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에서 반월시화공단 노동자 권리찾기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사랑방은 노동자들의 욕구와 그걸 드러내는 언어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임금’이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하는 수많은 활동 중에서 특정한 어느 활동을 여가나 취미생활 또는 자원봉사가 아닌 노동으로 만드는 것은 그 대가로 지급되는 임금과 활동 전반에 대한 통제권 박탈이다. 노동자가 고용주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다는 무미건조한 이 말은 생존하기 위해 특정한 시간, 공간에서 삶의 주인이기를 포기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돈벌이를 위해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직장인들의 블랙코미디 같은 이야기들이 회자되고, 이제는 누구도 순진하게 직업을 자아실현의 수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단지 돈벌이일수만은 없는 그들의 애환이 드라마, 만화, 소설을 통해 드러난다. 그렇다면 임금은 단지 돈뭉치 이상이다. 똑같은 액수의 돈일지라도 임금으로 받는 돈에는 노동자의 시간과 권리, 삶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이런 막연한 직관 속에서 임금팀은 작년에 생계비 임금을 넘어 정당한 임금, 공정한 임금의 가능성을 이야기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자들이 실제로 임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노동자 투쟁 속에서 임금투쟁이 구체적으로 어떤 맥락 속에서 전개되었는지 잘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일종의 가설과도 같은 임금팀의 고민을 실제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 속에서 고민할 때, 과도한 의미부여나 일반화가 아닌 노동자 권리투쟁의 디딤돌로 삼을 수 있을 듯하다. 생각보다 더디게 진행되고 있지만 이런저런 자료를 보다 보니 우리의 문제의식과 비슷한 사례들을 보게 된다. 어쩌면 이런 문제의식을 벼렸으니 이제야 보이게 된 것일 수도 있다.
60년대 부산의 대한조선공사(한진중공업 전신) 노동자들의 투쟁기록을 담은 ‘배만들기 나라만들기’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들은 노동자가 평등하고 존엄한 인간이며 합당한 임금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무조건 많은 임금이 아니라 합당한 임금이라고 표현된 형평성이 이들에게는 중요한 가치였음을 알 수 있다. 대한조선공사 노동자들이 생각하는 합당한 임금은 “노동하는 사람들이 정치적·사회적 평등만이 아니라 산업화의 결실까지 공평하게 향유하는 게 민주사회”라는 인식에서 나온다.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은 노동자가 평등하고 존엄한 인간인지를 증명받는 징표이기도 하고, 평등하고 존엄한 인간이라면 당연히 경제적 결과물도 공평하게 향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금이 단지 돈뭉치가 아니라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인정일뿐만 아니라, 임금을 대가로 평등하고 존엄한 인간의 권리를 양도하지 않겠다는 이들의 인식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70년대 여성노동자들이 주도한 노동자 투쟁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노동자 투쟁에서 빠지지 않았던 ‘인간답게 살아보자’라는 구호를 지독한 저임금에서 벗어나려는 생계비 투쟁으로만 보는 것은 일면적이다. 77년 한국노총이 전국 여성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직장을 바꾸는 주된 이유로 46%가 저임금을 꼽았다. 그런데 가장 이상적인 작업장에 대한 질문에는 48%가 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직장을 꼽았고 단지 14%가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곳을 택했다. 돈을 조금이라도 더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실제로 이직을 하지만, 인간적인 대접을 하는 직장은 찾아볼 수 없는 현실에서 노동자들의 주된 욕구와 희망은 인간적인 대우였다. ‘자존심을 정문 밖에 버려두고’ 들어가야 한다는 노동자들의 푸념, ‘노사 간을 마치 주인과 머슴 사이처럼 취급’하는 사측에 맞서는 싸움은 동등한 인간으로서 권리를 찾는 싸움이었다.
임금에 대한 노동자들의 희망은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는’ 게 아니라 ‘인간답게 벌어서 인간답게 쓰는’ 것이지 않을까?