이 있었다. 80년대의 히스테리아와 감염인에 대한 낙인과 차별이 생각났다. 필요한 지식을 알고 있는 지금은 그때 같은 무지에 의한 차별은 더 이상 정당화되기 힘들다. L씨는 한국에서 차별을 겪으며 문득 세상을 떠난 삼촌이 생각이 났고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2009년 결국 검사를 거부하기로 했다.
바로 교육부로부터 더 이상 거부하면 재계약할 수 없다는 공문을 받았다. 이 공문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하였다. 원어민 교사의 계약상 분쟁의 관할을 가지고 있는 대한상사중재원을 통해 상사화해절차도 시작하였다. 중재절차 과정에서 국제인권단체 앰네스티와 휴먼라이츠워치는 법정의견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결과는 빨리 나오지 않았고 결국 그 해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2010년 진정 6개월 이후 국가인권위원회는 각하하며, 이건 개인으로서의 피해가 아니라 체계적 인권침해에 관한 것이므로 정책과로 이관한다고 회신하였으나, 구체적인 후속 조치는 알려진 바 없었다. L씨는 최종적으로 2011년 대한상사중재원에서도 패소하였다.
국내적 구제수단의 소진(Exhaustion of Domestic Remedies)은 인권 보호는 각 국가 정부에 의하여 행하여져야 한다는 국제법상 원칙이다. 국가에 의한 인권 보호가 더 효과적이기 때문에 조약기구 상의 개인통보 같은 국제인권메커니즘은 최후의 수단으로 기능하도록 고안한 것이다. 하지만 구제 요구를 계속 거부한 상황에서 더 이상 한국의 인권보호시스템을 통해서 L씨가 들을 것은 없었다. 2012년 L씨는 인종차별철폐위원회의 개인통보절차에 진정을 제기하였다.
인종차별, 노동의 권리, 효과적인 구제에의 접근 권리의 침해
결국 2015년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인종적으로 한국계가 아닌 외국인 영어 교사에 한정된 의무적 검사정책이 공중보건이나 그 밖에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되지 않으며, 노동에 대한 권리에 있어서의 평등을 보장할 당사국의 의무를 위반하였다고 보았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각하와 대한상사중재원의 인종차별철폐협약 위반 여부에 대한 판단 부재 역시, 제6조 상 효과적인 구제에의 접근 권리를 침해하였다고 보았다.
국제사회권인권단체인 ESCR-Net은 이 결정을 소개하며 “한국 정부가 협약의 의무에 따라 법령을 개정할 것인지 위원회의 결정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보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한국의 인권보호 역사를 살펴볼 때 그리 낙관적이지는 않다”고 전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이 예감은 맞았다.
결정이 나온 지 1년이 넘었지만 L씨는 아직 ‘끝났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한국 정부로부터 손해배상을 떠나 어떠한 회신도 받은 적이 없다. 그리고 여전히 한국 정부는 채용, 입국, 체류 및 거주 목적의 의무적 HIV 검사가 공중보건에 실효성이 없으며 차별적이라는 인종차별철폐위원회, 유엔에이즈(UNAIDS), 국제노동기구(ILO)의 기준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올해 5월 프린스턴 대학을 비롯한 미국의 여러 대학은 한국의 교육부 산하기관인 국립국제교육원이 운영하는 ‘외국인 장학 프로그램’의 인터넷과 오프라인 상의 안내를 중지하였다. 모집 요강에서는 지원자들은 HIV 감염 여부를 포함해 공식적인 건강검진을 받아야 하며, 양성 반응이 나온 지원자들은 최종 선발 이후라도 자격 요건이 취소된다는 항목이 명시돼 있다. (한편 ‘임신을 한 자’도 지원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이는 대학의 일반적인 반차별 정책에 상충될 뿐만 아니라 연방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의 소지도 있었기 때문에 이 대학들은 안내를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L씨는 결국 인종차별철폐위원회의 결정을 이행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또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인권위는 결국 답을 하였다. 국무총리에게 조약기구 개인통보 이행절차를 위한 사법적 입법적 절차를 마련할 것, 외교부는 인종차별철폐협약 개인통보 결과를 이행할 것, 법무부는 E2 비자 관련 고시를 변경할 것, 교육부는 E2 비자 교사들의 신체검사 결과 제출 관련 규칙과 관행을 바꿀 것을 권고하였다. L씨에게는 결과적으로 몇 년이나 늦은 결과이지만 환영할 만한 결정이었다. 8년 만에 침해의 구제는 다시 한국 정부의 손에 놓여있다.
낙인에 의한 선동, 차별, 정부의 방관의 고리
L씨는 이 사건을 통해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L씨는 한국에서 어떻게 쉽게 소수자 집단에 대한 차별이 기능하는지 본인이 직접 겪은 사람이다. 먼저 한 집단에 대하여 과학적이지 않고 근거 없는 사실이 유포된다. 일부 언론은 이 주장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그대로 증폭시킨다. 합리성과 당위성이 없는 공포로 가득한 조직된 민원이 정책의 변화를 압박한다. 결국 정부는 사인(私人)에 의한 차별에 방관하거나 자신도 차별자로 기능한다. 이는 너무나 익숙한 고리이다.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한국이 협약을 위반하였다고 봤다. 개인통보결정이 직접적인 법적 구속력이 있는 사법적 결정인지를 떠나서, 협약 위반 여부를 감시하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 조약기구에 내린 결정에 따른 국내조치를 하지 않는 것은 쉽게 정당화하기 어렵다. 헌법 제6조 제1항의 “헌법에 의하여 체결·공포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는 문언의 규범력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인가?
한국 정부는 이 결정을 준수하여 협약의 ‘지속적 위반자’의 혐의를 벗어야 한다. 한편 이 사건의 함의가 비단 인종차별에 한하는지를 성찰하여야 한다. L씨는 한국이 이것보다는 나은 국가여야 하지 않냐며 현재 한국에서의 HIV 감염인에 대한 차별에도 우려를 표하고 있다.
덧붙임
류민희 님은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