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를 사랑방에서 담당한 사람으로서 참 답답할 때가 많다. 계륵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그 무엇이다. 국가인권위 제자리 찾기 공동행동(이하 인권위 공동행동)의 담당자로서 답답할 때가 많다. 사실 인권위를 만든 것이 인권단체이기에 갖는 책임감만이 아니다. 장애, 이주, 성소수자, 구금시설 등 우리 사회에서 가장 차별받는 사람들의 경우 그나마 국가인권기구의 권위와 인력을 빌어 차별과 인권침해의 현실을 드러내고 방안을 최소한이라도 강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처럼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공공연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국제인권기준에서도 시민사회와의 협력을 국가인권기구에게 중요한 활동방식으로 삼는다. 국가인권기구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NGO와의 관계는 중요하다. 그래서 ‘국가인권기구 지위에 관한 원칙(일명 파리원칙, 1993년 12월20일 유엔총회 결의)’ 에서도 국가인권기구의 주요 활동방식으로 NGO와의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천명했다. 사실 국제인권사회는 인권 정책을 세울 때 약자들과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비중 있게 반영하기 때문에 NGO와의 협력을 중요시한다. 법무부 같은 정부기관에서 시민사회와 얼마나 협력적 의사소통을 했는가를 중시한다. 그러다보니 ICC에서도 NGO 의견서를 받고 그 의견에 귀를 기울인다.
활동방식 (g)국가인권기구의 역할을 확대하는데 기여하는 민간단체의 본질적인 역할에 비추어 인권의 보호와 향상, 경제사회적 발전, 인종주의에 대한 투쟁, 특히 인권침해를 받기 쉬운 집단(어린이, 이주노동자, 난민, 신체 및 정신장애자) 또는 특정 지역을 위하여 헌신하는 민간단체 사이의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 국가인권기구 지위에 관한 원칙(일명 파리원칙, 1993년 12월20일 유엔총회 결의) 중 활동방식 |
ICC 등급심사 보류 NGO탓하는 인권위
그런데 1월 12일 인권위 전원위원회에서 현병철 위원장은 "다른 나라는 NGO가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데 우리나라 NGO는 국론 분열이 될 정도로 이의제기를 한다."며 인권단체들을 비롯한 시민사회를 비난했다. 국가인권기구 간 국제조정위원회(이하 ICC)의 등급심사 소위가 작년 3월과 10월 등급 재보류를 한 원인을 인권단체들이 ICC에 제출한 의견서 때문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한국만이 아니라 아시아 국가인권기구 감시 네트워크(ANNI)는 각 국가 인권기구가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면 ICC에 의견서를 제출하고 있다. ICC를 비롯한 국제인권기구의 시스템을 모르거나 왜곡하는 발언이다.
그렇게 시민사회를 비난한 인권위는 인권단체들에게 1월 29일로 예정된 <ICC 승인소위 권고의 실효적 이행을 위한 토론회>에 오라고 했다. 인권운동사랑방의 담당자인 나에게 전화를 걸어 참가를 권했다. 사랑방은 발언에 대한 사과없이 토론회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했다. 며칠이 지난 후에도 담당자는 답을 하지 않았다. 보고는 됐는지, 인권위의 입장은 무엇인지 물었지만 답이 없었다. 결국 인권위 공동행동만이 아니라 인권단체들에게 사과 없인 이행방안 토론회에 참여할 수 없다며 공식 요구를 했다. 하나는 시민사회 탓을 한 발언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였고, 둘째는 전원위원회 등에 인권위원의 실명을 공개하라는 요구였다. 여러 단체가 공식적으로 요구하자 그제서야 답을 했다. 하지만 답변은 사과가 아닌 변명이었다. 게다가 전원위 등 인권위원 실명 공개에 대해서는 마치 전원위 권한인 양 회피했다. 하지만 인권위법에는 의사공개가 원칙이기에 현행처럼 인권위원을 익명으로 처리하는 것은 인권위법에 어긋난 것이다. 2009년 이전에 회의록 익명처리는 없었다. 그리고 비공개 안건도 2006년 인권위원장 권한으로 바꾼 것이므로 꼭 전원위 의결이 아니다. 그런데도 파리원칙을 들먹이며 답변을 했다.
인권위가 보낸 답변서에는 “모든 사안을 자유로이 심리해야 한다 라는 규정의 준수와 다양하고 민감한 인권현안들을 논의하며 의결하는 인권위원들이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논의하여 독립적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전원위원회에서 익명 처리하는 것으로 결정한 바” 있다고 했다. 그런데 파리원칙에는 오히려 인권위의 책임성과 투명한 운영을 강조하고 있다.
<ICC이행방안 토론회> 불참 선언
NGO를 ICC 등급심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인권위의 시각이 있는 한 인권위가 제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국가인권위 제자리 찾기 공동행동이나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민변 등 많은 인권단체들이 불참 선언에 동참했다. 국제민주연대와 참여연대도 거부했고, 천주교인권위와 공익변호사그룹 공감도 거부했고 인권위 독립성 수호를 위한 교수모임도 거부를 했다. 특히 당일 토론자로 참여하기로 했던 대한변호사협회도 불참 선언에 함께 했다. 인권위를 비롯한 정부기관은 시민사회를 분리시켜, 마치 일부의 과격한 단체들이 불참과 비판을 하는 양 왜곡한다. (2011년 현병철이 기자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렇게 발언해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그러하기에 이번 불참 선언으로 아예 토론회가 무산되는 것이 가장 좋은 그림이었다. 안타깝게도 두 개 단체가 토론회에 참여했다. 아쉬웠지만, 대다수 시민사회가 인권위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우려하고 있음을 알리기에는 충분했다. 이후에라도 인권위가 제자리에 설 수 있도록 시민사회가 함께 힘을 모아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